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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의미의 의미, 실존적 부도덕 인간의 부활 - 요르고스 란디모스 감독 <킬링 디어>

 
 
제목은 그냥 사슴 죽이기가 아니다. 영화의 원제는 ‘성스러운 사슴의 살육(Killing of a Sacred Deer)’이다. 영화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영향을 받은 원작은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다.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의 딸인데 신탁에 의하면 아버지에 의해 죽어야만 하는 존재다. 하지만 제물로 바쳐진 마지막에 그녀는 사라지고 대신 사슴으로 대체된다. 누군가가가 바꿔치기 한 것이다. 그 대신 죽은 사슴이라는 뜻에서 영화의 제목이 주어졌다. 이 영화는 그 희곡의 에피소드를 갖다가 현대극으로 바꿔서 연출했다. 여기서 성스러운 사슴이란 희생제물이란 뜻인데 영화안에서 희생되고만 자식의 존재를 상정한다. 

영화는 희곡이 갖고 있는 인물유형과 주제를 그대로 갖고 간다. 자식이 자신의 범죄로 인한 댓가로 죽어야 한다는 설정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제물로 바쳐야만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신탁을 준수해야 하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갈등을 대변한다. 영화에서 아버지 스티븐(콜린 패럴)인 셈이다. 마르틴은 신탁을 행사하려는 예언자 혹은 신탁을 준수하려는 아테네시민들의 위치, 즉 당시의  사회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내(니콜 키드만)는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다. 남편이 행한 잘못 때문에 왜 자신까지 피해를 봐야 하는지 불만인 입장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영화는 오래된 신화며 희곡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해석은 하나도 맞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운명드라마다. 신의 가혹한 운명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그 운명을 피하고자 저항하는 드라마다. 마르틴은 자기 아버지를 죽였으니 너도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서 일방적으로 스티븐을 저주한다. 그 뿐만 아니라 아내를 포함한 가족 모두를 저주한다. 하지만 운명이란 무엇인가. 지금 시대에 신은 존재하지 않고 신의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현대에 와서 운명이란 무엇인가. 그건 사회의 제도며 관습이다. 스티븐의 범죄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범죄인 것이다. 그 전제로 보면 모든 인간은 범죄자다. 누구도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마르틴은 그 나약한 지점을 파고드는 악마일 것이다. 어찌보면 양심의 소리 일수도 있다. 그것이 법의 이름으로, 제도의 이름으로, 관습의 이름으로 다가와 자아를 괴롭힌다면 인간은 그에 맞서 의연히 대처해 가야 한다.  

이피게네이아 신화가 주는 교훈은 운명에 맞선 인간의 의지 보다도 희생으로 바쳐진 제물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있다. 즉 부활의 의미에 더 가 있다. 부활은 무조건 기독교와 예수를 떠올리지만 예수 이전에 이피게네이아신화는 부활의 가치를 새롭게 가르쳐 준다. 영화가 주목한 부분도 그 부분일 수 있다. 마르틴이 지적하는 부분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스티븐에게 있고 스티븐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댓가는 너무나 혹독하다. 그건 스티븐이 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애정을 기울인 대상들이 하나씩 파멸하는 것을 스티븐이 목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약한 형벌은 현대인이 지고 가야할 업보의 가장 잔혹한 지옥도다. 

  
 
이 영화가 시사해주는 다른 영화와의 차별성은 서사의 파괴에 있다. 그리스감독 요르고스 란디모스는 <송곳니>(2009)와 <랍스터>(2015) 등을 통해 무의미의 의미를 추구하는 감독으로 보여진다. 무의미의 의미란 현대영화의 대표적인 경향을 대변하는 말로써 표면적으로 서사는 말이 안되지만 관객의 적극적인 독해를 통해 의미를 발생시키는 작품을 말한다. 고전영화서사의 투명성에 반한 불투명하고 불명료한 서사전개와 영상, 음향 언어 스타일의 창의적 활용 등으로 새로운 영화언어를 탄생시키는 경향을 말한다. 

표면적인 영화서사는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서사를 그대로 모방한 듯이 보이지만 그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앞뒤가 어긋나거나 주제를 알수 없게 된다. 이창동의 <버닝>에서도 그와 같은 서사구조를 읽을 수 있다.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뒤섞여 있는 구조는 관객을 친절하게 주제로 안내하는 서사구조가 아니고 미궁속에 내버려 두는 무책임한 서사행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란디모스의 방식도 표면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를 관객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고전서사적 관객은 영화의 흥미를 잃어버리는게 상례일 것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모든 존재들이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순간 다른 독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고 그와 만남을 갖게 된 스티븐의 이유도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바르트가 말한 바 ‘글쓰기의 영도(Le degré zéro de l’écriture)’를 지향한다. 바르트는 카뮈의 [이방인]을 보고 모든 수식이 제거된 단순한 문장으로 복귀했다는 뜻에서 글쓰기의 영도를 제창한다. 란디모스의 영화적 서술법은 역시 모든 심리적 상황묘사를 제거한 상태에서 담백하게 서술된다는 점에서 영상서술의 영도를 답습한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 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양원에서 온 전보를 받았다. ‘모친서거. 내일 매장. 애도를 표함’. 더 이상 다른 말이 없다. 어제 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방인]은 담백하게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는 심장의 클로즈 업에서부터 수술하는 의사의 손, 수술이 끝난 후 가운과 장갑을 벗어던지는 의사의 모습을 느린 동작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때 음악은 요한 세바스찬 바하의 성스러운 음악 마태수난곡이 흐른다. 확실히 영화는 부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수난을 상징하는 음악은 희생의 주제가 곧 부활과 연결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으로부터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관객이 해석하는 것에서만 오로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는 본래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독자들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이유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카뮈의 주제인 실존적 인간의 부도덕함과 치열함을 바탕에 깔고 해석한다면 뫼르소라는 인간이 이미 엄청난 주제의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카뮈의 말대로 반항적 인간이며 불굴의 인간 시지프스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사형대에 선 그 순간 까지도 웃을 수 있는 낙천적이며 전투적인 인간인 것이다. 

이 슬로우 모션과 장대한 음악은 마지막 장면에 다시 반복된다. 아들을 제손으로 죽인 아버지가 아내와 딸과 같이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있다. 이때 마르틴이 들어오고 그들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지만 가족은 마르틴을 증오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섞이지 않고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망연자실한 마르틴이 그들을 바라본다. 이전과는 반전된 상황이며 영화는 복수의 주제를 향해 있다. 아들은 죽었으나 가족 모두의 심장에서 부활하여 하나가 된다. 아버지 스티븐의 인간적 실수인 범죄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정화된 것이다. 대신 그들은 다시 살아나 정정당당하게 살아간다. 인간 시지프, 카뮈의 부활이고, 뫼르소의 부활이고, 이 험난한 시대 부도덕한 실존적 인간의 부활이다. 

글·정재형
영화평론가이며 동국대 교수이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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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6,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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