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 금언은 믿어도 좋다. 사실(fact)이자 진실(true)이기 때문에……. 난세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아니었을 영웅들, 혼돈이 없었다면 역사에 획을 긋지 못했을 사람들을 세계사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그런 식으로 읽는 독법 때문에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수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잊지 말자. 영웅이 역사를 만들고, 역사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에는 한 명의 개인이 역사를 좌지우지 한다는 관점만이 아니라, 위대한 개인이 출현하기 적절한 조건들, 상황들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물론 그런 힘들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흥미로운 것은 이 힘들이 예언적인 말에 의해서 출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자기충족적 예언이 일상화된 오늘날의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이원태 감독의 데뷔작 <대장 김창수>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영화계 전문 언어로 ‘입뽕’한 감독에겐 안 됐지만, 이 영화는 그다지 수작은 아니다. 전편에 흐르는 닭살 돋는 신파조의 연기와 예측 가능한 대사와 교조적 언설들, 현 상황에 걸맞아야 할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잘 보이지 않는 영화적 담론들, 인물의 변화를 다루는 데 있어 미숙한 연출과 식상한 드라마투르기 등등 후한 평점을 주기에 인색하게 만드는 지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화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던 김구 선생을 소재로 선택했다는 점, 더구나 김구 선생의 청년 시절을 택해서 의협심 넘치지만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한 청년 김창수(조진웅)가 민족주의의 투사로 거듭나는지 다루고 있다는 점은 데뷔하는 감독의 투지로 받아 줄만하다. 게다가 이 영화의 장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천 감옥소라는 한정된 공간을 다루면서도 구한말, 애국계몽기 직전의 복잡다단한 대한제국 시기의 담론적 지층들을 엿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젊은 청년 김창수가 어떻게 의식과 투지를 가진 독립군 지도자 김구로 만들어지는가를 다루면서 김구 선생을 만드는 힘의 배치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 자체를 마음 놓고 즐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적 퀄리티란 영화미학적인 관점에서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밝혀두자. 더 중요한 것은 영화를 통한 사유와 인식이지 영화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따라서 이제 다소간 미흡하지만 이 영화를 좇아 ‘김창수→김구’의 변환 회로를 그리며 백범 김구를 만드는 담론적 지층들을 짧게 발췌해보도록 하자.
먼저 이 영화의 공간인 감옥소. 주지하다시피 감옥은 근대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듯 대한제국은 어설프게나마 법치의 흉내를 내고 있다. 이 법치는 허수아비적인 외양 뿐이고, 그나마 일본의 이식과 강요에 의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것의 결정적 한계는 고종 황제의 특별사면 교지로 김창수가 사형을 면한다는 극적인 장면에서도 여지없이 실체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상의 법치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김창수는 황해도 어스름에서 명성황후(최근에는 뒤늦게나마 자국의 왕비를 높이기 위해서 명성황후라고 부르는 모양이니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 명성황후라 칭해두자. 어쩌면 일본이 만들어 준 이름뿐인 대한제국의 왕비를 황후라 부르는 건 일본의 내정 간섭을 긍정하는 행위이니 차라리 ‘민비’라고 부르는 것이 더 분별 있는 언동은 아닐까?) 시해 사건의 일원으로 보이는 로닌(浪人)를 개인적으로 처단한다.
예나 지금이나(왕국이나 국가나) 동일하게 개인의 사적 복수를 철저히 금지한다. 국가는 개인적 복수와 사적 폭력을 독점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대한제국은 자기 제국의 황후가 불상(不祥) 무뢰배들에게 난자를 당한 것조차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하고 무력한 상태였다. 그러니 김창수는 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심정적으로 그렇다. 왜냐하면 아무리 무능한 나라라 하더라도 법을 어긴 자를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 자체가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여기에 기묘한 모순과 분리가 있다. 이것이 김창수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떳떳하고, 감옥에 붙들려 와서도 “나는 이들과 다르다”고 외칠 수 있는 명분이다. 그는 법을 어겼지만, 법을 집행해야 할 얼굴 없는 국가가 시행하지 못한 정의를 자신 스스로가 실행했다고 여긴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하다. 그렇게 국가가 제대로 된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또 느끼고 있기 때문에 감옥에 붙들려 온 사람들 모두가 김창수처럼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법을 어긴 자들은 그 법을 어기게 된 사정들(원인과 이유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게다가 국가의 법 질서 자체가 일관성이 없고 불투명할 때는 더욱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법이란 최소한의 정의, 형식상 정의의 알리바이이지 완벽히 공명정대한 힘은 아니(었)다. 게다가 법이란 정의를 실현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죄인을 만들어 냄으로써 국가가 존재하고 법이 집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법 이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천 감옥소에 수감된 수감자 모두 김창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김창수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다. 법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수감자와 수감소 밖의 사람은 별 차이가 없다. 사실 그들 모두는 법 때문에 한순간에 억울한 옥살이를 할 수 있는 잠재적 호모 사케르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을 김창수에게 전달하는 고진사(高進士)의 말을 상기하자. “이 들꽃은 무슨 죄를 지어서 감옥 안에 피었겠나? 여기 있는 사람들도 이 들꽃하고 다를 바가 없다네...여기 태반이 재판도 못 받고 갇혀 있어...안에 핀 꽃이나 밖에 핀 꽃이나 다 같은 꽃인 게야.” 고진사(정진영)의 이 말은 일제에 의해 병합될 운명 앞에 놓인 대한제국의 무력성을 생각할 때, 감옥 안의 죄수들이 무죄라고 두둔하는 언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옥 밖의 사람들도 일제에 의해 창졸간에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나라를 잃은 운명에 처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구슬픈 예언적 비가(悲歌)로 들려온다. 비상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국가통수권자만을 제외한 모두가 호모 사케르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국가를 갖지 못한 모든 사람도 한갓된 생명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고진사에 의해 청년 김창수는 감화를 받게 된다. 감옥 안에서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린다는 것,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자신의 운명이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백범 김구 선생은 단지 잃어버린(혹은 망해 사라져버린) 민족과 국가를 되찾기 위해 싸운 사람이기 이전에 한갓된 생명으로 전락한 무리-생명들을 위해 투쟁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물론 김구 선생이 국가의 3요소들 가운데 주권과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대의 담론적 배치들을 생각해 볼 때 국가를 되찾는 것 이상을 사유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김구 선생 당대에 이미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한 이후였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감옥은 근대의 법과 국가 제도, 국가라는 사회계약적 집합체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드는 공간적 기능을 수행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김창수는 이 감옥을 유사-근대 학교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역시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영화적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 점은 이 영화 <대장 김창수>의 장점이다.) 감옥이 하나의 근대적 공간이라면, 학교 역시 근대를 대표하는 기관-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여기서 행해지는 것은 교육, 다른 말로 ‘계몽’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 아직 근대적 규율에 의해 국가의 신민들로 주조되지 못한 사람들은 글자를 깨우치고, 문자(법)에 의해 국가의 국민들로 탄생한다. 이름하여 근대적 규율 주체로 만들어지는 곳, 그곳이 바로 학교다. 이 영화는 김창수가 사람들에게 글과 문자를 가르치는 장면을 낭만적이고 훈훈하게 그려놓고 있지만, 지금 김창수는 근대적 ‘감시와 처벌’의 공간을 근대적 계몽-교육 공간으로 ‘변용’(?) 시키는 중이다. 학교가 종종 감옥으로 은유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어디 김구 선생 뿐이랴. 당대의 주된 담론적 목표는 근대 따라잡기였음을 생각할 때 도래해야 할 것은 근대였지 탈근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또 잊지는 말자. 당대 공산주의 혁명이 제국주의적 근대를 끝장내는 탈근대운동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까지의 논의를 잠깐 정리하자면 김창수는 근대적 힘의 배치들을 따라서 근대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다. 감옥에서 국가와 국민을 사유하고, 감옥에서 민중을 사랑하고 계몽을 통해 근대 국민-국가의 ‘국민-되기’(?)의 방법을 배우고 익히기.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힘은 칸트의 윤리학이다. 이 대목은 자못 흥미롭다. 김창수와 대립되는 죄수-수감자들은 어찌 저찌하여 김창수와 화해하고 김창수의 편에 선다.(1) 김창수가 글을 가르쳐 줘 억울함을 풀고 감옥을 나갈 수 있게 되자 죄수들은 이제 김창수를 선생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여기서 생각나는 대사는 다소 뜬금없이 영화 <올드보이>의 “보다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안녕하신가?”란 대사다.) 심지어 간수들조차 김창수를 두둔하고 비호한다. 물론 자기 이익에 도움을 주었다거나 자신을 구하다 죽은 죄수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간수들도 김창수와 공명한다. 그들 모두 여하튼 조선민족이기에……
여하튼 죄수들은 이미 김창수와 한마음이 되었고, 간수들조차 그를 함부로 어쩌지 못한다. 이제 그들은 똘똘 뭉쳐 민족적으로 계몽되고 있는 집합적 주체가 되었다. 여기에 맞서는 한 명의 초상이 있다. 그는 인천감옥소장 강형식(송승헌)이다. 조심하자. 이 영화에서 강형식은 아무런 생각 없는 내추럴 본 악한이 아니다. 이 영화의 장점이 또 하나 있다면 다소 부족하기는 해도 강형식에게 당대 친일파의 담론을 대변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아직도 간과하고 있는 점 가운데 하나가 친일파는 일말의 양심도 없는 쓰레기 인간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를 단 한가지의 분류로 묶을 수는 없지만, 당대 친일적 지식인들은 당대 시류적 담론에 철저히 순응한 사람들이었다. 친일파들을 단지 개인적 이득을 위해서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로만 인식하는 것은 분명 단견이다. ‘대동아 공영권 이데올로기’란 그 담론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오늘날에는 우스운 담론이겠지만, 담론 체계 내에서 당대 ‘내선일체 이데올로기’를 식별하고 저항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독립운동가들이 뛰어난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강형식이 내뱉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보자. 그는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무력한 대한제국의 상황을 고려하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역사적 인식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정확한 사실판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남는 길은 일본을 통해서 조선이 근대화되는 길이고, 조선 민족주의보다는 근대화가 일어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친일파가 되어서 무지렁이 수감자들은 희망이 없는 존재들일 뿐이며, 차라리 희망은 일본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희망이지만, 조선과 조선 민중에 대한 절망이다.
강형식과 김창수는 영화 속에서 몇 번 조우를 하며 대사로 대립하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구덩이 처벌 감옥에 갇힌 김창수에게 몇 마디를 던져 주는 장면이다. 강형식은 감옥소장 노릇이 힘들다면서 김창수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만류한다. 그는 높은 지위와 자유를 구가하면서도 왜 자신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는 지금 김창수와 똑같이 대한제국의 영토에 근대화를 이룩하려고 노동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의 이데올로기언답게 개인적인 발전(재산을 축적하는 일과 죄수라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윤을 창출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감옥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강형식 그는 개인의 발전이 결국은 사회의 총체적인 발전을 이룩한다는 근대 초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는 중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근대 이데올로기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 가운데 누가 강형식 소장에게 감히 돌을 던질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는 지금 자신이 복무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자기 자신만은 그 이데올로기에서 예외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런 그가 한 마디 던진다. 그것은 사실상 김창수의 대사를 탄생시키기 위한 대사이다. “다른 놈들처럼 그냥 편하게 살다 죽어. 할 수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그러자 김창수는 강형식이 떠나 버린 자리에서 독백으로 대답한다.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칸트의 유명한 의지의 자유 “Du kannst―denn du sollst”를 김창수의 입으로 되뇌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와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의 구한말 식민지 직전의 대립 판본.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죽어버리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편하게 살려는 시대가 되어 버린 오늘날, 훗날 백범이 될 김창수의 입을 통해 이 대사를 듣는 것은 기이한 시대착오적 느낌을 준다. 여전히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미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시대에 말이다. 어쩌면 우리 시대는 겉으로는 도덕법칙을 걸어놓고 사실상 그것을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것이 겉으로라도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행하던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칸트의 윤리학은 근대를 정초하는 윤리학이었음도 있지 말자. 정리하자면 강형식과 김창수의 대립은 근대주의자들 간의 대립이기도 하다. 한 사람은 자본주의의 발전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칸트적 윤리학에 복무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역사는 후자를 높이 평가하지만 오늘은 전자의 형상이 이미 올드한 모델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계몽적 발전주의자의 말로는 결국 지금 우리가 만들어 살고 있는 현실 그 자체라는 점 말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김창수의 탈출로 마무리된다. 감옥을 탈옥한 김창수는 훗날 이름을 바꾸고 김구가 되어 다시 감옥에 투옥되기도 하고, 그 이후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김구 선생을 만들고 주조하던 식민지 직전의 일본 제국의 힘(근대의 필연적 전개로서의 계몽적 제국의 힘)들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백범 김구라는 주체적 형상이 만들어지는 장면을 그려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그 힘들의 배치, 그 힘들이 서로 엉켜드는 지점에 아무나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김구가 탄생한다고 믿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그 힘들의 결절점에서 기이한 특개성을 가진 한 인간 백범 김구가 있었음을 놓칠 수 없다. 그 특개성이 시대와 담론들의 부딪힘을 통해서만 결정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김구 선생에 대한 최대의 모독이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이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김구 선생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 등장한 나폴레옹 3세는 아니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말이 한국 독립운동사의 김구 선생에게 해당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영화를 만든다면 아마도 김구 선생을 만드는 이 힘들과 김구 한 개인의 특개성이 어디서 만나고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추적하며 그 두 힘들 간의 어디쯤에서 한 인간과 국가의 역사가 만나고 헤어지는지를 다루는 일이 영화화 된다면 더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백범 김구 선생의 일생 중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옥중 투쟁기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옥중에서 일개 열혈우국청년이 어떻게 민족의 투사로 거듭나게 되는가를 그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를 백범 김구 선생님의 젊은 시절이 어떠했는가를 받아들이는, 전기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영화는 사실상 엔딩 크레딧에 가서 지금까지 영화의 주인공 김창수가 백범 김구 선생님이었다는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서프라이징 효과와 감동을 기획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일개인으로서의 백범 김구 선생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영화에서 대장 김창수는 백범 김구라는 역사상 실존했던 한 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식민지 시대에 우리 모두가 꿈꾸었고(또 우리가 지금 기억하고 싶은) 한 형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즉, 대장 김창수는 백범 선생의 젊은 시절의 전기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식민지 시대 우리가 모두 갈망했던 한 인간이며 그 시대와 역경이 만들어낸 민족의 염원과 시대적 비극이 조우하며 빚어낸 한 위대한 인물의 형상이라는 것 말이다.
(1) 영화를 보면서 이 지점에서 <쇼생크 탈출>이 떠오르지 않기는 어렵다. 감독이 <쇼생크 탈출>에 바치는 오마쥬일까 아니면 감옥 안에서 자유를 향해 투쟁하는 형상을 다루자면 앤디 듀프레인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일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