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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리가 만들어낸 승리’라는 자신감 - 영화 <공작>이 담고 있는 감정에 대해

<공작>을 본 후 영화의 크랭크인·업 시기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그곳에 우리가 어떤 시간을 겪어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17년 1월 24일 시작하여 같은 해 7월 25일 마무리 되었다는 이 영화의 촬영 기간을 떠올리며 개봉여부, 혹은 제작 착수의 결심을 상상하며 느낄 수 있는 감정들 역시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1993년 북한 핵개발의 실체를 밝히라는 명령 아래 북으로 잠입한 대북 공작원 박석영(황정민)이 목격하는 갖가지 상황들, 즉 국가가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명령들, 명령의 하달 방식, 그리고 안기부와 정치권이 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북을 이용해 온 전력 등이 담긴 이 영화가 나왔다는 것은, 불과 작년이 시작되는 언저리 어디쯤이라면 나오지 못 했을 것이라 예상하는 그곳에서부터 의미를 얻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공작>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드러낸다는 고발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북과의 공작을 담은 내용의 영화가 언제는 나올 수 없었고, 지금은 나올 수 있다고 판단한 데에는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내용을 짐작하고 있거나 익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공작>의 내용은 사실 (흑금성과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닐지라도) 북이 없었으면 어떻게 정치를 했을 것이냐는 익숙한 질문들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알고 있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시기와 말할 수 없는 시기를 고려하는 것에서 ‘내용의 위험성’은 생성되는 것일 텐데 <공작>은 그 위험성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관객의 흥분으로 풀어내고 그 귀결을 승리로 이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따지고 보면 <공작>이 그리고 있는 인물의 구도나 내러티브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에서부터 시작된 남북의 유연하고도 친밀한 관계 가능성을 내포한 상상력은 이후 <의형제>(2010)나 <공조>(2017), <강철비>(2017) 등으로 이어지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감정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이는 <쉬리>(1999)나 <간첩>(2012),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 등을 지나면서 간첩이 우리 생활 속에 녹아들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면서 북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을 조금씩 희석시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유연해지는 흐름 속에서도 남한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은 어찌됐든 북이라는 체제가 가지고 있는 공포를 늘 저변에 깔아두고 있었으며, 그들의 공간이나 체제는 극도로 경직되어 있는 것 혹은 그와는 정반대의 희극적인 것으로 풀어내 왔다. <공작>은 북이라는 공간을 중심에 둠으로써 여기에서 오는 이질감과 위압감을 전면에 배치, 그에 대한 새로운 긴장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긴장감은 그곳이 무섭다거나 혹은 이해하지 못할 체계를 가진 곳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비록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제는 공개될 수 있는 공간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강아지를 키우고,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뉴스에서만 보던 혹은 상상으로만 그리던 경직된 공간의 탈피, <공작>의 북은 그렇게 그려지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성격 역시 입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빅브라더처럼 도사리고 있는 힘이라기보다 실존하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으로의 전환은 그곳을 조금은 부드럽게 새로운 공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거리 좁히기가 가능한 것은 이제 이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올 한해의 경험이 누적되었으며, 이 역시 ‘우리’의 힘으로 가능했다는 전제가 녹아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작>이 개봉할 수 있는 상황을 빚어냈다는 자신감과 그것에의 동조, 영화 <공작>의 흥미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박석영은 북한조차 우리나라에서 빨갱이라 불리는 이들의 당선을 원하지 않는다면, 왜 그 수많은 ‘공작’과 그로 피해자가 발생했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에 박석영의 분노가 따라 붙는 것은 물론이다. 바로 이 순간, 영화 <공작>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분노했던, 즉 모든 것을 늘 북의 도발로 치부하며 논리적인 척했지만 논리적일 수 없었던 허점을 알고 있던 이들이라면 실소를 자아낸 상황들을 확인시키며 허탈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안심을 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공작>은 결국 그 의심을 품었던 이들만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이 영화의 주인일 것이라 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공작>을 보며 느낄 수 있는 묘한 성취감, 그리고 안정감은 국가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이들의 허언, 국가를 위해서는 몇몇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망언들을 우리가 무너뜨린 후 그들에게 벌을 주고 있다는 승리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애국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구축했지만 거기에는 실상 그 어떠한 명분도, 이데올로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며 오로지 세를 득하기 위한 이들의 욕망의 뒤얽힘, 그에 대한 처벌의 기억과 승리의 순간은 우리가 불안함 없이 <공작>을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뒤섞인 감정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공작>과 맞물리면서, ‘저런 짓’을 했던 이들이 있었고, 우리가 ‘몰아냈으며’ 그렇기에 당당하게 우리가 이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자신감과 다르지 않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그로 인한 정권교체가 모두가 바라마지않던 순간으로 처리되는 장면은 이를 매우 잘 보여준다. 

사실 <공작>은 영화의 사건을 다루는 결과 인물들 사이의 감정을 다루는 결이 그리 매끄럽게 융화된다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다소 갑작스럽거나 과잉이라고 생각되는 감정들이 튀어나오기도 하며, 북의 기근이 전시된다는 다소간의 느낌 역시 무시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그려내는 마지막 순간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은 분명 이 영화에서 가장 묵직한 울림을 준다. <공작>은 남한의 가수 이효리와 북한의 무용수 조명애가 함께할 수 있었던 2005년을 박석영과 리명운(이성민)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던 때로 그려낸다. <공작>에서 그려낸 가장 평화로운 순간, 여기에는 현재에 이른 ‘우리’가 만들어낸 승리로서의 현재, 그리고 그것에 함께 공감할 것이라는 확신이 배어 있다. 이처럼 <공작>은 이 영화까지도 ‘공작’으로 생각할 이들은 철저히 배제하면서 영화 속의 감정을 쌓아 나갔고, 그렇게 현재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공작>(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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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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