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숨
우리는 감동을 그리워한다. 일상에 찌들어 하루하루 변화 없는 삶을 살아갈 때, 갑작스런 시련이 찾아와 깊은 구렁에 빠졌을 때, 아무도 찾아주거나 기억해주지 않는 외로움을 못 이겨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을 때, 그 어느 때든 감동을 그리워한다. 참으로 묘한 것은 그럴 때마다 한번쯤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외가 없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라는 절망감이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리고 과연 죽는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될까?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용기를 내어 한번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목숨>(이창재 감독, 다큐멘터리, 한국, 2014년, 96분)이라는 영화에서는 목숨을 스스로 내놓는 사태가 다반사로 일어나는 경우를 보여준다. 바로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다. 목숨을 내놓는다고?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호스피스가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는 말에 의아해 할 것이다. 이제 영화의 논리를 세심하게 좇아가보도록 하자.
영화에는 네 사람의 환자가 등장한다. 박수명(45세), 김정자(49세), 박진우(75세), 신창렬(60세). 말기 암 선고를 받아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원에 입원한 이들이다. 말하자면 의학적인 도움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약간 더 얻기는 했으나 조만간 죽고 말리라는 사실을 인정한 환자들이 모인 장소가 바로 호스피스다.
병원장의 입장은 분명하다. "우리는 다 언젠가 죽을 사람들이 지금 살아 있는 것"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된다. 그런데 말기 암 환자들에겐 죽음이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은 치료를 잘만 하면 다시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버리고 오늘 하루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항암 치료를 중단하세요.”
의사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김정자씨는 가족과 후회 없는 이별을 나눈다. 가난을 달고 살면서 평생 공들여 장만한 아파트를 휘 둘러본 후 죽음을 맞이한다. 정작 아파트 장만의 일등공신인 그녀는 아름답게 꾸며진 집에서 살아보지 못한다. 수학선생님이었던 박진우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자장면에 (아주 작은 양이기는 하지만) 소주를 한잔 곁들인다. 그리고 휴학 중에 병원에서 봉사하는 신학생과 부자관계를 맺는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이들을 다루는 영화에서 박진우씨는 웃음 담당이다. 페이소스가 가득한 웃음 말이다.
박수명씨는 호스피스에서 나와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자신과 헤어지기 원치 않는 가족을 위해 하루라도 자신의 모습을 더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기왕이면 가족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자는 심산이다. 사실 박수명의 인생은 후회가 가득한 것이었다. 열일곱 살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진 그는 자신의 열일곱 살 아들을 바라보며 회한에 젖는다. “나는 어머니처럼 졸지에 떠나지 않으리라. 평생 아들의 인생에 드리울지 모르는 어두운 그림자를 내가 거두어 내리라.” 박수명씨의 용기 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
신창렬씨의 처음은 최악이었다. 후두를 잘라내 말을 못하는 데다 혈혈단신 이 세상에서 기댈 친지도 없다. 그래서 (신창렬씨 표현에 따르면) 매사에 ‘욱 하고’, 한번 분노가 생기면 답답해 미칠 지경에 이른다. 자살 시도도 몇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이상 암 세포가 전이되지 않고 심리적인 안정도 되찾아 호스피스 병원에서 퇴원한다. 그가 병원을 떠나는 날 하늘은 제법 맑았다.
다큐멘터리는 기록영화가 아니다. 기록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국가 영상자료실을 찾을 일이다. 다큐멘터리에는 단순 기록물을 넘어서는 뚜렷한 연출의도가 있다. 바로 편집을 통해 그 일이 가능하다. 이창재 감독은 어떤 의도로 편집을 했을까? 영화 시작에 네 사람의 환자를 등장시키고 그들 하나하나의 사연을 좇기 시작하자 금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호스피스 병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 다양한 색깔의 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그들의 삶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인생과 종교의 의미를 찾는 신학생이 세상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이자 감독의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 대부분의 종교는 자살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고 한 치의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도 있다. 구태여 ‘자살’이라는 끔찍한 언어를 고르지는 않았으나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의 죽음 길에 믿음직한 동반자를 자처하고 나선다. 마더 테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는 중환자의 치료가 아니라 그들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죽음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사고가 뒤에 서 있는 것이다.
주변에 앉은 대부분의 관객이 영화 상영 내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저들의 이별을 지켜보았다. 그리곤 사람들에게 말할 것이다. “영화에서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주변사람에게 꼭 한번 씩 보라고 권할 작정이다.” 이 때 한마디를 꼭 덧붙여주시길 바란다. “이 영화를 보면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