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악마에게도 엄마는 있다 - 강유정

악마는 어떤 사회에나 존재
그 악마에게도 엄마는 있다
  • 가라타니 고진의 ‘윤리21’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된다. 과연, 아이의 잘못은 부모의 책임인가? 적어도 일본 사회에서는 아이가 저지른 잘못을 부모가 먼저 사죄해야 한다. 로버트 블로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다. 에드워드 게인이라는 연쇄 살인마를 소재로 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원흉은 바로 ‘엄마’다. 엄마 분장을 하고 살인을 거듭했던 노먼 베이츠, 작품 속에서 그를 살인마로 키운 것은 바로 강박적이며 폐쇄적이었던 엄마였다.

    범죄의 원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은 바로 성장 환경이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프로파일러인 로버트 K 레슬러도 부모와의 관계를 주목했다. 그는 대개 연쇄 살인마들의 경우 부모와의 관계가 불편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아이와 부모의 구조론적 인과성에 대한 설명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원제는 ‘우리는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We need to talk about Kevin)이다. 영화는 케빈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아들을 키운 한 엄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를 보고 나도 여전히 케빈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엄마인 에바가 느끼는 고통만은 매우 사실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한국어 번역 제목이 ‘케빈에 대하여’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는 ‘케빈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케빈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그는 ‘악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리가 악마라고 단정한 채 토론 너머로 지워버린 ‘케빈’이라는 아이를 다시 토론의 장으로 끌어낸다. 영화는 질문부터 교체한다. 범죄자는 부모가 만드는가? 엄청난 사고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모두 결손가정이나 극빈층 가정에서 성장했을까? 예상과 달리, 케빈에게는 뚜렷한 트라우마나 결핍이 없다. 엄마와 아버지는 꽤 놓은 교육수준을 가진 중산층이며 특별한 학대나 방치도 없다. 영화의 중간 중간, 케빈과 에바가 갈등을 겪지만 그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보자면 한두 번 있을 법한,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 대개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 질문의 전복을 매우 뛰어난 영화적 방식으로 재현한다. 첫 번째 방식은 바로 교차편집을 통한 스릴러의 창조이다. 이야기는 지울 수 없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이후 폐허가 된 에바의 삶을 카운트다운하고 케빈이 태어난 이후의 삶은 순차적으로 배열함으로써 결국 마지막에 두 시간이 하나로 맞물리게끔 설계되어 있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됨으로써 결국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끔찍한 사건은 전모를 드러낸다.

    린 램지 감독은 이 과정들을 색채와 음악의 미쟝센으로 전달해 준다. 영화는 붉은 빛 토마토 축제로 출발해, 붉은 색 페인트, 토마토 케첩, 잼, 마침내 피로 얼룩진 사고 현장으로 마무리된다. 붉은 색의 이미지는 케빈이라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데서 빚어지는 불안과 고통, 공포, 그리고 그 이후의 주홍글씨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컨트리 풍의 음악도 이 효과를 높여준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가 악행을 입체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말해야 할 대상은 ‘에바’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아들, ‘케빈’이다. 에바에게 욕설을 퍼붓고 그녀에게 사죄를 받아낸다 할지라도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마치 필연적 오류처럼 ‘케빈’은 어떤 사회에나 있다.

    에바, 그녀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도 자신의 집에 칠해진 주홍글씨를 기필코 씻어낸다. 그녀는 굴욕과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그것은 그녀가 여전히 수감 중인 아들, 케빈의 엄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생존일지도 모른다. 모든 악마에게도 엄마는 있다. 만일 악마가 인간으로 교정될 수 있다면 그 역시 ‘엄마’ 때문일 것이다. 우린 결국 악과 죄, 케빈, 그에 대해 다시 말할 필요가 있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2-07-31

조회수5,074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
번호제목등록자등록일조회수
292[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 정주와 여행, 그 어느 편도 될 수 없는 <소공녀>의 존재양식, 그리고 우리의 실존에 대한 물음.

서성희

2018.10.094,011
291 [서성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짝사랑 열병을 앓는 이태경의 얼굴 <제 팬티를 드릴게요>

서성희

2018.10.093,936
290[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 비루한 세상에 맞선 철학

서성희

2018.10.093,924
289[장석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산책하는 침략자, Before We Vanish> - 외계인의 지구침략을 가정한 언어공포물

서성희

2018.10.093,800
288[이수향의 시네마 크리티크] 만들어진 가족과 도둑맞은 가족-영화 <어느 가족>

서성희

2018.10.094,442
287[서곡숙의 시네마 크리티크] <비포 선라이즈> ― 관계에 대한 성찰의 여정과 사랑의 서막

서성희

2018.10.093,545
286[최재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가면의 쌩얼 - <프랭크>

서성희

2018.10.093,556
285[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백범을 만드는 힘과 배치들 ― 영화 <대장 김창수>

서성희

2018.10.093,972
28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서성희

2018.10.094,147
283[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의미의 의미, 실존적 부도덕 인간의 부활 - 요르고스 란디모스 감독 <킬링 디어>

서성희

2018.10.094,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