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미드나잇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 제시와 셀린느의 부부생활도 어느새 10년 가까이 흘렀다. 피차 마흔 살이 넘은 중견부부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이들은 오랜만에 휴가를 내어 그리스에서 보름을 지냈고 이제 일상에 복귀할 참이다. 그래서 신세를 진 가정의 소개를 받아 펠로폰네소스의 근사한 호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작정한다. 물론 아이들을 떼어놓은 채 말이다. 바로 여기서 치열한 부부싸움이 펼쳐진다.
아주 친근한 영화였다.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 부부가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가 부부의 일상에서 곧잘 오가는 것들이라서 그랬던 모양이다. 독자 중에 <비포 미드나잇>(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극영화, 미국, 2013년, 107분)를 보기 전에 혹시라도 전편들인 <비포 선라이즈1995>와 <비포 선셋2004>를 섭렵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분들은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다. 자기 부부의 현재 모습을 여실히 반영하는 대사를 좇아가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한번 쯤 전편들을 감상해보는 것도 해로울 게 없다.
영화는 모두 5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편이다. 아들을 하루먼저 보내고 공항에서 돌아오는 제시와 셀린느가 차안에서 나눈 대화, 휴가지에서 만난 네 부부(한 쌍은 아직 결혼 전이다)들이 각각 남녀로 나뉘어 나누는 대화, 모두 모인 식사자리에서 오가는 대화, 제시와 셀린느가 유적지를 거니며 나누는 대화, 그리고 호텔 방에서 나누는 대화다. 앞의 네 가지가 흥겨운 기분으로 들어 넘길 수 있는 대화라면 마지막 대화는 그야말로 상대를 해치려는 기운인 작렬하는 악마적인 대화다. 세상사 으레 그렇듯이 마지막은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과 함께 한쪽이 방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시퀀스는 비록 몇 개 안되지만 이뤄지는 대화의 양은 분량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엄청나다. 제시는 잘나가는 작가답게 매사에 농담을 섞는데 아내인 셀린 역시 활달한 프랑스 여인이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대꾸를 한다. 이들의 대화 수위가 얼마나 높은지 매번 아슬아슬한 느낌을 받을 정도다. 셀린느 역의 줄리 델피는 극본을 쓴 사람 중 하나인데 그녀의 손에서 대사의 상당수가 나왔음이 틀림없다.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007>와 <2 데이스 인 뉴욕2011>에서도 감독과 각본을 맡은 바 있는 그녀의 솜씨가 손색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순간순간 이동하는 감정기복을 얼마나 세밀하게 따라가는지 감탄할 지경이었다. 가히 각본의 승리라고 불러도 될 법했다.
감독은 부부 관계에 정답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부터 정답 따윈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펠로폰네소스의 아름다운 하루 밤만이 그들을 달래줄 뿐이었다. 이번에는 어찌어찌해서 부부싸움이 화해로 끝났지만 다음번에는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그렇게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게 인생 아니던가! <비포 선라이즈>의 달콤함과 설렘도 <비포 선셋>의 애절한 사랑과 환희도 <비포 미드나잇>에선 찾을 수 없다. 옆에 누워있는 이가 그 옛날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었던 사람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인생은 서글픈지 모른다. 이상하게 꼭 기억해두어야 할 장면만 마치 마술처럼 기억에서 서둘러 빠져나가니 말이다. 네 쌍의 남녀가 나누던 식탁대화에서 주인 마나님의 말처럼, 사랑하던 이가 죽고 나니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점점 새로워지는 게 몹시 이상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