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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더 헌트-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실험은 왜 위대해지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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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실험은 왜 위대해지지 못했나

 

 

 

1995년 북유럽, 라스 폰 트리에와 토마스 빈터베르그를 위시한 일련의 젊은 감독들이 야심차게 도그마 10강령을 발표한지도 어언 18년이 지났다. 그 세월동안 라스 폰 트리에는 <백치들>, <안티 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등을 만들며 세계 예술영화사의 명백한 한 축을 이루었고 (적어도 나의 모자란 눈으로 볼 때)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맹렬해보이지는 않았지만 토마스 빈터베르그 또한 <셀레브레이션>, <올 어바웃 러브> 등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그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올해 그는 <더 헌트>라는 작품을 들고 돌아왔다.

 

 

 

 

 

 

 솔직하게 말해보자. 도그마 선언의 동지였던 라스 폰 트리에에 비해 빈터베르그의 행보가 위용넘쳤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는 나에게 북유럽의 감독 들 중 가장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감독이다. 나는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영화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더 헌트>를 보고 개운치 않은 뒷맛을 안은 채 생각에 잠겨 극장 밖을 빠져나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의 영화는 분명 위대해 질 수 있었다. 시놉시스만 읽어보아도 그가 가지고 있던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서 온갖 경로로 인간의 본질을 논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장담컨대, 오로지 시놉시스 몇 줄 만으로 나를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이끈 영화는 흔치 않았다. 이 영화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영화였고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그 잠재력을 망쳐버렸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모두 남김없이 활용하였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어디론가 휘발되어 버린, 영화가 가지고 있던 강력한 가능성. 분명 이야기는 최고였고 편집도 나쁘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더 헌트>는 분명 좋은 영화다. 이 글은 왜 내가 확언하지 못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보고서와 같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할 명제 하나. <더 헌트>는 분명 좋은 영화다. 위대한 영화라거나 굉장한 영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완성도를 지닌 훌륭한 영화라는 점,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 글은 토마스 빈터베르그와 <더 헌트>에 걸었던 나의 기대가 영화를 보고 좌절까지는 아니더라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었으며 대체 얼핏 보기에 흠잡을 것 없어보이는 이 영화에 대해 내가 왜 확언하지 못하게 되었느냐에 대한 보고서와도 같다. 거칠게 압축한 스토리. 루카스(매즈 미켈슨)은 이혼한 유치원 교사로 전처와 아들의 양육권 분쟁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테오(토마스 보 라센)의 딸 클라라(아니카 베데르코프)가 유치원 원장에게 그가 자신의 성기를 보여줬다는 식의 말을 하며 마을 사람들은 점점 그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그는 거짓과의 힘겨운 싸움을 시작한다.

 

 

 

 

 당신이 이 몇 줄의 시놉시스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읽어냈는지 난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 이야기가 굉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테오의 딸 클라라가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설명하게 된 연유는 거창하거나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다. 클라라의 나이는 고작 7. 우리는 루카스에게 닥친 이 거대한 불행의 대서사의 근원에 대해 인과관계를 논해선 안 된다. 이 불행은, ‘그냥닥친 것이다. 7살 여자아이는 7살의 정신세계에 따라 막무가내로 그냥 원장에게 자신이 루카스의 그곳을 보았다는 식으로 말해버린다. 어찌보면 극도로 충동적인 이 행동을 설명하려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우연에 가깝다고 치부해버리는 쪽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작은 우연이 불러온 파국. 코언 형제가 <번 애프터 리딩>, <시리어스 맨>에서 유사하게 다뤄온 주제다. 비극은 언제나 작은 우연이 시발점이었다.

 

 

 

 

 

 7세 소녀의 충동적인 발언에서 시작된 사건은 이제 루카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기에 이른다. 직장에서는 해고되었고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으며 전 부인도 아들과의 접촉을 금지한다. 물론 그에게는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된 후 여자친구와의 대화장면, 루카스는 묻는다. 너도 날 못 믿는 거야?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카메라. 이어지는 대답. 아니. 그러나 우리는 이미 카메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목도했다. 한순간에 불신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린 주인공. 중반부에 이르러 영화는 파국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클라라의 증언은 단지 그녀가 7살이고 그러므로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이유로 진실이 되어버린다. 괴기한 이야기. 그러나 인터넷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에게 이런 일은 낯설지 않다. 나는 이 지점에서 <더 헌트>가 한 발짝 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 한 사람의 인생을 집어삼키는 이 마을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페이스북의 시대와 다름이 아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에게 <더 헌트>의 이 괴이하나 무서운 이야기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낼 뜻은 없었던 듯 보인다. 카메라는 이 사건을 관찰’, 혹은, ‘이입하지 결코 무언가를 주장하려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냥 보여주는 편에 가깝다. (역설적으로 그냥 보여줌으로써 주장하는 영화라고 느끼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주장하기 위해 만든 영화로 보기에는 전반적으로 내밀하게 억누르는 방식의 연출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시종일관 영화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바로 얼굴이다. 주인공의 얼굴, 마을 사람들의 얼굴, 클라라의 얼굴. 인물들의 얼굴은 거의 모든 숏에서 시종일관 스크린의 반절이상은 반드시 차지하며 우리로 하여금 이 사건의 모든 것을 똑바로 마주보게 한다. ‘얼굴은 정면으로도 잡히며 측면으로도 잡히면서 끊임없이 스크린을 공전하며 영화의 주된 이미지로 설정된다. 우리는 루카스의 얼굴을 본다. 매즈 미켈슨은 이 작품으로 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대부분의 지점까지 그의 얼굴에서 다수의 폭력이 무논리하게 행해지는 상황에 대한 강력한 분노나 서러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북유럽 특유의 체념의 정서가 짙게 깔린 그의 얼굴을 카메라는 오래오래 마주한다. 우리는 클라라의 얼굴을 본다. 그녀의 표정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가히 짐작하기 힘들다. 거짓말을 했고 거짓말을 믿었고 종국에는 자신이 정말 거짓말을 했는지, 그 일이 일어나기는 한 것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7살 소녀의 표정은 알 수 없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은 가해자이다. 아니다. 그들은 피해자이다. 그들은 루카스에게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루카스에게 폭력을 당한 (실제로 당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당했다고 믿는 것이다) 피해자이다 

 

 

 

자기 확신은 이런 식으로 길을 잃는다

 

 

 

 

 

 

 우리는 이 세 얼굴 중 누구의 얼굴에 감정을 이입할 것인가. 루카스가 마을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들을 보자. 부당함을 당하면서도 멍하니 어리둥절할 뿐인 그의 표정을 보면 우리는 자연 분노를 느끼지만 그런 우리 못지않은 진심어린 분노로 루카스를 몰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선과 악의 분명한 경계에 대한 확신은 사라진다. 자신이 불러온 비극에 대해선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사건의 핵이자 관찰자 역할을 하는 클라라의 얼굴 또한 빈터베르그는 놓치지 않는다.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의 명백한 자기확신은 이런 식으로 길을 잃은 채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실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아쉬운 지점은 빈터베르그가 감정을 다루는 수위와 심리묘사에 있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루카스 역을 맡은 미즈 매캘슨의 연기는 시종일관 폭발한다기 보다는 억누르는 쪽에 집중되어 있고 또 그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루카스는 자신에게 벌어지는 놀랍도록 부당하고 끔찍한 일에 대해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한다거나 하늘이 떨어져라 울지 않는다. 오히려 매즈 미켈슨의 연기는 상당히 덤덤한 축에 속한다. 이런 연기 연출과 더불어 도그마 선언에서 그러했듯 최대한 자연광을 사용하고 음악을 거의 쓰지 않는 연출은 맞물려 이 이야기가 굉장한 감정적인 파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제어하려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많은 영화들이 음악의 과도한 사용이나 주인공이 펑펑 우는 식의 연기를 보임으로써 관객이 울기도 전에 영화가 먼저 울어버리는 끔찍한 실수를 범하는 것이 사실이다. 감독 또한 이야기의 정서가 풀어내기에 따라 얼마나 큰 파장이 있는 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칫 감성적으로 영화가 나아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듯 보이며 또 그로 인해 연기연출에 있어서 미즈 매캘슨에게 최대한 덤덤하고 억누르는 연기를 선보이도록 주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많은 영화들이 관객을 울리기 위해 사용하는 음악의 경우는 배제하자. 영화의 의도를 위해서도 있었겠지만 그는 도그마 선언의 주축이었음을 기억하자)

 

 

 

 

 

 

 이런 식의 연기지도는 결과적으로 영화의 잠재력만 깎아먹은 셈이 되었다고 생각되는데 이야기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슬픔과 분노의 충격파가 미즈 미켈슨의 연기방식에 따라 더 파워풀하게 전달되었을 수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그가 조금 더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를 통해 중반부부터 정서의 파급력을 훨씬 키울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성당 씬에서 루카스가 폭발하는 장면이 있지만 나는 그 장면역시 조금 더 격렬하게 연출되었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빈터베르그는 자칫 관객보다 영화가 먼저 분노하는 것을 염려했지만 <더 헌트>가 좀 더 격렬한 에너지가 흐르는 영화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감정의 마그마가 아래에서 조용히 흐를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부글부글 끓는 영화였다면 더 팽팽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더 헌트>에 아쉬운 점은 심리묘사에 있다. 빈터베르그는 하기에 따라 인간본질에 대한 한 편의 훌륭한 심리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클라라가 맨 처음 원장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 경위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설득력있고 서늘하게 설명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클라라의 말을 믿는 과정을 설명한다기 보다는 보여준다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었다. 집단이 어떻게 거짓에 매혹되고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가에 대한 과정은 조금 더 길게 묘사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었어야 했다. 그 부분에 조금만 더 집중했더라면 루카스가 누명을 쓰고 박해를 당하는 쪽에 이야기를 집중시킨 현재의 영화와는 제법 다른 성격의 심리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을 것 이다. 다수의 횡포 앞에 마주한 개인의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어떻게 다수의 횡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 작동하는 가에 대해 치밀하게 탐구한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후자에 무게를 두었더라면 <더 헌트>는 전혀 다른 성격의, 보다 매혹적인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 글은 <더 헌트>에 대한 나의 불평에 가깝다. <더 헌트>는 분명 좋은 영화다. 내가 영화를 보고난 후의 감정에 실망은 속하지 않는다. 다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 헌트>는 충분히 더 위대해 질 수 있었던 작품이었고 누가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었던 흥미로운 시놉시스를 가지고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이 너무나 좋았기에, 더 진하게 남는 아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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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웅

등록일2013-01-31

조회수20,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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