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영화평론가) 무랄리 나이르 감독의 <처녀 염소>는 제목 그대로 아직, 처녀인 “염소”에서 시작된다. 농부 싱은 처녀 염소에게 라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고는 애지중지 사랑을 퍼붓는다. 아내에게 그런 싱은 정부에게 눈이 먼 남편과 다를 바 없다. 차라리 당신이 염소의 남편이 되는 게 어떻겠냐고 비아냥거려봤자 싱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그것은 바로 처녀 염소 라일라를 시집보내 귀한 새끼 염소를 얻는 것뿐이니 말이다. 문제는 이 어린 암염소에게 도통 소식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염소가 죽을 때까지 처녀로 머물 것이라며 저주어린 악담을 쏟아 붓는다. 악담의 정도는 싱이 애착을 더할수록 심해진다. 사람들은 싱의 집착을 정신병 정도로 취급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싱에게 마음 붙일 만한 현실적 대상이라곤 없다. 아내는 언제나 불만투성이이며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은 텔레비전에 붙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간다. 일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아들 녀석에게 미래는 없어 보인다. 시집보낸 딸도 문제다. 전 재산을 털어 지참금을 챙겨 보냈지만 사위는 더 많은 돈을 요구하며 딸을 돌려보낸다. 더 줄래야 줄 것도 없는 싱은 이런 딸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그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딸을 시집보내느라 더 작은 방과 하숙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고리오영감처럼 싱 역시 더 가난해 질 수도 없다. 라일라를 제외한 모든 염소도 이미 딸의 지참금으로 팔아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싱은 더욱 더 라일라에게 공을 들인다. 라일라가 새끼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돈으로 딸의 지참금을 보태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라일라에게 ‘발정’이 오고 싱은 기쁜 마음에 싱의 신랑감을 찾아 나선다. 사고로 발가락이 부러졌지만 그 정도쯤은 문제가 안 된다. 드디어, 처녀 염소 라일라에게 발정이 왔으니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라일라와 싱이 가는 여정은 순탄치 못하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여정은 어느 거물 정치가의 이동경로와 겹친다. 경찰들은 통행을 단속하며 무조건적인 안전을 부르짖는다. 처녀 염소에게 발정이 와서 꼭 접을 붙여줘야 한다고 말해보지만, 말도 안 되는 우스꽝스러운 미친 짓으로 비칠 뿐이다. 경찰들은 오히려 당신이 직접 남편이 돼보는 게 어떠냐면서 싱을 놀리고 괴롭힌다. 남루한 싱의 옷차림과 달리 싱 주변을 감싼 세상의 색깔은 총천연색으로 빛난다. 이 어색한 대조를 통해 싱이라는 평범한 소시민, 한 남자가 처한 세상의 초라함은 더 강조된다. 비아그라의 힘으로 첩을 넷씩이나 거느리는 할아버지도 그렇고 경찰들도 그렇고 그들은 노랑, 빨강 총 천연색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듯하다. 다만 싱과 라일라의 세상만이 단조로운 무채색으로 덧입혀져 있다. 싱은 공권력에 불복했다는 이유로 구금을 당하고 염소를 뺏긴다. 남의 불행에 무관심한 경찰들은 양을 돌려주며 이 양이 바로 당신이 데리고 온 염소가 맞다고 우긴다. 싱에게는 인생의 전부인 염소이지만 그들에게는 염소이든, 양이든 네 발 달린 짐승이면 다를 것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소중한 재산이나 삶을 무시하는 경찰들의 태도는 제도가 시민을 통제해 온 이후의 오래된 관습 중 하나일 것이다. 제도는 사적인 삶의 차별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결국 싱은 제도적 삶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어 미쳐버린다. 세상은 광기조차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무랄리 나이르가 만들어 낸 <처녀 염소>는 순박한 집착이 용인될 수 없는 현대 사회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 풍광들은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숨 가쁘게 지나쳐온 우리의 1960년대와도 닮아 있다. 아마도 싱에게 라일라는 단순히 새끼를 낳을 한 마리의 암염소가 아니라 이 지긋지긋한 삶을 조금이라도 바꾸어줄 만한 희망의 실마리였을 것이다. 평범한 대개의 소시민은 이 작고 초라한 희망을 끈 삼아 하루를 버텨나간다. 싱은 머리뼈만 남은 라일라를 끌고 광기의 세계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미쳐서라도 붙들고 싶었던 싱의 간절한 희망일 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