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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 정글, 당신과 나의 어느 심연- <열대병>론

 
 
사랑을 두고 ‘자기(self)’에 이르는 여정

이 영화를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실존이 빚어낸 희열과 고통의 기록으로 읽을 수 있을까. 그의 신경증적 징후가 발현된 무의식의 텍스트로 볼 수는 없을까. <열대병>에 관한 잘 알려진 평론들이 몇 편 있다. 그러나 비약적인 이미지와 끝내 분절되는 사건들이 ‘새로운 충격’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열대병>에 대한 논의를 닫아도 되는 것일까. 비평의 언어가 영화의 외양을 빙빙 돌다가 영화 밖에서 방점을 찾을 때만큼 허무한 순간도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열대병>의 미스터리한 이미지들과 논리를 벗어난 몽타주에 ‘가능한 주석’을 고안하고자 하는 안간힘이다.

<열대병>의 전반부는 군인 켕(반롭 롬노이 분)과 소년 통(사크다 카에부아디 분)이 친밀해지는 과정을 담아낸다. 카메라의 시선을 고려할 때 다큐에 가까운 로맨스라고 할 만하다. 문제는 ‘영혼의 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후반부를 해명하는 일이다. 미리 말할 것은, 이 후반부가 다양한 관점을 허락하는 초자연적 이야기로 점철된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아핏차퐁은 전반부를 채운 표면적인 연애담을 세밀하게 되짚으며 그 흐름 속에서 켕의 무의식이 어떤 궤적으로 흘러갔는지를 상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처럼 <열대병>은 그 끝을 종잡을 수 없는 불가지한 탐색 과정을 이미지텔링하며 각별한 영화체험을 의도한다. 

그러니까 아핏차퐁은 구상화와 같은 게이 로맨스(전반부)를 앞에 두고, 이때 가시화되지 않았던 켕의 신경증적 강박과 생존본능을 추상화와 같은 후반부에서 펼쳐 보인다. ‘자기(self)’를 찾아 간절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켕의 이야기가 <열대병>의 대미를 이루는 셈이다. 역설적인 것은, 켕이 아핏차퐁의 생활 세계를 반사하는 사실적 기표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아핏차퐁은 자기 경험에 의지해 무의식적으로 <열대병>을 찍었음을 누차 밝힌 바 있다. 심지어 영화 속 대화나 로케이션도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미스터리한 영혼의 실체를 수소문하는 후반부의 신비한 모험에 대해서도 “일기”라는 단어를 동원해 형이하학적으로 풀어내려 한다.(「영화평론가 김소영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인터뷰」, 『씨네21』, 2004.10.30.) 그렇게 보면 <열대병>은 아핏차퐁을 대리하는 인물들(특히 ‘켕’)로 써내려간 자기 반영성이 두드러지는 내면 여행의 기록이다. ‘영혼의 길’이라는 제목을 가진 후반부만 떼어 놓고 보면, 작가의 실존이 (때론 그 자신도 모르게) 불러낸 환영들의 거처일 수 있겠다.

조금 더 면밀히 해석적 입장을 공유기 위해서는 <열대병>의 첫 자막을 되뇌어야 한다. “인간은 본래 야생적 동물이다. 인간으로서의 우리 의무는 그 동물을 억제하고 야수적이지 못하게 조련하는 조련사처럼 되는 것이다.”(돈 나까지마). 사실 이 자막은 전반부의 이야기와 불화한다. 전반부는 켕의 통을 향한 사랑이 성사된 후, 서로의 감정이 고양되는 순간에까지 편안히 도달한다. 그 때문에 그 자막은 <열대병> 전반부의 이야기 내에서는 그리 유효하지 않은 메시지이다. 오히려 영화가 끝난 다음에 그 의미의 구체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맨 나중에 선별된 후, 전략적으로 맨 앞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후반부, 곧 켕의 내적 여정을 가시화하는 이미지들이 중요하다. 켕이 대타자의 시선과 다투면서 고독과 고통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어떤 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점을 경유할 때, <열대병>은 방치된 근원적 욕망과 대면하기 위해 무의식의 생태계를 더듬는 켕의 모험이 된다.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른 바 없는 심연의 이미지를 탐색해 가는 상상적 여정이 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도구로 쓰인 거대한 세트는 정글, 그 자체다. 그곳은 인류의 기억과 신화의 상징이 대화하는 장소고, 사랑이 사랑 자체로 완성되는 내적 평정의 경지가 감춰진 곳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미리 일러준 사람이 있다. 인간 영혼의 미스터리한 지도를 완성하려 한 융이 바로 그다. 그는 정신의 심층을 탐험했던 숱한 모험가들이 지나쳤던 표지들을 간과하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현상과 신화의 이야기가 점착되는 <열대병>의 후반부는 융의 부축을 받아 탐험할 때 더 흥미로운 논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켕은 정글의 심연으로 들어갈수록 세계를 대면하기 위해 자아가 채택한 습관적 얼굴인 페르소나를 벗는다. 그곳은 개인적인 것을 초월하여 실재하는 비개인적 영혼의 세계다. 칸트의 표현대로라면 ‘물 자체(Ding ansich)’가 머무는 영역이다. 켕은 그렇게 우리의 인식 범주 바깥에 존재하는 근원적 힘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러한 해석적 입장을 앞세우는 이유는, 먼 옛날 크메르인 무당의 영혼을 찾는다는 후반부의 설정을 단지 ‘기이하다’는 진술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다. 켕이 만난 원숭이와 호랑이를 포함한 여러 신화적 이미지들이 ‘신비하다’라는 단어를 넘어서는 의미로 갈무리되기 때문이다. 자막 정보를 근거로 말하면, 켕이 통을 찾아 떠나는 정글 탐험은 밤마다 호랑이로 변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무당의 영혼을 죽이기 위한 실천이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정글 한복판은 고통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어떤 심연의 ‘중심’이다. 이 ‘중심’은 당연힌 현실의 좌푯값을 갖는 시공간이 아니다. 힌트를 말하면, <열대병>이 한 사람을 향해 먼저 사랑에 빠진 이가 상대의 마음을 얻어가는 과정에 대한 미스터리한 ‘텔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글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각별한 체험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 통합을 이루는 어떤 심급, 혹은 신이한 가설로 융이 제시한 인격의 ‘중심’과 관련된다. 그 맥락에서 보면, <열대병>은 무당의 영혼을 죽이려다가 스스로 그 신비한 힘에 포획당한 자, 적층된 기억을 이고 사는 신화적 야수와 한 몸이 된 자를 해명해야 하는 영화다. 지금부터 그 기이한 순간을 술회하기까지 <열대병>이 어떤 이미지를 밟아갔는지 따라가 보기로 한다.    

  
 
게이 로맨스의 기이한 틈새들 

아이는 거대한 성과 맞닿은 농장 뒤 초원에 있다. 그때 어두운 구멍 하나를 발견한 아이는 호기심에 이끌려 그 구멍 안 돌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화려한 커튼 뒤 사각 공간에 금으로 만든 보좌가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높이 4-5미터, 지름 50센티미터쯤 되는 거대한 형체를 본다. 살과 피부를 가진 거대한 형체. 꼭대기에 열린 하나의 눈을 향해 빛이 쏟아지고 아이는 공포에 휩싸인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래, 잘 보거라,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잡아먹는 신인귀이다!”(비비안 티보디에, 『100% 융: 알기 쉬운 융 심리학』, 학지사, pp.20-21 요약.)
 
이는 융이 서너 살 때 꾼 것으로 알려진, 그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꿈이다. 이른 바 ‘남근 꿈’. 이 꿈에 표상된 이미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혹자는 인간 내면의 지도를 탐색해갈 융의 미래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다고도 말한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저항이 불가능한 강렬한 매혹에 이끌려 무의식의 심연에 다다르는 장면이 이 꿈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열대병>의 후반부 이미지를 켕의 무의식에 틈입한 이미지로 본다면, 융이 목격한 초원은 켕의 정글로, 구멍 아래 돌계단은 나무들 사이 발자국으로, 금으로 만든 화려한 보좌는 마치 살아있다는 듯 빛을 내는 나무로, 거대한 남근은 압도적인 호랑이 이미지로 전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켕이 통을 향한 사랑을 성취하는 과정은 그처럼 신비한 무의식의 깊이에서 해명을 가디린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열대병>은 켕의 경험을 두 가지 버전의 ‘보여주기’로 풀어낸다. 전반부는 켕이 통의 사랑을 획득해가는 외적 여정을 담담히 묘사한다. 의식과 낮의 영역을 다루고 거리와 시장의 세계를 그린다. 그리고 그 끝엔 행복에의 침잠이 있다. 그에 비하면 후반부는 자기 안의 무의식적 공포에 근접해가는 과정을 다룬다. 무의식과 밤의 영역이 도래해 있고, 정글과 야수의 세계가 펼쳐진다. 

아직까지 망설여지는 것은, 켕과 통의 연애를 ‘사랑’이라고 일반화할 것인지, ‘동성애’라고 특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이 부분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켕의 내면에 드리운 공포와 긴장을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에 비춰 해석할 것인지, 아니면 특수한 사랑의 형태인 동성애 과정에서 견인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인지에 따라 후반부의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해도 이 글의 초석적 관점은 유효하다. 그 차이는 단지 영화적 긴장의 질과 강도의 문제다. 여기서는 <열대병>이 게이 감독인 아핏차퐁의 생체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전제를 따르기로 한다. 그 연장선에서 켕과 통의 사랑을 특기할 만한 연애의 형식으로서 ‘동성애’라 호명할 것이다.

물론 <열대병>의 전반부는 켕의 성 정체성에 특별한 시선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동성애적 성향이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발현된 것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다. 관객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동성을 사랑한다는 행위, 그리고 동성애에 편견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한 소년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이성애의 과정보다 훨씬 지난할 수 있으리라는 추론뿐이다. 이 추론은 매우 중요하다. 아핏차퐁은 평온한 게이 로맨스를 그리는 전반부에 그와 같은 추론의 여지를 정확히 남긴다. 

이를테면 <열대병>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켕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렇게 해석을 받는 허구적 캐릭터라는 인상을 벗고 우리와 그 사이에 존재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지운다. 지금 켕은 밤이 찾아 온 수풀 근처 통의 집 평상에 앉아 있다. 집과 정글 사이, 사람의 세계와 야수의 세계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경계를 넘나들 것이라는 언질을 미리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그의 입가에 번지는 엷은 미소는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타자화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건넨 언어의 내용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결국 켕의 어떤 ‘은밀한 말 걸기’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 비밀스러운 언어를 추수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은밀한 말 걸기’는 정글에서 발견된 시체를 곁에 두고, 평상 위에서 통의 가족과 켕이 식사를 끝마친 후 다시 한 번 이뤄진다. 그 평상 위의 식사 때, 한 군인과 소녀(아마도 통의 자매)가 눈빛을 교환하고 곧이어 켕과 통도 미묘하게 시선을 교환한다. 이성애적 제스처와 동성애적 제스처의 나란한 배열 혹은 교차. 통의 어머니는 교환되는 감정들을 눈치 챈 유일한 인물이다. 이후 “오늘 밤 시체가 붕 떠서 위치가 바뀔 거야”라고 말하는 통 아버지의 대사가 지나간다. 아마도 아핏차퐁은 이성애와 다름없는 동성애의 시작에 대해, 그리고 기적처럼 오는 사랑이 움트는 순간에 대해 무언의 인상을 준 것이다. 이후 아핏차퐁은 좀 더 용인받기 힘든, 그리하여 외부의 검열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의 여정을 출발시킨다. 

그렇게 보면, <열대병>의 전반부는 청량감 넘치는 음악으로 시작해 같은 음악으로 마무리되는 단순한 게이 로맨스가 아니다. 켕의 내적 통증을 상상해볼 수 있는 여러 ‘틈새’들이 숨어 있다. 먼저 통은 성 정체성의 측면에서 불분명한 상태에 놓인, 어쩌면 성적 지향에 있어서 미분화 된 소년처럼 보인다. 굳이 비교하면, 동성애 보다는 이성애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 장면들이 있다. 예컨대 영화 초반, 그는 시내로 나가는 차에 앉아 건너편에 앉은 여성과 호감어린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그가 이성애적 성향에 안주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암시도 있다. 그는 켕이 입는 군복을 걸치고 시내에 나가 일자리를 구하기도 한다. 통은 여성에 대한 호감과 켕(동성)에 대한 선망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통의 그런 미분화된 성적 지향에 대한 정보가 우리(관객)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켕은 통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이나 호감 수준을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접근해간다. 반면 켕의 게이로서의 정체성은 매우 확실해 보인다. 예컨대 전반부 말미 켕이 통과 시내에서 데이트를 할 때, 에어로빅을 하는 군중을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때 무대에 선 에어로빅 남자 강사는 남자(통)와 데이트를 하는 켕에게 손 인사를 한다. 켕의 그에 대한 눈인사는 동성애자들 간의 비밀스러운 신호처럼 느껴진다. 

그처럼 켕은 자신의 고백에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없는 통을 곁에 두고 번민의 시간을 견뎠을 것으로 보인다. 이 번민의 실체와 강도에 대해서는 다른 씬에서 더 정확히 확인 가능하다. 켕의 수줍은 고백을 뒤늦게 인지하고 호감으로 답한 통은 그와 연인으로서 첫 데이트를 가진다. 그때 절에서 꽃을 파는 여인이 나타나 남편과 30년 전에 만났던 이야기를 하며 그 사랑을 ‘말라리아 로맨스’라고 정의한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너무 욕심을 부려 얻은 금을 잃어버린 두 남자에 대한 옛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의 교훈은 틀림없이 ‘절제’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그 순간 우리는 <열대병>의 첫 자막, 곧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 존재하는 동물의 야수성을 조련해야 한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된다. 그 자막 역시 맹렬한 관성을 가진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전언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절제’와 교환될 수 있으나 성격이 전혀 다른 단어를 알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절제’는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이뤄지는 개인적인 명령체계를 따른다. 초자아의 이드에 대한 요구와 인준 철차에 대한 용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개인의 의지를 따라 작동하는 사적 메커니즘으로서 ‘절제’에의 요구가 공적 목소리로 외부에서 틈입할 때, 우린 그것을 ‘검열’이라고 부른다. 중요한 것은, 시선과 응시 사이에서 분열하는 주체인 우리는 ‘절제’와 ‘검열’의 메커니즘 사이에서도 분열하며 산다는 것이다. 이 진술을 좀 더 통찰하기 위해 영화의 다음 순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절에서 꽃을 파는 여인을 따라 켕과 통은 들판을 지나 숲속에 숨겨져 있는 동굴 구멍 아래 은밀한 절을 향해 계단을 내려간다(마치 어린 융이 꾼 꿈처럼!) 계단을 내려가니 빨간 옷과 화려하게 치장한 부처상과 초들이 있다. 거기서 나란히 향을 피운 켕과 통은 여인의 안내를 받아 더 완전한 어둠의 통로로 내려간다. 여인은 그 통로를 지나면 호수 밖으로 나가게 돼 있다는 정보를 일러준다. 축복받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정말 신기한 통로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와 더불어 곧 촛불이 꺼질 것이며 그 이유가 단순히 산소 부족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죽음 혹은 유사 죽음의 심연이 그들 앞에 당도한다. 바로 그 순간 세 사람 중 켕만 어떤 소리를 듣고는 “무슨 소리지?”라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오직 켕이 들은 소리는 무엇인가. 유독 켕만 느낀 신비한 긴장과 공포는 무엇인가. 그런데 그 대답을 차분히 마련해보기 전에 켕은 자리를 박차고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통이 그 어둠의 길을 재빠르게 건너갈 수 있다고 말해 봤지만, 켕은 그 암전의 심연에서 극복할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이 씬의 긴장은, 그들이 햇볕  가득한 지상 위로 올라가면서 이내 끝난다. 그리고는 켕과 통 사이에 흘러 다니는 잔잔한 설렘이 충만하게 만져지는 전반부의 마지막 시퀀스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동굴 안 어둠의 통로 씬은 <열대병>의 전반부가 잔잔한 게이 로맨스라는 단정적 진술을 빠져나가는 서사적・이미지적 틈새다. 저 땅 속 심연, 오직 어둠과 죽음에의 긴장이 놓인 통로에서 켕이 들은 소리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그리하여 ‘영혼의 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후반부는 이 어둠의 통로에 대한 야심찬 상징일 수 있다. 전반부에 등장한 여러 정보와 규합되지 않는 틈새의 전언이 거기 있는 셈이다. 정확히 다시 말하면, ‘영혼의 길’에서 통을 찾기 위해 켕이 진입한 정글의 밤은 결국 전반부에서 켕이 통과하지 않은 어둠의 심연을 지나쳐보는 체험일 수 있다. 그는 결국 거기에서 죽음과 같은 공포의 실체를 맞닥뜨리고 언어화 된 소리를 명확히 인지하게 된다.

  
 
정글, 적층된 기억 혹은 원형의 세계

<열대병>의 후반부, 곧 ‘영혼의 길’이 전반부의 서사적・이미지적 틈새들에 대한 아핏차퐁의 실존이 빚은 상상력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유의미한 논리가 성사된다. 그 흐름을 순차적으로 밟기 위해 후반부의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기까지의 씬을 좀 더 세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늦잠을 잔 통의 모습을 비춘다. 그의 방 창 밖에서 틈입하는 새소리, 벌레 소리는 그가 현실의 시공간에 정박해 있음을 또렷하게 전한다. 그러나 군복을 입은 켕이 통의 방 안에 틈입하자 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켕이 통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이때 카메라의 위치는 늦잠을 잔 통을 바라보던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다. 켕은 통이 사라진 부재의 자리에 정확히 앉아 그가 남긴 ‘결핍’을 감각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켕은 통의 사진첩을 넘기며 그의 시간을 쓸어본다. 다음 장면은 사진첩을 넘기며 사진에 담긴 통의 모습을 훑는 켕의 초점 쇼트다. 그런데 사진첩을 몇 장 넘기는 그 과정에서 우린 정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쉽게 눈치챌 수 없는 영화적 마술이 이 장면에 있다. 켕이 통의 사진첩을 두어 장 넘기는 그 순간 켕은 지금 정글의 밤 어딘가로,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시공간으로 건너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15초에 달하는 매우 긴 암전이 들이닥친다. 

다시 천천히 페이드인 되고 나면, 타이의 민화 속 호랑이 형상이 있다. 통이 저 신화의 세계 속 호랑이에게 갔다는 암시가 거기 있다. 이때 자막과 이미지로 옛 이야기가 전달된다. 여러 동물로 변신할 수 있었던 신통력을 가진 크메르인 무당에 대한 설화. 정글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에게 요술을 부렸던 그는 호랑이로 변신했는데, 어느 사냥꾼이 호랑이를 죽여서 호랑이 영혼에 무당을 가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호랑이 시체는 칸차나부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마지막 자막은, 밤마다 무당의 영혼이 호랑이로 변하여 사람들에게 출몰하고 있다는 정보다.  

그렇다면 켕이 찾아들어가게 될 정글은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무엇보다 통을 데려 간 호랑이의 세계다. 그리고 그 길은 ‘결핍-욕망’의 메커니즘을 발동시킨 사랑의 대상으로서 통에 이르는 세계이기도 하다. 바꿔 말하면, 지금부터 정글은 사랑을 찾아가는 켕이 불러낸, 혹은 그에게 와 닿은 환상이다. 켕은 그 스스로에게도 파악되지 않은 마음의 지형을 따라 사랑과 공포, 희열과 죽음이 같이 있는 땅에 들어간다. 성적 행복과 만족을 향하면서도 그것의 틈입과 관여를 금지하며 죽음을 추구하는 리비도의 양가성이 펼쳐놓은 미지의 세계가 거기 있다. 

여기서 ‘영혼의 길’을 읽는 과정에서 반드시 해명해야 할 의문들, 예컨대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세계에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단일한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 무당(무당의 영혼)은 누구인가. 지금도 누군가의 육체와 영혼을 빼앗고 이미 마을 사람들과 가족들, 통을 데려간 그는 누구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하나의 유의미한 가설은, 그가 실체없이 실존하는 정신의 보편자로서 원형적 이미지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초자연적인 세계의 이야기로 보기 어렵다. 그 신이한 세계로 켕과 우리가 본격적으로 옮겨지는 시점은, 이상한 소리장치에 이끌린 무당의 영혼을 만나 켕이 난투극을 벌이는 씬부터다. 유념할 것은, 무당의 영혼이 통의 외모를 하고 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벌거벗은 몸에 이상한 문신이 가득 새겨진 여기에서의 통을 <열대병> 전반부의 이야기 속 통과 구별하여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켕은 정글 안에서 구출해 데려가야 할 대상으로, 아직 현실적인 시선으로 통을 대한다. 그 결과 통과 함께 정글 밖으로 나가려는 켕과 켕을 떨치고 정글 안으로 돌아가려는 이상한 통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진다. 켕의 입장에서 이 장면을 읽으면, 통이면서 통이 아닌 존재와의 긴장이고 사랑의 대상이면서 죽여야 할 목표와의 갈등이다. 결국 통은 켕을 따돌리고 정글로 돌아가게 되고, 켕은 정글 바깥 대낮의 들판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 순간 아핏차퐁은 켕의 상처입은 손바닥을 굳이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기이한 장면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의 다른 판본이라는 것이다.

그때 암전과 함께 자막 하나가 떠오른다. “갑자기 이상힌 기운이 군인의 마음을 죄었다.” 그리고는 다소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 인서트 쇼트가 삽입된다. 먼 거리로 빽빽한 나무들을 품은 산의 능선을 관조하는 장면. 켕이 선 곳이 정글에 둘러싸인 장소라는 사실과 함께 어떤 미지의 심연이 기다리고 있다는 암시가 그렇게 주어진다. 그리고는 잔혹하게 뜯긴 소의 시체, 그러니까 무당의 영혼이 실존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상기된다. 이제 켕이 다시 진입하게 될 정글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심지어 켕은 원숭이가 내는 소리를 인간의 언어로 듣는다. 원숭이의 소리가 신화 속 ‘전령’의 목소리로 치환되는 세계에 당도한 것이다. 

군인, 호랑이가 그림자처럼 널 뒤쫓고 있어. 그의 영혼은 매말랐고 외롭지. 네가 그의 먹이이자 친구야. 그는 산 멀리에서도 널 냄새 맡을 수 있어. 너도 곧 똑같이 느낄 거야. 그를 유령세계에서 빠져나오게 그를 죽여.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널 그의 세계로 집어넣을 거야.
  
원숭이가 들려준 이 대사는, 통의 모습을 하고 왔던 무당이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착종된 존재였음을 환기시킨다. 사랑이 향하는 대상이자, 죽음의 신호를 가진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호랑이다. 이후 켕은 정글 안 작은 늪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고 온몸에 위장을 한 채, 무당의 영혼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내보인다. 잠깐 틈입한 쇼트에서 무당의 영혼이 깃든 통이 울면서 정글 안으로 더 깊이 숨는 모습이 비친다. 켕은 침착하게 나무 아래에서 총을 쥐고 기다리다가 총을 쏜다. 총에 맞아 죽은 대상은 한 마리의 소다. 그때 마치 반딧불 같은 작은 빛이 나타나 켕의 시선을 이상한 나무로 데려간다. 신비한 빛에 휩싸여 흔들리는 그 나무는 현실적 논리를 완전히 벗은 초월적 이미지로 들이닥친다. 

켕은 홀린 듯 나무에 다가가는가 싶더니 급기야 무릎을 꿇고 기어가기 시작한다. 그 걸음의 끝에서 그는 드디어 호랑이를 만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호랑이의 눈을 만난다. 켕의 미소 띤 응시(전반부)를 따라 그의 내면을 여행하던 우리가 맞닥뜨린 호랑이의 응시. 이 순간은 놀라운 영화체험이다. 그 호랑이로부터 쏟아진 소리는 종종 정글을 뒤흔들던 야수의 포효가 아니다. 신비하게 전달되는 그 언어는 이제 켕과 우리가 함께 들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나 자신을 보고 있다.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공포. 슬픔. 모두 너무 현실적이어서. 현실적이어서. 그런 것들이 나에게 삶을 생각하게 했다. 이전에 너의 영혼을 빼앗았지. 우리는 동물도 인간도 아니다. 호흡을 멈춰. 보고 싶었어. 군인. 유령. 너에게 준다. 내 영혼, 내 육체. 그리고 내 기억을. 내 피 모두를. 우리 노래를 불러. 행복의 노래. 거기... 들려?
 
이 목소리를 전반부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해석을 하면, 켕은 이 장면에 이르러 통에 대한 욕망을 대타자의 시선에서 검열하던 밤에서 해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추론에 따르면, 켕은 무수한 금기를 앞세운 세계의 집단적 요구에 시달려 왔고, 그의 자아는 ‘절제’라는 덕목을 앞세워 자기 욕망을 규율해 왔다. 통에게 마음을 고백하기까지, 그리고 속절없이 지연되던 응답을 듣기까지 유사 죽음의 긴장을 느껴온 것이다. 켕에게 그 긴장은 금기를 넘어서는 위반의 공포이면서 사랑하는 상대(통)가 함께 그 금기를 넘기까지 작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공포였다. 

그러나 이제 헤아릴 수 없는 시간 동안 적층된 기억의 목소리로부터 켕은 진정한 ‘자기’를 경험하고 ‘행복의 노래’를 선물 받는다. 대타자의 검열에 끌려 다니던 자아는 그 순간 패배한다. 금기에 귀 기울이며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 대극 사이의 고통을 짊어져 온 그는 특수한 자기 사랑의 형태(동성애)와 화해한다. 정신의 보편자, 곧 원형의 손짓에 완전하게 굴복당하는 형태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용인하는 셈이다. 

융은 매우 분명하게 원형과의 마주침을 설명한 바 있다. 간명하게 말하면 그것은 ‘영혼을 빼앗기는 충격’이다. 존재 가장 심층으로 단번에 빨려드는 만남이란 것. 그 체험은 영원한 표상들의 갑작스러운 깨임을 느끼는 것이고, 완벽한 격정과 완전한 공포 앞에 압도되는 경험이다. 그 관점에서 보면, 호랑이의 목소리는 켕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집단 무의식의 세계에서 솟은 것이다. 타이인 혹은 인류의 영혼이 가늠하기 힘든 시간동안 느낀 모든 기억과 감정에서 발화된 것이다. 

그처럼 초월적 시공간에 존재하는 무당의 영혼이 켕을 사로잡는 장면은 단박에 설명할 수 없는 의미로 온다. 켕의 통을 향한 사랑의 형태를 포용하는 원형의 울림으로 온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열대병>으로부터 압도적인 영화체험을 이야기한다면, 켕의 내면 깊숙한 텅 빈 틀을 장악한 그 목소리 앞에서 켕과 더불어 굴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호랑이 이미지를 타이인들이 신뢰하는 특징적인 내적 표상으로 변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이인의 경험과 기억 속 침전물로 아핏차퐁이 물려받은 어떤 이미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호랑이 이미지가 초세속적인 신성을 환기시킨다는 점엔 이견을 달기 어렵다. 그리하여 질적으로 다른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당의 목소리가 정신의 보편자, 곧 원형적 세계에서 발화된 것이라는 해석은 타당해 보인다. <열대병>의 마지막은 영화로 만나는 누미노제(numinose) 체험을 의도하는 셈이다.
  
  
 
이토록 심미적인 커밍아웃

지금까지의 해석에 의지해 말하면, <열대병>은 게이 로맨스에서 출발해 무의식의 인류학까지 나아간 영화다. 이 표현은 게이 감독으로서 아핏차퐁이 그린 자기 영혼의 지형도에 대한 평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영화적 시도가 껴안은 심미적 깊이와 너비에 대한 찬사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해명할 수단은 찾지 못한 채 켕의 곁에서 어떤 신화적 심연까지 내려가는 공포를 느꼈다. 사실 융은 원형에 빨려 들어가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원형적 이미지를 직면한 자아가 그 이미지에 빠져들어 압도되는 일은 당연하다는 논조다. 심지어 그는 그 공포 앞에서 우리가 저항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다. 만약 당신이 <열대병>을 봤다면, 그런 류의 체험이 자아가 감당할 수 없는 풍부한 의미의 도착이란 사실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켕이 호랑이의 언어로 채운 자기 안의 불가지한 ‘빈 곳’은 그런 신비를 머금는다. 켕이 내면의 여정에서 특별한 공포에 매혹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내적 평정의 경지로 들어섰다는 역설은 그 신비의 또 다른 내용일 것이다. 

 <열대병>의 정글은 자연적인 것에서 비자연적인 것을 지나, 그렇게 초월적인 어떤 것을 쏟아놓는다. 아핏차퐁은 <열대병>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정글을 소재로 한 유사 실험을 했지만 <열대병>은 그의 개성이 가장 탁발한 작품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어떤 실험은 운동이 되기 어렵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실험의 주체로서 작가의 날인이 너무 강하고 고유할 때에도 그런 사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아핏차퐁의 영화는 유사한 영화들 사이의 영향관계로 완성되는 어떤 ‘계보’ 안에 끝내 수렴되지 않을 것도 같다. 그는 오로지 그만이 닿을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에서 흉내 내기 어려운 양식과 방법, 태도를 궁리해 갈 것이다. 그리하여 <열대병>이 보여준 정글의 깊이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면, 이토록 심미적인 커밍아웃을 다시 만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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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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