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활극의 계절
- 암살과 베테랑 -
극장가에서는 방학을 전후한 여름과 연말연시를 대목 시즌으로 구분한다. 그래서 이때쯤엔 으레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기 마련이다. 올해 여름의 최강자는 어떤 영화가 될까? 작년에는 대체로 한국영화들이 선전했다. 독자 분들도 <해적>, <명량> <군도> 등이 떠오를 것이다. 올해는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국내영화로는 총 18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자한 <암살>(최동훈 감독, 극영화/활극, 대한민국, 2015, 139분)년과 제작비는 그에 많이 못 미치지만 탄탄한 출연진이 돋보이는 <베테랑>(류승완 감독, 극영화/액션, 대한민국, 2015년, 123분)이 있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미션 임파서블>이 잔뜩 눈을 부라리고 있어 예측이 힘들다.
과연 이번 여름의 승자는 어떤 영화가 될까?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매우 궁금한 질문이다.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활극에게 영광이 돌아갈까, 나름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담은 액션물이 최후의 승자가 될까, 아니면 실패를 모르는 할리우드 대작이 마지막에 웃게 될까?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그가 어떤 작품 활동을 했는지 그 궤적이 그려진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범죄의 재구성2004>, <전우치2009>, <타짜2006>, <도둑들2012> 등등이 있는데, 한마디로 재미를 추구하는 게 그의 목표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은 영화의 작품성에 매료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시원한 액션을 즐기러 극장을 찾는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 예술성에만 목을 매는 관객도 없고 액션물에만 목을 매는 관객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설혹 예술 영화 매니아라 할지라도 가끔씩은 활극을 즐기곤 한다. 같은 관점에서 최동훈 감독은 언제라도 믿음직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액션을 담은 활극을 만드는 일에 이력이 나 있으니 말이다.
이 말은 <베테랑>을 만든 류승완 감독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역시 영화를 통해 이제까지 다루지 않았던 신선한 액션을 선보이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그에 따라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짝패2006>, <부당거래2010>, <베를린2012>, <배우는 배우다2013> 등등이 적합한 예다. 그러니까 두 감독에게 두어야 할 첫 번째 기대는 액션과 활극인 것이다. 만일 거기에 시사성과 철학이 담겨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리되면 이는 혹 지나친 기대가 아닐까?
<암살>의 주인공은 단연 전지현이 역을 맡은 독립군 저격수 안윤옥이다. 안윤옥은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여서 아기 때부터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만주 독립군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최고의 저격수로 자리 잡았으며 마침내 김구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암살단 대장이 되어 경성에 침투한다.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그 중에는 가족도 있고, 사랑을 나누게 된 남성도 있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건 동지들이다. 이렇게 바탕을 깔아놓으면 그녀가 어떤 폭력을 사용하든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안윤옥의 말대로, 비록 개인의 힘으로 조국의 독립을 가져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조선 땅을 강점한 일제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한민족의 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해방이 된 후라도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 살았던 민족의 배신자는 처형해 마땅하다. 일제 청산의 기치를 내걸었던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면 폭력을 써서라도 배신자를 응징해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 설정 덕분에 전지현은 저격수 용 장거리 소총을 들고 건물들과 용감히 뛰어넘고 지붕 위에서 질주하고 대로에서 기관단총으로 적군에게 총격을 날려야만 한다. 그 와중에 마치 실제 저격수 안윤옥인 듯 자연스러운 액션을 선보여야 했다. 어여쁜 얼굴과 가냘픈 몸매를 주 무기로 영화판에서 살아온 여배우에겐 무리한 요구였음이 분명하다. 전지현은 날렵하게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지 못했고 5 kg에 불과한 기관단총 하나를 제대로 못 들어 쩔쩔매고 있었다. 180억 원짜리 액션물에는 어울리지 않는 배우였던 것 같다. 그에 비해 하정우와 이정재와 조진웅은 관록과 적절한 체력이 뒷받침되어서인지 액션을 잘 소화해냈다.
<베테랑>에서 돋보였던 액션은 단연 영화의 마지막에 벌였던 유아인과 황정민의 길거리 싸움이었다. 나름 한국 액션영화의 계보를 잇는 감독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류승완은 이번에는 어떤 장면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그간 건물 내벽에서 뛰어내리며 총을 쏘거나, 신축건물 공사장을 배경으로 하는 패싸움이나, 주인공 혼자 큰 연회장을 휘저으며 다수와 벌이는 싸움 장면들을 선보였는데 이번에는 한 때 은막을 장식했던 장동휘와 박노식의 맞대결을 재현하는 듯 했다.
번화가 한 가운데서 좌판과 행인들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정통 격투기를 배운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과 막 싸움에 능한 서도철(황정민)의 혈투는 볼만한 것이었다. 특히 유아인은 이 장면 하나를 위해 오랜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 최선을 다한 티가 역력했다. 외국 영화를 보면 스턴트맨 없이 배우가 직접 한 위험한 연기가 보도되는 일이 있는데 유아인의 경우 나름 멋지게 자기 역을 맡아했다. 결투 장면 외에도 마약과 시 건방에 도취돼 때론 잔인하게, 때론 변태처럼 악한 모습을 선보인 것도 배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일조했다. <암살>의 전지현이 (자기 몸을 아껴서인지는 몰라도) 제 몫을 다 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유아인은 독하게 자신의 배역을 밀어붙였다. 어차피 액션에 승부를 걸양이면 배우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암살>과 <베테랑>에서 시원한 액션을 기대하는 것은 기본이고 두 편의 영화는 이에 잘 부응해 제법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는가, 그래서 상당한 설득력을 관객에게 주는가 하는 문제도 꼭 짚어보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 산하에 특수 부대가 있었고 이들은 암살이나 게릴라 활동 등 소규모 전쟁에 전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동휘 장군이 바로 이 특수부대를 이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에겐 중요시설 폭파나 요인 살해의 임무가 주어지고, 적절한 인물들을 선택해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암살>에서는 마치 <미션임파서블>의 시작처럼 인물을 선택하고 그렇게 뽑힌 인물들을 경성京城으로 보내고 그들의 애환까지 다루었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이야기의 개연성이 살아있다. 하지만 현상금 추적자(하정우)가 등장하면서 암살단의 진지함이 그만 삭아들었다. 그 이름도 어울리지 않게 ‘하와이 피스톨’! 게다가 안윤옥의 쌍둥이 자매 설정도 가벼웠고 특히 강인국(이경영)이 자기 딸을 가차 없이 죽이고 마는 데서 영화가 밑으로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두 시간 조금 넘는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느라 집중하기 힘들었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양질의 이야기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영화의 밀도는 옅어지기 마련이다.
<암살>에 비해 <베테랑>은 이야기가 있는 편이었다. 유아인이 등장하면서 주제의식이 살아나고 결국 감독이 이 사회에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사실 수치심을 모르는 재벌가의 행태가 그간 얼마나 많이 언론을 탔는가 말이다. 막돼먹은 재벌 2세, 3세들의 기행에 대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채 스무 살밖에 안된 어린 청년들이 유흥가를 들락거리고, 사건이 생기자 이를 해결하겠다며 조폭처럼 주먹을 휘두른 경우부터 땅콩봉지를 안 뜯었다면서 멀쩡히 활주로를 잘 향하면 비행기를 회항시킨 경우도 있다. 그러니 <베테랑>의 조태오를 보면서 재벌들을 향한 적개심이 생겼다 한들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그 다음은 액션이 처리해주는 바람에 진지한 사회 비판은 실종되고 만다.
<암살>에서 인상 깊었던 곳은 오히려 배신자 반민특위에 나와 배신자 염석진 역을 맡은 이정재가 자신을 항변하는 장면이었다. 악인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몸에 난 상처를 설명하는 데서 이정재가 미남 배우라는 꼬리표를 더 이상 붙이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좋은 연기였다. 그에 비해 <베테랑>의 유해진은 적당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그가 이제까지 쌓아왔던 최고의 장점인 코믹한 연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니 왠지 인물설정이 싱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아쉬웠다. 그리고 오달수, 유해진, 천호진, 조진웅, 마동석, 정웅인, 김응수, 진경.... 도대체 우리나라 영화에서 조연 배우 층이 왜 이렇게 제한되어 있을까? 배우들의 숫자와 폭을 반드시 넓혀야 우리나라 영화계의 앞날이 밝을 것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