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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향] 1987년 6월 항쟁의 재현과 수용- 장준환의 <1987>

광장의 승리 속에 놓인 영화 <1987>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영화 <1987>은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그간 쌓인 사건의 진상에 대한 레퍼런스들을 적절히 참고하여, 흥행요소에 대한 압박으로 실제 사건을 회피하거나 어설프게 본질을 흐리지 않는다. 비교적 단순한 플롯에도 불구하고 서사적 진행과정에 변화를 줌으로써 구조를 리드미컬하게 쌓아간다. 쇼트의 연결과 편집 구성에 있어 영화적인 장치들을 사용하면서 최근의 한국영화들이 서사의 대중적 공명에만 치중하느라 도외시했던 영화적 미학들에 고심을 기울인 티가 역력하다. 주연과 조연을 아우르는 엄청난 배우진들의 앙상블도 부족함이 없다. 대형 상업 영화라는 태생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다. 서사적 밀도와 긴장감, 영화적 재미를 모두 잡아낸 것은 전적으로 장준환 감독의 디렉팅 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로 장르적 호명이 가능하다. 기본적으로는 사회문제 영화(Social Problem Film)이며,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그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정치 서스펜스적 요소가 강하다. 인물들의 정서적 태도가 서사 향배의 중요한 줄기가 된다는 점에서 드라마 장르로도 가능하다. 부정적인 면이 강조된 우두머리와 그 우두머리를 따르는 부하들의 복종과 배신이라는 태도가 느와르 영화를 연상시키며,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가족 멜로 드라마의 성격을 보여준다. 

한편, 이 영화의 기획과 개봉 시기가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있어 미묘하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잘 알려져있듯이 이 영화는 박근혜 정권 말기에 기획되어 2017년 중반쯤 촬영이 완료되었다. 역사를 다룬 작품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난관은 해석의 문제, 즉 헤이든 화이트가 설명한 ‘메타히스토리로서의 담론(Discourse as Metahistory)’이 가진 서술의 어려움이다. 이는 역사를 서사화할 때 필수적으로 선택과 해석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멀지 않은 과거의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여전히 계속되는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입장의 낙차에서 오는 진앙이 작품에 그늘을 드리우게 만든다. 

박근혜 정권 하에 만들어지고 개봉되었더라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저항과 행동에 관한 프로파간다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2016년 말의 촛불시위가 유의미한 성과를 이룬 2017년 말에 개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 반대급부의 효과가 더 강력하게 추동된다. 요컨대 광장을 통해 이룬 민주주의라는 성과에 자리하고 있는 지금-여기에 이 영화는 승리의 전유로서 강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지점이 내적으로 유의미한 지점들과 더불어 외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의 해석과 수용의 태도에 있어 재고의 여지를 준다.

다중인물 서사와 영화적 기법의 공명

  
 
영화 <1987>은 한 두 명의 주동인물이 반동인물과의 갈등 위주로 서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인물들에게 주역의 무게감이 배분되어 있다. 구조적으로 그 인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거나, 각자가 다 다른 목소리를 지니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바흐찐식의 '다성성(Polyphony)'으로 볼 여지는 적다. 오히려 발단에서 결론으로 가는 플롯의 방향은 일관적이며, 한 인물이 서사의 축을 담당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한 후, 다음 인물에게 서사의 키 포인트를 넘겨주는 방식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서사적 구조가 확대되며 단단해지고 다층적인 상황이 된다는 점에서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처럼 구성된다. 고문 경찰들이 작은 실수로 처리해버리려고 했던 일들이 점점 더 알려지고 여러 인물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되면서 사건 자체가 거대한 역사적 문제로 증폭되어버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맞물리는 이러한 특징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다. 주로 매치 디졸브(Match Dissolve)를 통해 시각적으로 연속성을 강조하고, 스틸샷의 화면 위에 합성(Superimposition)을 통해 자막으로 인물의 이름과 직업이나 이력을 직접 영화에 새겨 넣어 인물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가령, 영화의 서두에서 박처장(김윤석)과 안기부장 장세동(문성근)이 기생집에서 주고 받는 술잔에서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인 최검사(하정우) 손에 들고 있는 술잔으로 연결되면서 인물을 등장시키고 자막에 최검사에 대한 설명을 넣는 방식이다. 

인물이나 사건에 집중하는 또 다른 영화적 방식으로 급속한 줌인(Zoom-in)이 있다. 영화의 초반부에 최검사에게 화장동의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압박하는 선배 검사를 포커싱할 때나 중앙일보의 첫 보도 이후 상부로부터 압력 전화를 받느라 쩔쩔매는 치안본부장(우현)의 등장 장면 등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인물이 갈등하거나 의미심장한 장면들에서는 핸드헬드(handheld)가 빈번하게 사용되어 화면의 흔들림으로 긴장감이 극도로 강조된다. 

이러한 영화적 기법들의 사용은 편집점이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최근의 영화들에 비해 두드러지게 눈에 띤다. 이외에 1.85:1의 화면비율이나 색감, 조명 등의 사용에서도 80년대의 공기와 분위기를 전달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이렇게 인물들이 연쇄적으로 등장하는 서사적 구성은 일차적으로는 ‘87년 6월 항쟁’을 한 두 명의 영웅이 아닌 다수의 보편적인 시민 주체로 놓고 싶은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구성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혹은 진실의 드러남이 얼마나 어렵고도 미세한 행위들의 결합으로 이뤄지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즉,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이 도미노의 연쇄에 제동을 걸었더라면 밝혀지지 못했을 일이라는 뜻은 주체적 개개인의 영웅적 행위들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일 뿐인 평범한 시민들에게 굉장한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윤리적 결단성이라는 무거운 짐을 이 인물들에게 지게 하는 대신, 각각의 자리와 직업윤리에서 최소한의 도의에 충실한 삶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검사가 법대로 하자고 부검동의서를 거부하고, 의사들이 직업윤리로 사인을 조작할 수 없다고 결정하며, 기자들이 ‘팩트’에 집요하게 매달릴 때, 대학생들이 비정상성의 사회질서에 의문을 가질 때, 종교인들이 한 생명의 죽음을 덮으려는 불의를 보고 자신들의 종교 속에 숨지 않았을 때 점묘법으로 완성된 모자이크화처럼 시민사회의 개별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세대론적 문제 의식으로서의 심판과 전승

  
 
영화 <1987>의 갈등 양상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밝히려는 여러 인물들과 이를 은폐하려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을 비롯한 휘하의 경찰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 있는 ‘청와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처장은 월남민 출신으로 이념적으로 극도의 반공주의적인 특성을 보이는데 그가 하는 악의 행위들이 ‘사유하지 않음에서 오는 무자각적 악(Banality of evil)’이거나 ‘위악’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의 행위라는 점에서 그의 부정성은 극대화된다. 

한교도관(유해진)을 남영동에 끌고와서 고문하는 장면에서 그의 내밀한 심리를 엿볼 수 있는 단초가 드러난다. 이 부분의 영화적 재현은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지는데, 취조하는 박처장과 포승줄을 한 채 얼굴에 천을 씌어진 채 앉은 한교도관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미디엄 쇼트로 시작해서 감정이 격해지면서 점점 클로즈업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쇼트로 표현된다. 박처장이 괴롭히듯 손전등으로 눈을 비추면 한교도관은 극심한 눈부심을 느끼고 그 속에서 마치 암전된 어둠 속에서 두 사람만이 있는 것처럼 시공간 감각이 진공된 상태로 표현된다. 이때 박처장은 월남하게 된 자신의 내력을 말하는데 그가 가족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음향과 플래시 커팅으로 과거의 장면이 삽입된다. 복수와 광기에 사로잡힌 박처장의 말과 이를 들으며 괴로워 하는 한교도관이 교차편집되면서 긴장을 극대화 시킨다. 번쩍이는 조명 속에서 클로즈업된 박처장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는데 이는 박처장이라는 악인이 결국 한반도 내의 이념문제의 또 다른 희생자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박처장은 의지적 악행으로나 세대론적으로나 87년 이후의 시민민주주의에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서사적으로 제거되어야할 존재이므로 이 영화에서는 그를 손쉽게 용서하고 온정주의로 끌고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대변하는-전두환으로 상징되는 억압적인 군부 정치를 종식시킬 뿐만 아니라 심판해야한다는 강력한 서사적 추동력이 영화의 후반부에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서사 구성상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김정남(설경구)을 잡기 위해 박처장 무리가 향림교회를 급습하는 장면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성당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발표를 하는 장면이 교차편집되는 부분이다. 

긴박한 음악과 경건한 성가가 배경에 깔리면서 긴장을 극대화하고, 김승훈 신부가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밝히면서 연루된 경찰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기 시작하면, 외화면에서 애국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과거로 플래시백 되면서 그날의 참상의 실체가 드러난다. 애국가 소리는 고문관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였고, 물 속에서 엄마를 부르다 죽는 박종철의 마지막 모습은 모핑기법(Morphing, 그래픽을 사용해 한 형체가 서서히 모양을 바꿔 다른 형체로 바뀌는 기법)을 사용하여 서서히 성당에 놓인 영정사진의 얼굴로 덧붙여진다. 기자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급박하게 뛰쳐나가고, 이러한 모든 사건들 위로 교회의 종이 마치 진실의 종인양 울린다. 

이때, 다시 향림교회가 교차 편집되는데 이 장면의 묘사는 매우 신학적인 해석을 추동하고 있기도 하다. 김정남은 교회 지붕에서 미끄러져 처마 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상태에 있다. 마치 계시처럼 십자가 첨탑이 빛나고 눈이 부셔서 이를 쳐다보는 그의 발 부분이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림자처럼 아른 거릴 때 박처장도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음향과 촬영으로 인해 위기는 극도로 고조된다. 김정남의 위치가 발각될 급박한 상황인데, 이때 갑자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가 밝게 빛난다. 마치 벤야민이 말한 메시야적 도래의 순간처럼, 빛의 번쩍임과 신의 현현이 박처장에게 심판의 날이 다가왔음을 선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1967년 1월 박종철이 사망한 시점에서 시작된 영화적 사건은 영화 말미에서 이한열 열사의 죽음과 그의 노제를 위해 모인 군중을 비추면서 끝이 난다. 박종철과 이한열은 87년 항쟁의 도화선이자 원동력으로서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처장 세대를 무너뜨리고 마중물이 된 이들과 같은 입장, 즉 대학생이라는 상황으로서의 연희의 존재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사건에 깊게 관여한 실존 인물들이 대부분 극화된 작품이고 그들이 거의 남성이어서 여성 주동 인물이 부족한 이 영화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시민사회를 이끌 주체로서의 미래지향적인 인물을 여성으로 처리한 점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현대사의 문제적 사건을 다룬 대형상업영화 중 동시기에 만들어진 <택시 운전사>가 결국 증언자로 살아남을 사람을 각성한 중년 남성으로 처리한 점에 비하면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날 같은 거 안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라며 저항의 무리에 서기를 거부하던 연희가 경찰들에 의해 봉고에 실려 신발을 잃어버린 장면, 그리고 그녀에게 이한열이 하얀 새 운동화를 주는 장면은 결국 ‘하얀 타이거 운동화 한 짝’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박제된 이한열의 유산이 그녀에게 전승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인 것이다. 

혁명이냐, 패배냐-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영화는 속칭 <땡전뉴스>라 불리던 전두환 대통령의 일과보고 뉴스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몰려든 군중을 내려다 보며 눈물 짓던 연희의 시선에서 끝난다. 흔히들 연희의 이 시선을 촛불시위에서의 우리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읽어낸다. 그러나 정당을 비롯한 제도 정치가 사회 운동의 요구를 수렴하지 못할 때 사회 운동이 거리를 중심으로 한 대중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거리의 정치’(김원, 『87년 6월 항쟁』, 책세상, 2009, p.11)의 도래는 87년의 공과가 여전히 밝혀져야 할 현재진행형임을 드러낸다. 

‘1987년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도 분단체제론의 계승적 발전과 시민들의 적극적 가담의 측면에서 비교적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평가들이 있는가 하면(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 체제』, 창비, 2017., 서중석, 『6월 항쟁』, 돌베개, 2011), 최장집은 87년 이후 민주주의가 심화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후퇴했다고 본다(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2). 김원 역시 형식적 민주주의와 직선제를 획득했지만 반드시 나아졌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보며, 중산층의 참여는 과대 포장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영화 <1987>이 빛나던 사건의 중요한 국면을 잘 서사해낸 것이 맞으나 이 영화를 단순히 영웅담이나 무용담으로 소비하는 수용 태도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87년이 이뤄낸 공과 중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성찰해야할 지점들을 도외시한 채 이를 또 다른 회고담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의 2-30대들에게는 87년 항쟁이 또 다른 감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제 시장>에 회한의 눈물을 보이는 전후 세대에 586세대가 냉소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 <1987>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앵글화하는 방식과 그 시대의 온기를 최대한 비슷하게 담아보려 한 점, 그리고 항쟁의 주역으로서의 허구의 인물을 손쉽게 극화하려 하지 않은 점 등에서 영화적인 완성도와 성취에 지지를 보내면서도 수용미학적 측면에 있어 이루지 못한 것과 다시 나아갈 것 사이의 긴밀한 성찰이 다시금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글 ·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 공저로 『영화광의 탄생』(2016), 『1990년대 문화 키워드 20』(2017).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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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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