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 예술의 말 걸기와 예술가의 내기
한 줌 빗물을 손으로 떠서 움킨다 한들 영구히 가두어 둘 수 있을 리 없다. 머잖아 손가락 사이로 스며나게 될 것이고, 자길 가두는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 본디의 모습을 되찾게 될 터이다. 설령 어떤 그릇에 담아 그 모습을 달리 변형시킨다 해도, 그것이 머금은 본성마저 제어하진 못할 테다. 말하자면 결코 형질의 전환에까진 미치지 못할 단순한 형태의 변화만을 가하게 될 따름인 것이다. 억지로나마 그 형태를 유지해내던 틀이 깨어진다거나 혹은 자신을 구속해두려는 힘의 한계영역을 마침내 뛰어넘고 돌파하게 되는 순간이면, 여지없이 본래모습대로 회귀하게 되고야 만다. 뿐만 아니다. 단단한 몸을 가지지 않기에 유약해 보인다 해도, 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치일만큼이나 가벼워보인대도, 겉으로 그 잠재력을 미루어 예단하는 건 다분히 섣부른 짐작에 불과하다. 혹 지난한 시간을 요청하게 될지언정 빗물은 끝끝내 포기치 않고 제 몸을 부대낌으로써, 언젠가 눈앞을 가로막은 섬돌을 패어 관통하고 완연한 자유를 누리는 데에까지 가닿는 끈덕진 면모를 곧이 현상해내기도 하는 까닭이다. 허나, 상술한 문장들은 기실은 예술의 잠재능력에 대한 간단한 공상을 조심성 없이 끄적거려 본 일에 불과하다-.
일견 예술은 무의미해 보일 수가 있다. 삽시간에 들끓었다 가라앉을 뿐인 감정의 찰나적이면서도 원시적인 발산과 유사한 것으로 취급된다든지, 당면한 세계의 현실에 별다른 변화의 여지를 안겨다주지 못할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특별히, 더 나은 방향으로 현실을 옮겨가는 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입장을 좇는다면 사실상 예술가의 실천이란 건 결국엔 좀체 무익한 것이란 결론을 얻게 되기가 십상이다. 최대한 유보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 할지라도, 가령 복잡하게 묶인 존재자들의 감정을 잠시잠간 풀어주는 데에 그치는, 이를테면 마약류의 진통제와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게 되어버린다고나 할까.
허나 정말로 예술은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며, 그 이외의 어떤 가능성도 갖지 못한 것인가? 물론, 가능성을 무엇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테다. 확실히 예술은 곧은 목을 단단히 추켜세우는 현실세계의 거창한 이데올로기들과는 성급하게 몸을 섞지 않는다. 달리 번역하자면, 현사실적인 삶의 무대에 작용하는 각양 힘들의 지배소들과 쉬이 연결접속하지 않는단 뜻이다. 그러니 예술가의 방엔 (정말로 그가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가란 이름을 부여받기에 합당하다면) 세속권력이 깃들거나 머무를 여지란 게 없다. (1)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예술이 현실 속에서 아무런 일도 해낼 수 없다는 문장과 동의어가 될 수는 없다. 예술이 머금은 가능성의 중심을 적실하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사실은 조금 다른 시야가 필요하다. (2) 그건 예술이 제 나름의 독특한 존재조건과 존재형식을 취하는 까닭이다. 쉽게 말하자면, 여하한 일상적 삶 영역에 속한 부분들과는 꽤나 구별되는 속성의 구성소와 인식소를 지닌 예술을 아무래도 한 결 같이 동일한 시선을 견지한 채 바라보고 이해하기란 좀 어렵단 뜻이다.
예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을 걸어옴으로써 세계 속에 제 존재를 현상해낸다. 일상성의 문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는 저만의 방식과 태도로, 세상에 대한 진지한 내기걸기를 감행한다. 더 나아가, 비록 발 딛고선 자리의 실제 현실이 꽤나 음습하다 할지라도, 예술은 결코 제 몸을 부대끼는 일을 쉬이 멈추지 않는다. 세계에 대해 머금은 진지한 대결의지를 끝까지 굽히지 않는 건 아무렴 모종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테다. 필시 예술의 이름으로만 성취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는 믿음, 그렇기에 설령 진액이 메마르고 땀방울이 기화하는 질고의 시간을 보낸다할지언정 끝내 포기치 않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시간의 세례를 통과한 극점에서 마침내 그 바라는 바의 종착점에 가닿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간곡한 믿음 말이다.
<장고 인 멜로디>은 간단없이 몰아치며 살점을 찢어대는 바람 앞에서도 제 영혼을 묵묵히 연주해낸 한 집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낸다. 텍스트는 아덴의 숲에서 자행된 잔학한 인종청소의 총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파리의 어느 예배당에서 울려퍼지는 전-지구적 진혼곡의 멜로디에 가닿기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적 여정을 마치 스케치하듯 그려낸다. 그 지난한 시간이 일구어낸 궤적 속에서 몸을 푼 낱낱 영화의 살점들은, 예술에게 혼을 저당 잡힌 어느 음악가가 세계 속에서 격렬히 몸부림치며 부딪어온 지독한 씨름과 고투의 흔적을 면면히 담아내는 데에 주력한다.
강박적 욕망에 가린 진실
파리는 함락 당한다. 이내, 붉은 하켄크로이츠가 도시를 온통 뒤덮는다. 자신들의 전능함을 선전하기 위함인지, 혹은 지배자의 관록과 여유를 드러내기 위함에선지, 나치 점령군은 주둔지 파리의 풍부한 문화예술자원을 향유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아니 꺼리기보단 차라리 완전히 그것에 매혹되었다고 술회하는 편이 보다 더 적절한 표현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조금 특이한 건 한 가지의 단서조항이 덧붙는다는 점이다. 그건 단순히 예외적 조건이라는 수사를 덧붙이기엔 너무나도 광범한 효력을 머금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파리의 모든 예술적 표현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규례를 어기어선 안 된단 뜻이랄까? 심지어 참조할 규례의 몸피는 점차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기묘하게도 기존에 상연되는 예술형식 그 자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말하자면 억압의 준거는 순전히 그네들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다소 역설적이게도 억압하고자 하는 대상을 되레 욕망하는 크기가 커져갈수록, 까다로운 규례는 그에 비례하여 증폭되었다. 무슨 까닭일까?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달리 있었기 때문이리라.
기악팀 핫클럽을 이끄는 장고 라인하르트는 피갈(파리 제9지구의 지명)을 무대 삼아 활동하는 천재적인 집시 연주자다. (3) 그에게 있어 음악이란 건 존재의 자유로움 그 자체일뿐더러, 더 나아간다면 삶의 자연스런 표현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를테면 동료들이 그의 소재를 급박하게 찾아 헤매는 공연직전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강변에서 천연덕스레 낚시에 매진하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의 다른 번역어가 곧 음악인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는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즐긴다. 기실은 그건 그에게 있어 어느 누구도 다른 무엇도 꺼트릴 수 없는 일렁이는 생명의 불꽃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사실 장고에겐 그게 전부다. 환언하자면, 그 이외엔 다른 무엇에도 그다지 별다른 관심과 반응을 보이지 않는단 말이 좀 더 옳을 테다. 한편으론 공연이 아내와 노모의 생계를 책임져줄 수단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는 자기 몫으로 정산된 금액이 얼만지 헤아려지고 있는 동안조차 전연 관심이 없다. 그런 종류의 일들이란 건 언제나 하품만 일으키는 지리한 문제들일 뿐이다.
▲ 공연 시간에 늦었음에도 낚시에 한참 젖어있는 중인 장고 |
▲ 공연비 정산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장고의 모습 |
심지어 장고는 자신의 연주를 독일인이 듣건 프랑스인이 듣건 전혀 괘념치 않는다. 그저 다만 연주할 따름이다. 그건 장고에겐 자기존재를 세계 속에 밝히 현상해내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까닭이었다. 들숨과 날숨이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증언하는 징표가 되는 만큼이나, 음악은 그의 존재를 선연하게 지탱해내는 근본동력과도 같았다. 강조하자면, 연주한다는 건 단지 살아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다. 살아있음의 감각을 다른 누구에게 허락 맡는다거나 보고할 필요 따윈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누구라 한들 말이다. 그런 까닭에선지 그가 연주를 할 때면 시공간은 임의로 조작되지 않은 자연스런 존재감으로 충만해진다. 그의 연주 속엔 꾸밈없이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 거는 자유로움이 공기처럼 녹아있는 까닭이다. 그것과 접속한 이들은 자연스레 격정적인 존재표현의 소용돌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위상공간 속으로 아울러 견인된다. 영화의 살점은 이점을 놓치지 않고 여실히 포착해낸다.
▲ 영혼의 자유로움에 흠뻑 젖어든 장고의 모습 |
▲ 자기표현의 순간에 온전히 사로잡힌 장고 |
그런 장고의 음악에 점차적으로 더한 제약을 가해온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그건 단순히 연주의 기법이라든지 방법적 기교에 대한 제약만은 아닐 터이다. 그가 겪는 갑갑함이란 기술적 측면의 문제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고통의 감각, 이를테면 그의 목을 거머쥐고 졸라매는 것에서부터 온다고 본다면 혹 옳을 테다. “검둥이 음악”은 안 된다. 물론 “스윙”도 불가능하며, “춤”은 당연히 금지되고, “더블베이스 주자”는 매 곡이 끝날 때면 정중히 허리를 조아려 청중에 인사를 건네어야만 한다. ‘그런 음악’을 연주하면서까지 독일 순회공연을 해달라는 요구 앞에서 장고의 팀은 한바탕 박장대소를 터트릴 따름이다. 좀 더 정확히 진술한다면, 아마도 상술한 바로 앞의 문장에서 강조점은 자연스레 문두에 찍히게 될 터이다. 언제 어디에서 또 그 누구 앞에서 숨을 쉰다고 한들 호흡의 본래적인 의미가 바뀌진 일 따윈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랄까. 허나, 반면 ‘그런 음악’을 해달라는 요구란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만큼이나 까다로운 것이다. 이를테면 그건 두 다리를 밧줄로 칭칭 동여매고 육상경기를 해달란 바람과도 꼭 같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장고에게 그런 음악 같은 건 실재할 수조차 없었고, 그런 음악의 실존을 상상한단 것 역시도 좀처럼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장고는 ‘흥미롭다’며 제안서를 접어 과감하게 입을 닦는다. 여기에서 흥미로움이란 건 암만해도 불가능한 판타지에 대한 갈망이 기발하고 가상하다는 조롱, 그 이상의 이하의 의미도 없다고 할 테다. 그들의 요구를 수락하란 건 비단 자신의 음악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그가 믿는바 삶의 의미라든지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능력에 대한 부정(negation)을 뜻하기도 했다. 기어코 받아들일 수 없는 유의 폭력이었다고나 할까-.
▲ 독일군의 지시사항이 담긴 서류로 과감히 입을 닦는 장고 |
그럼에도 만일 장고의 숨통을 옭아매려 한 전체주의자들의 입장을 구태여 이해해보고자 노력한다면, 어쩜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일찍이 춤을 금지한다고 써 붙여둔 경고팻말이, 일찍이 공연장을 압도하는 영혼의 자유로운 울림 앞에서 전연 무효한 것으로 드러나고야 마는 것을 보았다. 철저한, 그 어떤 이물질도 전연 허용할 수 없는 것이어야만 했던, 모든 걸 정연하게 갈무리해 들이고야 말겠노라는 전체주의 정신의 탁월한 미학이, 마침내 그 울림에 어울려 공명하는 순간 여지없이 무장해제 돼버리고야 마는 걸, 무질서를 향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걸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술은 단단하게 굳어버린 파시즘의 냉엄한 질서에 균열을 가했으며, 그들이 자랑했던 전체성의 달달한 환상을 단박에 녹여버렸다. 하지만 장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매력에 스며들도록 스스로를 잡아끄는 욕망의 은밀한 발현과 발산을, 이제 그만 거두어들이고 봉합해버릴 수는 없었다. 안에서부터의 격한 저항을 견뎌내기란 정말 만만찮은 일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의 견고한 (적어도 그러하다 믿는) 신념이 그 이상으로 온수 속의 비누마냥 느슨하게 풀어지는 걸 마냥 두고 보고 허용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기중 어느 한 편이 관념적인 규제의 문법을 따른다면, 다른 한 쪽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꿈틀대는 욕망의 현상학을 따른 것이었다. 가지런히 수합되지 않는 두 종류의 에너지는 팽팽한 긴장을 일으키면서 길항하고 불화했다. 끝내 어느 하나 고개를 조아리고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그렇기에 내밀성의 불가항력적인 요구에 순응하여 결국엔 그를 독일로 초청한다면서도, 동시에 갖은 종류의 규례를 조건으로 내걸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아무렴 최소한의 자기보존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면 옳을 게다. 설령 정 반대편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더라도, 차마 부여잡은 손만은 놓칠 수 없는 모습이었노라고 진술한다면 아마도 옳은 설명이 될 터이다.
그러나 장고는 자신의 음악을 부인하는, 달리 번역하자면 자신의 영혼의 자유로움이며 자연스러운 존재표현을 부정하는 일을 결코 감행할 수 없었다. 거절에 대해 되돌아오는 반응이란 건 시나브로 선명해져만 가는 폭력의 노골성이었지만 말이다.
단순한 부대낌이 아니다
장고의 가족은 루이즈로부터 (이후 저항군 소속 요원 나이팅게일로 밝혀지는) 진지한 경고를 듣는다. 그리고 결국엔 그녀의 도움을 받아들여 스위스와의 국경지대로 피신한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 역시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미 도화선에 들러붙은 불씨가 뇌관을 타고선, 만연한 폭력의 광기를 그 땅을 향하여 빠르게 연장시켜 왔던 까닭이다. 머잖아 군홧발에 머물던 집을 빼앗긴 장고는 친지들이 거주하는 인근의 집시촌락으로 몸을 옮겨 심게 된다. 허나 먹이를 서서히 압박하는 뱀 마냥 점차적으로 숨통을 조여 오는 힘의 실체가 점차로 선명해질수록, 대처할 마뜩한 방법을 구상하기 어렵다는 진실에 가까이 맞닥뜨리게 된다. 그건 비단 자신에게만 가해지는 잠시잠간의 압력이 아니었으며, 사실상 집시일반을 겨냥한 것, 좀 더 정확하게는 인종의 청소와 정화라는 기만적이고 자기도취적인 명목으로 자행되는 광범한 폭력이라고 진단하는 편이 한결 더 옳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어째서 나치는 집시들을 마치 벌레를 다루듯 박멸해야 한단 기획을 세워야만 했던 것일까. 그들에게 집시민족이 일종의 하위 인종으로 다루어져야만 할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잠시잠간 정신분석가가 되어보길 자처하는 수고를 무릅쓴다면,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을 조심스레 내어놓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무엇보다도, 파시즘에 경도된 이들은 집시들의 삶과 존재형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은/못한 채 어디로든 자유로이 유랑하고, 또 저들만의 폐쇄적인 군락을 이루고서 생활하며, 음악과 춤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는 그들의 부정확하고 정돈되지 않은 생의 모습과 태도는, 정합적인 삶 양식과 정치하게 잘 조율된 가치관, 그리고 철저히 단일화된 정신의 지평구조를 강령으로 내세우는 (적어도 따르는 편이 이상적이라고 믿는) 전체주의자들에겐 좀처럼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 집시들의 생활이 담아내는 불가해한 국면들은 곧바로 비정상성으로 번역되었다. 유랑자는 부랑자로, 무리지어 끈끈하게 살아가는 삶은 장애요소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근친교배적인 모습으로 읽히어졌던 것이다. (4) 그들은 저열한 존재들이, 따라서 인류의 종적 발전을 위해선 정리되어야만 할 존재들이 자신들의 숭고한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켄크로이츠를 바라보는 것조차도 역겹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혐오정서와 꽤나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을 조금 앞에서도 한 번 살펴보지 않았던가? (5)
▲ 의사는 장고의 손을 근친교배의 전형적 흔적이라며 진단 |
▲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를 바라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음 |
한 꺼풀을 들추어낸다면, 그건 사실 장고에게 가해졌던 요구와 일정부분 맥을 같이 한다고 진단한들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장고의 예술을 흠모하면서도 동시에 지독스레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모순적 태도와, 적어도 전혀 별개의 문제는 아니란 뜻이다. 한 발 앞서 장고를 대하는 이 복잡 미묘한 태도를 서로 모순되는 두 양가적 욕망의 길항과 경합이란 차원에서 간단히 살핀 바 있다. 허나 좀 더 정확하게는, 그건 사실 집단적 강박증이란 병리현상으로 능히 설명해낼 수 있을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어째서 강박신경증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전체주의자들의 내면에서 치열하게 격돌하는 이 두 갈래의 욕망이란 건 사실은 적어도 같은 층위에 놓여서는 결코 안 될 것, 본디 동일한 존재지위를 부여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되어야만 했던 까닭이다. 이를테면 파시즘 신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제1원칙, 곧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 동력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을 지탱해내는 작인이란 건 의심의 여지없이 이데올로기라는 지배소가 되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내면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이 들끓는 개별적 자유에의 욕망이 바깥으로 도드라지게 스며나고 현상되는 일이란 건 기실은 있어선 안 되었다. 자칫하면 그 여파로 인해 그들이 믿는 전일성에의 이상이 실체 없는 허망함으로 드러나게 될 소지 역시 다분했기에, 어떻게든 틀어막지 않고선 아니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고를 최대한 위협하는 방식을 우회하면서까지 절제된 형태의 음악을 강요하였던 셈이다. 사실상 실패에 대한 짙은 두렴이 그 기저동인이었단 뜻이다.
집시민족을 바라보며 그들이 느꼈던 당혹스러움의 감각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기실은 동근원적인 문제란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한 개인에게서 느끼는 반사적인 경계와 두려움보단, 소위 눈엣 가시 같은 집단이 야기하는 불안정감과 불쾌의 감각이란 차마 그 크기와 강도를 비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하여 부정감정은 이내 들끓는 강렬한 혐오정서로 제 모습을 전화해내고야 만다. 그리곤 언젠가 토해내고 밭아낼 때가 도래하길 기다리며 켜켜이 응축되어갔노라고 본다면 옳을 테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집시들을 볼 때면 자신들 안에도 어느덧 자유에의 바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을 게다. 이처럼, 억지로 꽉 눌러둔 진실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첫 번째 난관이었을 테다. 그리곤 혹여나 그것이 일제히 수면 위로 밝히 드러나게 됨으로써, 어쩌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던 파시즘제국의 견고함에 균열과 틈새의 여지들이 기입되는 상황이 벌어질까 다분히 두려워했을 터였다. 물론, 억압된 것의 귀환을 효과적으로 다루어낼 장치를 고안하는 방법을 달리 택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6) 그러나 나치는 까다로운 일에 정력을 소모하는 대신, 집시들을 제거하는 좀 더 손쉽고 간단한 편을 택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위해선 상황적 진실 위에 잘 도포된 허위의 장막이 필요했다. 그건 그네들 집시들이 꽤나 불온한 민족일뿐더러, 몇 세대를 걸친 근친교배로 인해 정상인류에 비하여 장애와 퇴행을 만연하게 겪고 있다는 딱지를 붙임으로써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되었다. 두렴과 불안 위에 얄팍하게 칠해진 합리화기제는 확실히 파시스트들에게 합법적인 분노를 배설할 당위를 허용해주었다. 한 발 더 나아가선, 혹 인류역사의 발전에 걸림이 되는 잠재 악을 멸절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공헌한다는 도취감마저 허락해주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선한 얼굴에 내속된 지극히 어두운 그림자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장고에게 있어서 자유란 숨쉬기마냥 자연스런 존재표현이었다. 더불어 그것은 오로지 창조적인 영혼의 역동적 발휘라고 할 수 있을 개성적인 음악을 통해서만, 비로소 세계 속으로 투여되고 현상될 수 있음직한 것이었다. 전체주의는 규제의 끌과 못을 곳곳에 들이댐으로써 이 충만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분절시키려 했으나, 장고는 차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상 자기를 찢어놓는 일과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허나 영화텍스트 속엔 한편으론 장고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유를 인식하는 이들 역시 존재했다. 그들에게 있어 자유란 건 극히 자연스런 존재자의 존재표현이라기보다는, 사실 이미 잃은 것으로, 빼앗긴 것으로, 그러니까 싸워서 쟁취해내야만 할 것으로 간주되고 표상되었다. 환언하면, 외침에 의해 파괴되었고 또 상실케 된 것인 까닭에 필히 찾아와야만 할 목적인으로 여겨졌단 뜻이다.
장고에게든 저항군에게든 자유란 공히 중요한 것이었다. 다만, 그건 기중 어느 한편에겐 설령 누구라도 앗아갈 수 없을 만치 고유한 것 곧 순전히 내게 귀속된 것이기에, 어떻게든 지켜내어야만 할 것으로 해석된단 점이 다를 뿐이었다. 다른 한쪽에겐 혹 무슨 수를 쓰고서라도 수복해내어야만 할 것으로 선언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한다면 말이다. 핵심적인 차이는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고 할 터였다. 자유가 소중하다는 기본적 테제란 건 누구에게든 동일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봄직도 하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제한하겠다는 행동 따위가 어떻게든 정당화 될 수 있을까? 특별히 그이가 자기보다도 ‘더 작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렴 부정할 수가 없는 경우라면 말이다. 설령 정의롭고 선한 일임을 전면에 내세운다고 한들, 그것은 과연 어느 누구를 위한 선이며 또 정의란 말인가?
의심이 여지없이 저항세력은 장고를 이용했다. 심지어 독일군 장교의 정부(클레르크 여사)로 숨어든 저항군의 이중첩자 나이팅게일마저도, 그를 자신들의 작전을 도모하기 위한 도구로 부리는 데에 큰 거리낌을 갖지 않는다. 그가 음악을 연주하며 독일군의 혼을 사로잡는 동안, 슬며시 도강하여 독일군의 기차를 불태우는 작전에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도록 말이다. 루이즈는 장고에게서 음악이 가진바 의미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에도 구속받길 거부하는 그의 자유가 기어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도록 종용한다. 사랑을 (적어도 한때나마) 나누었던 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제가 원하는 일의 성취를 위하여 복무하는 사역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는 건, 꽤나 잔혹한 폭력 아니겠는가?
▲ 루이즈/나이팅게일이 장고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종용함 |
그녀는 장고의 음악을 (정확하겐 그의 존재를) 농락했다. 레지스탕스는 확실히 파시스트 진영에 비해서야 물리적 규모가 작았지만, 그들이 저질렀던 폭력의 의도와 색깔이란 건 실상 그 크기에 상관없이 너무나도 선명하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좀 작은 크기 탓에 전체주의마냥 (개별자들이 딛고선 현사실적 실존의 무대를 오롯이 제 손에 쥐고서 뒤흔드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소로까지 확장되기에는 좀 부실했지만, 적어도 그네들의 당파성이 타자들을 자기세계를 존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체스판 위의 말들로 포섭하여 물화시키려는 동일시의 원리를 동일하게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전연 다르지 않았단 뜻이다.
폐허와 폐허의 틈을 비집고
장고의 음악에 도취된 사이에 나치군은 중요 시설과 물자를 파괴당하고 꽤나 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나 결국 루이즈 역시 사로잡힌다. 저항군의 행적 역시 꼬리를 밟혀 발각되고야 만 꼴이다. 결과적으론 이편도 저편도 피해를 감내하게 된 형국이라고 보면 옳을 터이다. 어쩌면 조금 더 거칠게 말해볼 수도 있을 테다. 장고의 자유를 그의 예술을 볼모로 혹은 도구로 삼아 어떤 형태로든 유익을 취하려 했던 이들이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된 예측 가능한 실패라고 말이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것을 억누르려고 한, 차마 정식화할 수 없는 비정형성을 임의로 구획된 가름막 속으로 무리하게 밀어 넣으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매달린 결과가 낳은 필연적 패착이라고 뇌까린다면, 혹 너무나 무리한 해설일까?
반면 장고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분노한 나치의 공습에 의해 불타는 집시마을의 동료들은 그의 이름과 안전을 목 놓아 외침으로써 멀찍이 도피하는 이의 등 뒤를 원호한다. 더 오르기 까다로운 접경지대의 가파른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만삭의 아내와 늙은 어미는 부디 그만은 살아남아야 할 것임을 당부하며, 저들을 두고서 계속 길을 떠나길 재촉한다.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서 마침내 마지막 숲을 돌파하는 와중에선, 훈련된 군견들을 따돌리고자 결국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기타를 부수는 일을 감내하기까지 한다. 파리 한 가운데 포탄이 떨어질 것을 알리는 공습경보 중에서도, 생명이 풍촉의 처지에 내몰린 그 가운데서도 차마 버려둘 순 없었던 기타가 그 자신의 손에 의해 깨어지는 장면은 서글픈 모습으로 그려진다. 신체의 일부를 뜯어낸 것만 같은 아픔에선지, 혹은 예우를 다해 애도의 시간을 갖기 위함에선지, 카메라의 눈은 정지화면마냥 박제된 침묵과 고요만을 잠시잠깐 그윽하게 내려다볼 따름이다. 이윽고 장고는 스위스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떼어놓는다. 과연 이렇게까지 하면서 구태여 살아내어야만 할 혹은 그를 반드시 살려내었어야만 할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 잠시잠간 침묵과 고요로 기타를 애도하는 순간의 장고 |
마침내 예술의 이름으로
영화의 말미는 장고가 성당에서 지휘를 잡는 장면으로 갈무리된다. 슬며시 내리감은 눈가엔 그의 삶에 묻어난, 그리고 동료 집시들의 생에 새겨진 서글픈 흔적들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화의 눈이 부러 가로로 넓다한 시야를 동원한 이유 역시 즈음하여 도드라진다. 쉽사리 감당해내기 어려운 눈꺼풀의 묵직함이라는 게, 다만 한 개인의 고조된 감정의 무게를 전달하는데 복무하기보단, 마치 그의 등 뒤로 흐릿하게 번진 인물들처럼, 초점 없이 역사의 폭력 앞에서 사그라져버린 허다한 존재자들의 무게만큼을 지탱해내고 있음을 어떻게든 드러내기 위함일 테다. (7) 구태여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진혼곡”이라는 해설이 덧붙여지지 않더라도, 그의 음악이 민족적인 상처를 위무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장엄하게 흐르는 그의 음악이 공동체적인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 건 그리 까다로운 일이 아니란 뜻이다. 만일 좀 더 과격하게 밀어붙이는 게 혹 허락된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랬었노라고 말하는 편이 한결 온당한 판단에 해당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 집시 형제들을 위한 진혼곡을 지휘하는 장고의 무겁게 내리 앉은 눈가 |
유달리 천부적인 재능과 소양 그리고 그에 걸맞은 좀 괴이한 기질이 깃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제외한다면, 사실 장고와 다른 집시들 사이를 구분하는 차이점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의 수월한 자질은 저와 주변인들을 가름하기 위한 변별자질이 아니었다. 누차 언급했듯, 그건 장고에게 있어 제 영혼의 자유로움을 드러내는 존재표현 내지는 독특한 자기현상의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고는 분명 특별하지만, 그럼에도 여느 집시들과 다름없었다고 할 테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의 자유로움,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자연스런 계기로서의 음악과 춤에 대한 갈망은 이를테면 집시민족의 공통형질과도 같은 것이란 해설이다. 사실 예술은 집시들에겐 따로 에너지를 들일만한 어떤 활동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그들다움 그 자체에 대한 세련된 번역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환언하자면 예술은 무엇에도 결박되길 거부하는 저들의 자유로운 존재형식을 그때그때의 즉흥적 문법에 맞게 보여줄 수 있는 이른바 잠정적인 존재껍질과도 같았다. (8) 또는 대개의 경우 말과 글을 배우지 못했던 그들에게 있어 충분하고 자족적인 언어였노라고 보면 옳을 터이다. (9) 파리의 유흥가에서 국경지대로 실존의 무대가 바뀐다고 한들, 집시들 옆엔 늘 음악이 있었다. 재회의 기쁨이라든지 삶의 찬미를 기념할 때엔 물론이거니와, 슬픔과 불안을 표현하는 것도,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는 것 역시도 또한 음악이었다. 화석화된 화성이나 음계들을 뒤좇는 게 아니라 차마 그 꿈틀거림의 궤적을 하나로 가지런히 정향해낼 수 없기에, 도리어 무한한 생성력을 머금게 돼버린 그런 종류의 음악 말이다. 무한성으로 나아가는 길은, (적어도 가능조건의 차원에선) 장고의 것만 아니라, 집시들 모두가 공명하는 일반의 조건이었다. (10)
장고는 해방된 파리의 어느 성당에 서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스스로 집시란 고유명사가 됨으로써 음악을 지휘해낸다. 이로써 물리적인 또 인식론적인 폭력과 강제를 통해서도 끝끝내 온전히 매개해낼 수 없었던 나-공동성의 존재형식이 예술의 이름으로 자기를 현상해낼 수 있게 된다. (11) 정교함을 표방하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도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여기에서 예술의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다. 장고가 공동존재의 이름으로 일구어내고 있는 존재표현은 성당의 외벽을 넘어서 파리 시내를 향하여 은은히 울려나간다. 그리고 그 울림에 가닿는 이들의 영혼을 제 안으로 미끄러지듯 함입시키며 그들을 아울러 연대의 무대 속으로 참여해 들인다. 이는 예술의 논리가 결코 관념의 질서에 오롯이 귀속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혹 형이상의 관념에 구류되었더라면, 낱낱 존재자들이 머금은 특수성과 어떤 공동적인 보편성의 요구를 동시에 모순 없이 만족하는 일이란 건, 끝내는 모순과 불가능의 자리를 향해 경사하고야 말았을 테니까 말이다. 예술의 논리는 체험의 논리다. 혹은 체험을 통해서 형성되고 각인되는 논리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테다. 그렇기에 추체험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모두를 공동경험의 위상공간 속으로 견인해 들일 수 있다. 혹, 무한한 느낌의 공동체란 말은 어떨까? 좀 과장한다면 그건 전-지구적 연대와 화합의 대안적인 가능조건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2)
혹자는 예술이 담보하는 대안적 구원의 가능성에 대하여, 찰나의 경험에 눌러 붙인 과도한 의미부여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사변의 변죽만을 울릴 이데올로기적 진술과는 달리, 감각과 인식을 동시에 파고드는 예술의 힘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자들의 내부에 깊은 흔적을 남김으로써, 계속해서 그 경험이 기억되고 현실화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추동하는 끈덕짐의 자세를 취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그날 그 자리에서 연주된 레퀴엠의 족적이, 수십 년도 더 전의 시공간을 그득 메웠던 충만이 감각이, 지난한 시간을 가로질러 영화라는 살점을 입고서 이렇게 눈앞에서 다시금 재생될 수 있다는 말인가? 꽤나 아득한 시간의 무게를 능히 견뎌내고서 말이다. 그건 시간의 세례가 켜켜이 쌓아놓은 무게감으로도 온전히 눌러버릴 수 없을 만한 무엇인가가 장고의 선율로부터 흘러나와, 이윽고 존재자들의 살갗을 타고 넘어, 마침내 깊은 곳 피하에 자리한 심부에까지 도달하였기 때문일 터이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머금은 돌파력의 잠재적인 동력이 된다. 사회과학교과서의 진술이나 정치적 테제 선언의 직접화법으론 가닿을 수 없었던 공동존재의 음성이, 지금여기의 무대 위로 귀환하도록 능히 이끌어낼 수 있음직한 그런 동력 말이다.
예술은 여전히 체험적 논리의 간접화법으로 끈덕지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듣는 이들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그 움직임은 그치지 않고서 계속될 게다. 설령 시간과 공간을 횡단하는 여정 속에서 역시 그 모양새는 달리 변주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전 인류가 모든 갈등과 모순의 조건을 내던지고 아울러 대안적인 구원을 향해 가닿기까지 지속되고 또 존속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고의 혼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우리네의 귓전을 향해 속삭여오고 있다. 과연, 그대는 함께 할 준비가 되었는가?
[주 – 글 읽기를 위한 참조]
(1) 피에르 부르디외의 확정적인 진단 이래로 예술이 결코 즉자적인 존재형식을 가진다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진 않는다는 사실이, 그리고 되레 장(field)적인 맥락 속에서 복잡하게 맞물려 움직인다는 인식이 한층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본문에선 제도와 시장 등속의 것들과 적극적으로 접속하는 자리로 나아가기에 앞서, 작자와 그 순수한 창작물이 머무는 일차적인 공간개념을 지시하기 위한 언어로 ‘방’이라는 표현이 (얼마간의 변명과 다분히 알리바이적인 용법의 구사를 혹 용납해준다면) 사용되었다. 일련의 장적 맥락 속에서 제 위치를 부여받기 전까지, 모든 예술은 최소한 제 골방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어떤 종류의 세속권력과도 관계하지 않는다.
(2) ‘가능성의 중심’이란 표현은 일본의 문예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빈번하게 사용하곤 하는 수사적 용법이다.
(3) 필자도 며칠 묵은 적 있는 피갈은 꽤 늦은 시각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파리의 대표적인 번화가/유흥가다. 그 유명한 몽마르트 언덕이 주변에 소재하고 있다.
(4) 미셸 푸코에 따른다면, 규율권력과 생명 정치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동시대적 권력의 테크놀로지 체계는 권력의 범위가 미치는 영역 속에서 일정한 규모(가령 평균적 능력을 가진 것으로 상정되는 집단개념으로서의 정상인구)와 그 질적 수준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내는 것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이에 방해요소로 작용한다거나 심지어 평균적 질을 저하시키는 존재들은 소위 ‘비정상인’으로 간주되어 그 생명마저 박탈당할(이는 이미 내속적인 것으로 권력의 테크놀로지 속에 포함되어 있던 고전적 ‘주권권력’의 발동으로 해설될 수가 있다)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전체주의적 제국주의(명목상으로 유럽을 통합하려는) 하에서 집시들이 청소의 대상이 된 것 역시, 어떻게 보면 이러한 사유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가 있을 터이다.
(5)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의 발동원리를 크게 두 작용의 결합으로 해설해낸다. 첫째는 완전함과 순수성 등 도저히 달성 불가능한 이념에 대한 기만적인 확신이며, 둘째는 타자로부터의 오염이다. 이를테면 타자에 의한 (혹은 외집단에 의한) 전염으로 인해 나의 (혹은 내집단의) 순전함이 파괴된다고 가정할 때, 혐오정서가 촉발된다는 해설이다. 아마도 바루흐 스피노자라면 이를 부족한 1차적 인식에 기인한 근거 없는 상상이라 간주할 테다. 여하튼 집시를 소멸시킴으로써 종적 발전을 일굴 수 있다는 건 혐오정서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6) 억압된 것의 귀환이란 오늘날 크게 두어 가지 맥락에서 사용된다. 물론 첫 번째는 신경증의 체현을 지시하는 프로이트적인 원개념이 될 테다. 두 번째 경우는 조금 더 확장된 맥락에서 (슬라보에 지젝이나 알란카 주판치치 등속의 인물들에 의해) 사용되는 경우로 견고함(소위 자기관계적인 동일성)의 허위가 찢기어지는 자리(상징의 틈새)에서, 비로소 증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매개해내는 실재의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현대 정신분석이론가들은 이처럼 망그러진 진실/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윤리적’이라는 표현으로 서술해낸다. 그렇담 본문에서 허위적인 논리에 기대어 모든 것을 전일성의 원리 안에 짜넣으려는 파시즘의 기획은, 실재 위에 켜켜이 먼지를 쌓아 두려는 (본디부터 분열된 대타자에 의한) 소위 ‘비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7) 와이드스크린의 화면구성은 클로즈업에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영화의 말미와 같은 장면에선 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복무하게 될 여지도 좀 있다. 일반적으로 넓은 화면에서 클로즈업을 시도할 때면, 완전히 그 인물의 감정선 속에서 녹아드는 일 같은 건 좀처럼 불가능해진다. 아무래도 여타의 장면들을 같이 포착할 수밖엔 없고, 따라서 인물과의 동일시 작업이 시시각각 침투해오는 다양한 지각요소들에 의해 충분히 훼방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발 거리를 두고서, 감정의 고양과 격동을 다소 절제된 미감을 통해 지켜보아야 하는 경우라면, 오히려 이야기가 달라진다. 역사의 무대 속으로 지워져버린 인물들(집시들)이 경험한 공동의 아픔을 제 몸으로 체현해내는 장고를 멀찍이서 바라볼 때, 관람객들은 단순히 한 인물의 감상에 동화되는 수준을 넘어서는 정서경험의 입체화 효과를 기대해볼 수가 있다.
(8) 존재껍질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조개껍질’에서 차용했다. 그것은 단순한 껍데기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운동성과 생성력을 지닌 존재의 자기표현을 임의적으로 지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잠정적인 틀거지에 가까운 것이다.
(9) 여기에서 언어란 발터 벤야민의 언어개념을 지시한다. 벤야민에게 언어란 단지 말과 글 차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것은 자기 스스로가 무엇의 본질을 구성하는 산물인 동시에 그 본질을 온전하게 전달해내는 기능을 담당하는 모든 것들을 아울러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다.
(10) 장고는 독일군 장교의 질문에 답하며 내가 음악을 아는 게 아니라, “음악이 나를 안다”는 말을 뇌까린 바 있다. 이 짧은 명제의 뜻을 곱씹어보는 건, 생각 외로 많은 것을 안겨다줄 것이다.
(11) 안토니오 네그리의 경우와 같이 나-공동성이 절대적인 (정치철학의) 주체형식으로 선언 될 때에 논리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개별자들의 욕망과 보편적 집단의 요구를 모순 없이 화해해내겠다는 건 필연적인 배중률의 위반을 초래하기 되는 까닭이다. 필자는 동일한 것을 무한한 다수성의 방식으로 경험해낼 수 있는 예술적 존재형식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의 공동존재의 실현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2) 전지구성은 소위 세계성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보편은 보편이되 열린 형식을 담지하는 역동적 보편을 의미한다. 전지구성은 이미 틀 잡힌 청사진의 모형을 미리 제시하지 않으며, 경계를 계속해서 가로지르는 실천의 토대로부터 끊임없이 구성되고 또 재구될 수 있는 잠정적 성질을 갖는다. 본 개념에 대해 획기적 통찰을 제공해주는 논자로는 인도 출신의 미국 포스트콜로니얼/페미니스트 비평가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있다.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남병수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이나 에세이 등속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지점에서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에 있다. 이를테면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설정이 삶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더불어서,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구원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호명해낼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