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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씨네톡 2부_한공주_정재형, 박태식, 민병선, 윤성은, 이수향, 이대연, 안숭범, 성진수

이대연 

내용은 비슷한데, 느끼는 강도의 차이인 것 같아요. 아까 <한공주>가 젠더문제에 국한된다고 하셨는데, 저는 젠더문제를 확실히 벗어나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밀양 사건―물론 실화를 모티브로 했으니까 나타나지만, 제가 더 강렬하게 떠올렸던 사건은 사실 용산참사 같은 경우예요. 그러니까 아무한테도 보호받지 못하고, 죽여도 죽인 사람이 없고 뭐 이런 어떤 호모사케르적인 상황인데. 한 공주가 정확히 그 지점에 있잖아요. 법으로도 보호해주지도 않고 사회 어떤 구성원도 보호해주지 않고…… 그런데 이름은 공주예요. 그러니까 공주라는 게 절대 주권 자의 딸이잖아요. 법으로 터치할 수 없는 법 외적인 존재인데, 사실은 법 밖으로 나와 있는 처지거든요. 그러니까 얘를 볼 때 어떻게 이 아이가 이 사회 안에서 살고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시>가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으로 치환해서,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공주>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야, 이게 우리가 사는 땅이야, 현실이야, 하면서 한국 사회를 잘라서 그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은 거예요.

 

박태식 

손에 딱 잡히게

 

이대연 

네.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공주>가 보여주는 세상이 어떻게 보면 미학적으로나 여러 가지 부족한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게 넘어가는 지점 자체가 조금 더 초극적이라고 할만한 느낌이 마지막에 와서는 확,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근래  이런 영화를 봤었나?

했어요.

 

정재형 

동의하는 편인데, <시>는 제목 자체로 암시한다고 봐요. 그래서 나는 <한공주>를 이렇게―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그렇게까지도 느껴질 정도로 이창동의 <시>와 <오아시스>라는 두 편의 텍스트, 그리고  <시>와 (<한공주>의) 어떤 장면의 유사성 같은 것들로 볼 때 이창동을 상당히 의식하고 그것을 초극해 내려하는 (지점이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 지점을 만약에 내가 대변해서 이야기한다면 이런 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죠. 말하자면 <시>라는 것은, 이창동이 피해자 입장에서 그리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뭔가 본인 얘기를 자꾸 하고 있다, 그리고 초극의 자세 자체가 관조적이고 체념적이고 현실 투쟁적이지 않다, 그런데 한공주가…….

 

박태식:

종교적인(웃음)…….

 

정재형:

이대연 씨 표현대로 하면 종교적이고, 저도 그런 측면에서 이 감독이 어떤 비판의식에 칼날을 댔다면, 그 수영하는 존재를 한계로 볼 것이냐, 아니면 모순적이긴 하지만 물속에서 비상하려고 하는 몸짓으로 볼 것이냐 하는 건데, (나는) 훨씬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던 것이거든요. 이건 그 동안의 영화가 참 답답했다―왜 피해자 안으로 들어가서 뭔가 그들이 할 수 있는 목소리를 마음껏 내려고 하지 않고 왜 자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가지고 해석을 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우리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얘기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요. 그런데 그것도 말하는 방식이 저는 분명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보는데, 사회적 문제를―젠더 문제는 사회적 문제죠―그러니까 젠더 문제 그 자체가 곧 사회적 문제거든요. (그리고) 사실은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법체계에 대한 문제예요. <방황하는 칼날>에서 얘기하는 양형의 억울함에 대한 문제와 똑같이 일치되는 거거든요. 결국은 거기서 양형의 문제를 가지고 왜 우리 법체계가 이렇게 부당한가라고 분노했듯이, 왜 여자가 이렇게 이 사회에서는 당해야 하고  부당한가라는 것에 대한 문제가 똑같이―젠더 자체에 대한 문제만도 아니고, 법 자체에 대한 문제만도 아니고―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시스템의 주체에 대한 비판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그들을 반성하게, 관객들이 그들에 대해서 공분을 할 수 있게끔 메시지가 있는 영화가 <한공주>라고 보는 거고― 청소년의 문제를 떠나서, 정말 젠더의 문제를 떠나서, 사실은 가장 반성해야 될 존재가―모든 사람이 반성해야 되는데 ―그 청소년 당사자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확대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기성인들이 될 거고, 그 중에서도 특히 소득이 높은 이 사회를 끌고 가는 지도층이 될 텐데, 바로 그들이 아이를 죽게 만든 가해자, 진정한 가해자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에서 공주를 폭행을 하는) 가면 쓴 애들이 아니라. 왜냐하면 걔네는 그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모방한 거니까.

 

02_(1)

 

그런데 아이들이 왜 그런 강간행위를 하는가―걔네 자체가 결손가정이라든지 학교의 제도권 교육에서 느끼는 굉장한 답답함이라든지 자기가 당하는 억압이든지 하는 것들에 대한 분풀이거든요. 그래서 지라르Rene Girard가 얘기한대로 희생제의를 하는 거예요. 걔네도 누군가 희생양을 내세워서 자기들의 존재와 우월감을 (확인)해야만  되는 거죠. 그런 면에서 가장 사회적 약자인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 하는 거죠. 걔네들은 사회적 압력에 대한 자기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책으로 여성을 희생양으로 내세우는 의식을 행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성은 항상 희생양이 됐다는 것 자체가 이 사회의 비극적 구조인 거고요.
그것을 어떻게 더 확대 논의 하건, 사실은 <똥파리>에서 제기됐던 폭력의 대물림을 계속 하고 있다라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만약에 이 감독이 굉장히 단순하게 이것을 처리를 하고자 했다면 (공주가) 죽지 않고 25m 벽을 통과하고 두 번 왔다갔다하는 모습으로 끝낼 수도 있었겠죠. 여성의 어떤 초극된 모습이라고 할 만한 것 자체를 평탄하게 보여주는 뻔한 결말로 끝낼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한공주>의 결말을) 절망으로 했단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생각 할 때, 어쨌든 학생들이 성인을 모방하고 그리고 그것은 한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굉장히 중요한 거울로서 봐야 된다― 그런 측면에서 어떤 우리 사회의 황당한(?) 틀을 갖다가 보여주려고 했던 그런 점에서 굉장히 현실적인 영화로 보고싶고, <시>는 현실을 얘기 하면서도 너무 초월적인 방식으로 했다는 점에서 우월성을 떠나 대비가 된다―그런데 그런 것에 대한 비판의식을 이 영화가 갖고 있지 않나 하는 점에 저는 주목하고 있는 거예요.
다르덴 얘기를 많이 했는데, 다르덴은 조금 다른 위치에 놓였다고 봐요. 다르덴이 현실을 다루는 영화적 양식과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한공주>의 영화적 양식이 같은 예술영화긴 하지만 워낙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하기는 사실 어렵지 않나 생각하는데, <똥파리>에서 폭력을 대물림 했다는 것의 심각성을 얘기했듯이 여기에서도 바로 비극으로 끝을 냈다고 보는 거죠. 왜냐하면 계속 대물림이 되니까  비극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그러나 그 이면에는 분명히 피해자의 의식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영을 하지 않았을까, 저는 그렇게 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싶거든요.

 

윤성은 

저도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이 저도 되게 긍정적으로 봤는데, 네. 그 장면이 걔가 떨어지는데, 저는 그게 25m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던 시기는 그 조금 앞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 이후에 내가 더 수영을 잘하게 됐을 수도 있어요. (일동 웃음) 코믹한가요? 시간이 흘렀다는 뜻인데. 저는 앞에서... 저는 그걸 열어놨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걔가 죽었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열어놨다라고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이수향 

저도 약간 그게 사람들한테 처음엔 죽은 것처럼 이렇게 딱 보이게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솟구치고..

 

윤성은 

왜냐하면, 나레이션 자체가 내가 마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수영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이수향 

저도 약간 열어놨다고…….

 

이대연 

그런데, 수영 할 줄 아세요?

 

윤성은 

네.

 

이대연 

그런 강물하고 수영장하고 다르다는…….

 

박태식 

절대 못 빠져나와요.(모두 웃음) 절대 못 빠져나온다고. 그러니까 한강물에 빠져 죽는 거야. 아무리 수영 잘 하는 사람도 못 나오는 거야. 조류 때문에.(웃음)

 

이수향 

영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든 사람이 다 얘가 죽기만을 바라는 거예요. 그게 보는 내내 너무 괴로웠어요. 그냥 네 친구처럼 너도 죽으면 다  편하잖아. 사

람들이 이렇게 강요하는 느낌이었어요. 아무도 집을 제공해주지 않고 살고 싶은데 자꾸 들이대고, 친구들도 사랑이라고 얘기하지만 왜 말도 안하고 (영상을) 찍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되죠. 그런 모든 상황들이, 얘는 너무 괴로운데, 어떻게 해서든지 개인의 실존을 견뎌내 보려고 하는데―엄마 아빠도 아무도 도와 주는 사람이 없지만―영화의 상황은 얘를 자꾸 죽음으로 모는 거예요. 그런데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게 유치하든 뭐가 됐든 간에 한 불행한 개인이 저렇게 안 끝나고 잘 살아남아서 어른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태식  

그러면 더 좋았겠다.

 

이수향  

그럼 영화적 완성도가...

 

박태식  

그런데 뭐 영화 끝날 때 섣불리 희망을 주는 것 보다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게 훨씬 더 극적이더라고. 테스에서도 죽잖아 막판에...

 

 

성진수  

근데 저는 방금 (<방황하는 칼날>과 <한공주>) 두 편의 우리나라 영화를 보면서, 요즘에 특히 그런 생각이 많이 드는데요. 헐리우드 영화가 현실과 다른 거짓된 희망과 거짓된 해피엔딩을 만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영화는 80년대부터 리얼리즘을 어떤 하나의 종교처럼 여기면서, 영화에서 단순히 희망이라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삶의 롤 모델 같은, 혹은 롤 모델 같은 사회를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에서 전혀 못 보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거짓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저는, 소위 말하는 '정치적 옳음'이라는 것이 너무 무시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OO한 것이 옳은 거야’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런 것을 믿고 살아왔는데, 영화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영화를 통해 본 것과 자신의 믿음과의 모순을 통해서 ‘현실과 내가 믿었던 이상이 다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이상과 정글 같은 현실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라는 갈등 같은 것들이 생기죠. 이것이 리얼리즘 영화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요즘은 현실에서도 그런 이상은 전혀 없고 영화에서도 이상은 전혀 없어요.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에 있어서 ‘사회는 정글이야. 네가 힘을 가지는 게 최선이야’라는 선택 밖에 그 요구되지 않는 겁니다. 과연 영화라는 것이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간다는 점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요즘 헐리우드 영화중에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많은데, 소위 롤 모델을 제시하는 영화들인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할까. 예를 들어 <방황하는 칼날>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민병선  

<테이큰>? (일동 웃음)

 

성진수  

뭐 예를 들어 <테이큰>처럼 해 주면 속 시원하잖아요. 영화를 통해서는 정의가 절대 성립되지 않고,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도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그것이 충분한가라는 의문이 들어요.

 

정재형:

그런데 나는 우리가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사실 영화가 많죠. 우리가 평론가이기 때문에 꼭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지금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나는 <한공주>와 <방황하는 칼날>을 분명히 비교하고 싶거든요. 나는 <한공주>같은 영화가 찬양되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평론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지배적인 담론이 되어야하는데, 그런 지배적인 담론이 숨고 다른 <방황하는 칼날>이라던가 영웅적 서사나 영웅적 해결담이 지배적인 담론이 되면 이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게 되잖아요. 표면과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두 개의 시각을 관객이 가지면서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한 방향을 자신이 풀어갈 수 있을 텐데 영화가 그런 기능을 해야 한다고 보죠. 그런 의미에서 비평 담론도 그런 영화들을 가려내려고 하는 작업이라고 보거든요. 단순하게 얘기하면 좋은 영화냐 나쁜 영화냐 이렇게 얘기하겠지만, 관객의 판단이 좀더 사리분별과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죠. 그리고 능동적이구요. 그런 영화들을 좋아하는 것인데. 다르덴 영화 굉장히 좋죠. 한국영화 중에 다르덴과 같은 퀄리티의 영화들을 관객들이  볼 수 있다면 좋은 거죠. <한공주>같은 영화도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좋은 영화라고 추천해 주고 싶구요.

그런데 <방황하는 칼날>은 관객이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피해가게 하는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너무 단순하게  분노하게 만드니까요. 그런 영화들은 정치가들이 좋아하죠. 그래서 정치가들이 가장 한국영화를 많이 이용하는 거 같아요. <변호인>도 그렇고, <광해>도 그렇고. <관상>도 그렇고, <설국열차>도 그렇고. 대부분 그런 영화들에 대해서 정치권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져요. 일반 관객들은 그냥 오락적으로 볼 뿐인데, 그것에 대한 해석담론이 평론가보다도 정치가들이 더 과도한 의미로 해석해서 표에 그것을 반영하고 싶어해요.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국론 분열적이고 다분히 정치적인 의미의 해석담론. 저는 <한공주>는 바로 거기에 화살이 있다고 보거든요. 바로 정치가들 그리고 재벌. 우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문제, 병폐를 갖고 있는 그들에 대해서, 성폭행의 피해자 입장에서 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게 메시지라고 저는 봅니다. 관객이 그렇게 알아듣는다면 <한공주>라면 가장 중요한 영화일 수 있어요. 왜냐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니까. 그들이 반성을 안하기 때문에 폭력의 문제는 대물림되는 것이죠. 그 시스템을 그 사회 시스템을 굳건하게 영속화시키는 것들이 많은 오락영화들 중에서 단순하게 분노를 폭발하게 하는 영화들이라고 보거든요. <도가니>라든가 등등의 영화들. 결국 ‘도가니 법’도 국회의원들에 의해서 급조되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영화가 나오기 전에는 국회의원들은 뭘 했나요. 영화가 국회의원을 움직인 거예요. 영화의 친구는 관객이 아니라 국회의원이예요. 정말 아이러니한 거죠. 단적으로 한국영화는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영화예요, 그렇게 보면. 관객을 즐겁게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치적 지배 특권층을 위해서 봉사하는 영화예요. 그런 것들은 비평가로서 반성을 요구하는 대목인거 같아요.

 

04_(1)

 

민병선  

근데 이제, 다른 면에서 생각하면,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고 봤을 때, 이런 류의 영화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이 현실의 문제잖아요. 예전에는 성폭행과 같은 문제를 다룰 때 그 행위나 사건, 범죄를 다루고 그것에 대한 응징을 다루었다면, <한공주>감독도 얘기했지만, ‘너도 또 성폭행 얘기냐?’라고 했을 때 ‘그러게 맨날 성폭행 얘기만 하네. 이걸 꼭 내가 해야 하나?’ 싶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이 진보적이 되었다고 해야 하는지 성숙해졌다고 해야 하는지, 아무튼 트렌드적인 면이 있다고 보는데요. 성폭행이라든지, 아까 말씀하신 젠더라든지, 그런 문제가 사회적으로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발생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습, 사회의 모습으로 눈을 돌려보자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그 ‘밀양 사건’에서 제대로 된 해결이 다 되었다면 이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까. 당 연히 나올 수 없었겠죠. 그런데 뭔가 불만이 있고, 절망이 있고, 분노가 있으니까 영화로 이것을 다루잖아요. 그런데 보면, 성산대교를 준비하는 곳도 있고, 발바리 성폭행도 있고, 뭐도 있고... 굉장히 많은 얘기들이 있거든요. 그 많은 얘기들이 다 들어가려고 준비하는데요. 저에게도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와서, 칠곡 울산 어린이 집 사건을 해보자면서 자료를 많이 가져오셨더라고요. 이처럼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가 문제거든요. 지금 청소년들의 문제가 표면적이긴 하지만, 사실은 청소년들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시각이 성숙된 측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공주>나 <방황하는 칼날> 모두 아이들의 행위를 떠나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한 번 다뤄보려고 하니까 그 사건들을 자꾸 감추려고 하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미스터리형식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그 사건을 감추고 외부적 모순을 보여주니까 이런 담론들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라도 나와서 법이 좀 바뀌어라. 우리라도 떠들어서라도 법을 바꿀 수 있다면 이런 얘기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거죠. 밀양의 경우, 아까 말했듯이 마흔 네 명이지만 실제 처벌을 받은 친구는 일곱 명 정도인 것으로 알아요. 그 일곱 명도 모 두 보호관찰처분이구

요. 법이 그러한데, <한공주>는 여러 관계성 속에서 봤더니, 즉 우리 사회가 고도 압축 성장을 하면서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결국은 누가 희생을 당하는가 보니 결론적으로 가장 힘이 없고 약한 여성들이 그 자리에 있는 거죠. 그러니까 젠더라는 것이 그 마지막에 파생되는 결론 화룡점정같은 거죠.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펑 터지는 폭탄이 성폭행 문제인거 같더라구요. 이런 사회적 담론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한국영화들이 그래서 자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정재형  

터지려고.

 

박태식  

우리나라는 너무 모순이 많으니까. 불완전하니까, 불확실 한 것이 많다보니까.

 

민병선  

그렇죠. 그래서 자꾸 나오고 하는데...... 그래서 이것을 보면, 영화가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서라도 법을 바꿨으면 좋겠다. <방황하는 칼날>의 경우도 6개월~2년 정도밖에 안되거든요. 사람을 죽였는데도. <한공주>는 성폭행을 했지만 예전에는 합의만 해주면 처벌을 안 받았는데, 법이 바뀌어서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친권자가 합의를 해도 성폭행만 처벌하는지 성폭행에 대한 치상죄를 처벌하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벌을 받거든요. 사실 결손 가정의 아이들은 보통 가정의 친권과 다르거든요. 예전에 보면 변호사가 친권자를 찾다보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먼 친척 할머니가 법적 친권자니까, 돈 싸들고 가서 ‘여기 지장 하나만 찍어주시면 이 돈 드릴게요’라고 하는 거죠. 할머니는 뭔지도 모르고 찍으면 합의가 되어버리는 거죠. 이런 영화들을 통해서 그런 것이 사회문제가 되니까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친권자의 합의가 있어도 형사상 재판을 하도록 하는 이런 식으로 법이 바뀌더라구요.

 

박태식  

작년 7월에 후견인 법이 나왔어요.

 

민병선  

그래서 그나마 이런 영화들이 나와서 사회의 모순된 측면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들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영화가 그런 기능들을 하는 거 같아요.

 

성진수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저처럼 의심을 갖는 분이 또 계신가 궁금한데요. 저는 이런 사회문제영화라고 하는 것이,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같은 영화의 예상치 않았던 흥행 속에서, 그리고 <레미제라블>같은 영화의 흥행 분위기 속에서, 심각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흥행가치가 있고 마케팅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측면에서, 그런 소재들을 주류 산업, 즉 투자하고 배급하는 곳에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그런 영화의 생산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영화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소재주의적 접근을 하면서 이런 영화가 한국에서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장르 사이클처럼요.

 

 

정재형:

난 사실 그렇게 봐요. 예를 들면 얼마 전에 <또 하나의 약속>의 평을 그런 취지로 썼는데요. 사실 현실적으로 삼성을 이기기 어렵잖아요. 수십 건의 산재 보험 소송에서 한 건 이긴 것을 가지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으로 그렸는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절망적인 것이잖아요. 그게 현실이면 영화가 정직하게 현실을, 아까 얘기도 했지만 다르덴 식으로 그려준다고 하면 그냥 보여줬어야죠. 그 영화는 사실 목적이 운동권 영화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많은 관객들이 그 영화를 보고 삼성 본사에 가서 시위를 하라는 목적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잖아요. 결국 투자를 받고 적당히 수익을 창출해야하는 뚜렷한 상업적 목적이 있기 때문에, 소재 자체가 갖고 있는 건강함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영화가 보여주는 선악이분법적인 천국과 같은 구조 속에서 선이 악을 이기는 결말을 보여주는, 제 표현으로는 거짓 희망을 주는 영화이다. 그런데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까지도 저는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런 영화들이 너무나 많은 거죠. 더 상업적인 영화부터 시작해서 사실은 모두 다  이 땅의 소외 받은 사람들과 민중의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는 <변호인>같은 영화조차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지만, 저는 사실은 그 영화의 진짜 주 인공은 송강호가 아니라 국밥집 주인인 김영애일 수 있다고 봐요. 관객들이 그런 시각을 갖는가? 송강호라는,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이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송강호 캐릭터에 공감하고 눈물을 흘렸다면, 여전히 관객들은 매우 나이브하게 그 영화의 영웅주의에 감동받고, 지나치게 영화의 상업적인 전략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죠. 결국은 그 영화를 가장 많이 이용한 것은 정치권이예요.

 그런 것을 봤을 때, 영화가 상업적 기반에서 만들어지는데 소재는 비상업적인 소재들을 너무나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국민감정은 매우 비상업적이고 순수하죠. 그런데 영화의 제작 동기는 너무나 상업적이고 그것을 이용하는 집단은 또 너무 정치적인 집단이구요. 관객과 상업집단, 정치집단, 이 삼자가 어떤 관계도를 형성하고 있는 판이예요, 지금은. 그런 소재들만 가지고 한다는 거죠. 미국 같은 경우는 정치 철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현실도피적인 오락물로 관객을 즐겁게 해주고 끝나거든요. 우리처럼 뭐 <아이언맨>을 가지고 정치가들이 이용하는 사례가 없죠. 근데 우리는 탈북자 얘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회의 핵심적인 이슈가 되는 소재들로 상업 오락영화를 만드는 것은, 우리 현대사가 너무 굴곡이 많기 때문에 국민감정이 한이 많고,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청산하지 못한 많은 주름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과도하게 이용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래서 좋게 보면 상업적으로 우리나라 영화를 외국 사람들이 상당히 좋아하는 것은 또 사실이예요. 한류 이런 것들을 좋아하듯이. 왜냐, 박력 있고 다이내믹하고, 마치 해방 영화들 같이, 마치 민족해방 영화들 같이. 갑자기 어저께 오랜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들처럼 모든 열정과 이런 것들이 넘치는 거죠. 아까 일본영화와 비교했지만, 일본영화들은 관조적으로 거리를 두고 살인사건을 바라보는데 비해서, 우리는 그 이면을 보려고 하지 않고 다이내믹하게 전개되는 거죠. 그런데 다 오락영화이고 상업영화인데 왜 그렇게 정치권에서 법안을 만들고 그걸 가지고 과거사를 청산하고 싶어하고, 왜 그렇게 우리가 과민한가? 오늘 다르덴이 많이 언급되는데, ‘도가니법’의 원조가 ‘로제타법’이잖아요. 그런데 다르덴의 영화와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데, 다르덴의 굉장히 쿨한 리얼리즘 영화와 우리의 격정적인 리얼리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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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그렇죠. 처음엔 <로제타>를 보고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를 정도였어.

 

정재형  

정말 쿨하고, 냉정하고. 우리가 브레송의 영화와 비교를 많이 하는데, 영향도 많이 받았지만, 감정이 절제된 그러한 다큐멘터리 같은 리얼리즘이죠. 미학의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전혀 대중화될 수 없는 영화죠. 그 예술 영화의 관점은. 그런데 우리는 똑같은 얘기를 하면서 <도가니>같은 경우는 문제가 됐었잖아요. 어린이들의 케이스를 너무 선정적으로 너무 다 보여준다고. 너무 참혹해서 볼 수 없을 정도로 관객을 흔든다는 식의 감정의 과잉에 대한 문제를 많이 지적했잖아요. 그럴 정도로 우리는 센티멘탈하다고 해야 할까요? 장점이라고 해야 할지. 어찌했든 우리는 그런  현상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구요. 어떤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런 차이들이 있고 그런 것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두고두고 진단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독이 되는 것인지 약이 되는 것 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윤성은  

저는 정 선생님의 얘기에 너무 공감을 하는데요. 저도 도구로서의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거든요. 요즘 우리나라의 영화들, 사회문제를 다루는 영화들이 법을 바꾸는데 이용되고 있다면,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영화는 영화사 초기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어떤 감독이던지 의도를 가지고 그런 방식의 사회 운동을 할 수 있긴 하지만, 그런 부분에 있어서 우리나라는 미학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의 면면을 봤을 때 그런 미숙함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분노 내에 공분인데 그것이 결국 상업적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말씀에 너무나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사실 공유하고 있는 죄책감이거든요, 죄의식. <한공주>에서도 나는 어떤 인물 쯤 될까, 은희 같은 인물쯤 될까, 선 생님의 어머니 같은 인물쯤 될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주는 거 같아요. 우리가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거든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나라 멜로드라마의 고무신 부대부터 시작해서 거기에 집중하고 열광했던 비슷한 정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재형:

뒤 늦은 후회.

 

윤성은:

그러니까 사회문제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멜로드라마의 한 장르처럼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지, 법을 바꾸고 하는 개혁적인 측면에 있어서 얼마나 진정성 두고 있는지 의문인 거 같아요.

 

정재형:

우리가 멜로드라마가 지배하니까 그것을 상업적으로 차용하는 거니까.

 

지금까지 얘기가 많이 나왔고 시간도 많이 흘렀네요.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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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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