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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 ‘셀프(Self) 피로’로 빚은 세계 ─ 2010년대 ‘남성영화’들의 논리에 대해

1. 

감독, 영화, 배우라는 일반명사가 ‘여성’감독, ‘여성주의’ 영화, ‘여’배우처럼 몇몇 글자를 굳이 대동해야 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이 일반명사들이 가리키는 ‘일반’에 ‘여성’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반’이 될 수 없기에 더 많은 관심과 참견, 그만큼의 기대와 배제를 견뎌야 한다는 것까지가 이 ‘여-’로 수식되는 많은 작품들이 짊어진 무게이다. 한참을 생각해도 다섯 손가락을 미처 다 꼽기 힘든 ‘여-’감독, 몸을 사리지 않고 눈에 띄는 장면을 만들어낸 ‘여-’배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리한 ‘여-’영화에 대한 관심에는 늘 ‘일반’의 영역에서 튀어나간 호기심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신기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일반의 영역으로 내려놓는 일, 즉 굳이 상대의 성(性)을 흉내 내지 않은 ‘여-’들이 그린 ‘일반’ 세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꽤나 치사한 일이 된다. 늘 비슷한 상태이지만 가능성의 부스러기를 굳이 찾아내야 하는 일도, 두 개의 성(性)(1)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한쪽만 분투해야 한다는 자체도 그렇다.  

흥미롭게도 최근 몇 년, 일반명사 앞에, 그러니까 굳이 표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절대적인 디폴트 값으로 존재하던 ‘남성’이라는 수식이 붙기 시작했다. 1960-70년대를 구가하던 액션영화는 둘째치고라도,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영화를 뒤덮었던 조폭영화에 성(性)은 굳이 표기될 필요가 없었다. 멋진 액션을 선보이던 협객, 욕을 하며 주먹을 날리고 비장하게 혹은 불쌍하게 죽어가던 영화 속 남성 젊은이들은 한 시대의 조류로까지 인식될 만큼 당연하게 확장될 수 있는 영화의 일반이었기 때문이다. ‘협객’, ‘액션’, ‘욕’ ‘주먹’, ‘비장’, ‘잔인’, ‘의리’, ‘권력’, ‘젊은이’와 같이 단어의 소유주를 굳이 표기할 필요가 없었던 그곳에 성(性)이 표기되기 시작한 것, 그리고 그 뒤에 따라붙는 ‘지겹다’는 말들. 이전부터 늘 그래왔지만 갑작스레 바뀐 이 반응은 염증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이제 관객들은 잔인하다는 표현의 문제를 넘어 스크린의 불균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가령 관객들은 짧은 순간 헐벗은 모습으로 등장한, 혹은 비슷비슷하게 유약한 여성들로 그려진 반복되는 캐릭터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에 대해 폭발적인 이야기들을 생산해냈다. 몇몇의 영화들은 벡델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것을 영화에 홍보로 사용하거나 ‘여성’느와르라는 명칭으로 여기에 부응한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 대응들은 애초에 벡델 테스트가 왜 나왔어야 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여성’느와르가 담고 있을 위험성에도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았기에 튀어나온 희극이었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먼저 이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복되는 지적과 발견은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는, 이미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온 인식을 재확인하는 것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왜 이런 홍보가 필요한지에 대한 의식 없이 오히려 이를 셀링 포인트로 전환하고자 하는 이들의 영화에서 여성의 등장여부 자체, 그러니까 그들의 등장 정도를 측정하는 것으로는 사실상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존재감이 없거나 남성들을 흉내 내는 것으로 자족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글은 질문의 방향을 살짝 틀어보려고 한다. 여성들이 어떻게 등장하느냐가 아닌 ‘왜 그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이것은 곧 남성영화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 즉 그들의 세계가 무엇을 어떻게 구축하고 싶어하는가를 파악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언컨대, 그 세계가 드러났을 때에는 꽤나 허탈할 것이다.  

2. 

<부당거래>(2010), <아저씨>(2010), <범죄와의 전쟁>(2012), <신세계>(2013), <남자가 사랑할 때>(2014),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5), <아수라>(2016), <마스터>(2016), <더 킹>(2017), <특별시민>(2017), <V.I.P>(2017), <침묵>(2017), <범죄도시>(2017) 등의 영화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은 이 작품들의 중심인물이 경찰과 검사, 정치인 그리고 조폭이라는 특정 계급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2000년대 조폭영화와 비교하여 이 영화 속 남성들의 연령이 꽤나 높아진 것 역시 이 영화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는 것을 어색하지 않게 한다. 계급적 우위가 세상의 중심에 박혀 있다는 것을 체득한 이들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면 나이는 무기가 되며, 오히려 젊은 남성의 하드바디는 무식하고 미련한 것으로 전락한다. 이는 이전의 조폭영화 속 남성들과 남성영화 속 남성들을 확연히 구분시키면서 남성들 사이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남성들의 공적영역으로의 진입을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2)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상대를 이겨보겠다고, 올라서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가령 <넘버3>(1997),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자신을 품어주려는 이들을 만나 잠시나마 안정을 찾고(가령 <킬리만자로>(2000)), 스님들과의 싸우고 화해를 했던 조폭들이나(가령 <달마야 놀자>(2001)),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던 조폭들이(가령 <두사부일체>(2001)) 2000년대 초반에 있었다. <비트>(1997)나 <태양은 없다>(1998)의 ‘민’이라는 이름, 오토바이를 타는 아웃사이더, 하와이안 셔츠와 어울리던 Love potion No.9의 강렬한 전주 같은 것들은 마치 1980년대 홍콩 누아르물처럼 ‘남자다움’을 과시할 수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금은 어설픈 세계 속에 살고 있던 당시의 남성들은 어렸고, 여렸고, 감상적이었으며, 스크린 밖 현실과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 <태양은 없다>
그러나 이제, 현재의 남성영화에서의 남성은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지도, 물리적으로 힘이 센 남자가 되려고도 하지 않으며 할 필요도 없다. 경찰과 검사, 정치인 등이 영화의 중심에 서고 이들 사이의 알력은 현재의 남성들이 갈망하는 헤게모니가 권력의 획득과 그것에 따라오는 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남성영화는 이로부터 파생된 남성들의 권력 다툼, 혹은 몰락과 승리를 국가적 차원의 흥망성쇠와 겹쳐 놓으면서 거대한 공적영역을 완벽하게 남성들만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남성영화들은 이렇게 사회의 중심에 남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쉽게 말해 현재의 남성영화들은 공적인 영역, 현실을 바라보며 문제점을 파악하는 것, 그것을 뒤엎거나 회복시켜 해결하는 것, 여기에 부가되는 정치적 논쟁들이 모두 남자들만의 일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 믿을만한 ‘완벽한 남성’이 되기 위해서는 너무도 원초적이고도 중요한 절차가 필요하다. 이때 공적영역에서 배제되었던 여성이 ‘필요’해진다. 철저히 남성임을 증명하는 과정을 위해 그들이 불려나오는 것이다.
 
  
▲ <내부자들>
재벌에 대한 폭로, 정치적 교합, 경제의 붕괴, 비자금의 폭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 등 언뜻 보아 거창한 일처럼 보이는 ‘거사(巨事)’ 직전 늘 고급 요정이나 룸싸롱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함께 밟아갈 진정한 남성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이성애적 유대관계를 중심에 둔 보편적인 남성성을 강화시키는 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여성은(3) 이 세계가 남성들, 그 중에서도 ‘여성‘만’을 성적으로 갈망할 수 있는 신체 건강하고 온전한 남성’들만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시키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즉, 여성의 소비는 스스로가 완벽한 남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행위이자, 이에 동조할 수 있는 이들만 이 영역에 들이겠다는 승인이다. 함께 하는 다른 남성들처럼 여성을 대상화시켜 어떤 짓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욕구에 충실한 남자라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모든 일들은 남성성의 증명 과정이 되어 버린다. 이것까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한 남자들이 모인 공적영역은 완벽하게 그들만의 세계이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견고한 곳이 된다.

남성영화에서 ‘여’배우들이 자신의 서사를 가지지 못한 채, 늘 남성 옆에 헐벗고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요한 분이니 잘 모시고 서비스 잘 해드리라”는 그 흔한 대사들, ‘눈길도 주지 않는 노년의 정치인들 앞에서 선택’ 받기 위해 알몸으로 대기하는 젊은 여성들, 질펀한 남성들의 파티에서 그들의 주변을 맴도는 여성들은 모두 남성이 남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만의 세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절차 속에 던져진 피해자들이다. 여성들은 남자라면 무조건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이성애적 욕망에 불을 지필 수 있을 만큼 젊어야 하고, 글래머러스해야 하며, 무엇보다 쉬운 여자들로 남아 상납되듯 소비된다.

설사 여성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할지라도 이는 대체로 중년의 남성과 경합해야 하야 하는 ‘어린’ 여성인물인 경우가 허다하다. 서울시장 선거 유세장에서 ‘똘똘’한 질문으로 발탁되어 시장 선거운동에 뛰어드는 <특별시민>(2017)의 박경(심은경)이나 가해자가 되어 버린 딸을 구하기 위해 재벌 아버지가 기용하는 <침묵>의 변호사 최희정(박신혜) 등은 극 전반을 중요하게 이끌고 갈 인물인 것처럼 등장하지만, 극의 후반 그 역할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만다. 이는 애초부터 권력을 가진 중년의 남성과 대결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거대한 힘을 가진 이들이 숨기고 있는 것을 이 여성들은 결코 알 수 없으며,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영화의 서사는 오롯이 남성의 것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더군다나 이 젊은 여성들이 옳다고 믿는 윤리적인 신념들은 대체로 남성들의 세계에서 폐기되거나 폐기되어도 상관없는, 그러니까 ‘나이가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하는 치기어린 외침에 불과하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말들로 흩어지고 만다.  
 
  
▲ <더 킹>
여기에 현재의 남성영화들이 <베테랑>의 조태오(유아인)나 <내부자들>의 이강희(백윤식) 주필처럼 현실의 누군가와 겹쳐지는 인물들로 묘사되거나, 전두환부터 열을 지어 등장하는 실제의 대통령들의 모습과 영화 속 검사들의 희로애락을 그대로 겹쳐 놓은 <더 킹>의 논픽션화, 특정 직업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묘사 전략들이 더해지는 것은 이 영화들을 현실과 밀착하여 독해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성의 배제나 전시는 중요치 않은 것으로 쉽게 가려 놓는다. 무엇에 방점을 찍고 이 영화들을 감상하는지, 이 영화들의 단점을 감추는 알리바이로 작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자명하기에 그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조리에 대한 폭로나 정치적 올바름, 윤리적 잣대 등 쉽게 말해 대의(大義) 앞에서 이 문제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해진다. 도무지 측정할 수 없는 대(大), 소(小) 기준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4)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남성영화 속 남성들은 자신들끼리 완벽한 성(城)을 구축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그들의 견고한 세계는 여성의 존재 없이 완벽하게 구축될 수 없기에 그만큼 허술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황당한 것은 이다지도 허술한 세계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는 정의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세계를 만들 때부터 무수한 이들을 제쳐놓은 이 상황에서 남성들이 만든 세계가 그리 정의로울 리 없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믿는 정의를 위해서는 또 다른 폭력이 필요하고, 그 방향은 역설적이게도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3.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정한’ ‘남성’이 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성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재산도, 권력도, 그에 걸 맞는 것처럼 보이는 애인도 있어야 하며, 이 모든 상황의 수혜자인 것처럼 누리는 가족도 있어야 한다. 적절한 폭력과 욕을 중요한 순간에 날릴 수 있고(혹은 대신 날려줄 경호원이 있거나), 맘에 들지 않게 상황이 마무리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누르고 웃어줄 수 있는 배짱도 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욕심도 야망도, 악바리 같은 깡다구도 있어야 하며, 완벽한 수트를 입거나 아니면 적절하게 후줄근한 옷차림도 필요하고 너무 깔끔을 떨어도 안 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나는 남자니 괜찮다’는 호기로운 포즈가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성영화가 구축해놓은 이 중심적인 남성성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

남성영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를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주인공처럼 이름을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늘 주인공과 함께하는 어린 남성 캐릭터들이다. 굳건한 남성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이들의 연령이 높아지면서 이들은 대체로 ‘초보’나 ‘신입’이라는 수식을 앞세워 아직 직무에 익숙하지 않은, 미처 다 자리지 못한 것을 캐릭터 자체의 성격으로 한다. 이들은 스스로가 성장하는 서브플롯 속에서 ‘진정한’ ‘남성’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그려지는데, 그렇다면 이 어린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은 곧 진정한 남성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둔, 떨쳐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이 캐릭터들은 늘 중심이 되는 인물의 주변을 맴돌며 그를 동경하거나, 비난하면서도 닮아가며 남성의 세계로 젖어든다.
 
  
▲ <청년경찰>
남성영화들이 잡고 있는 남성 헤게모니는 곧 현재의 문화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하)는 남성 문화적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그 양상을 과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주변화시킴으로써 쉽게 설득된다. 남성들이 원하는 남성을 전면에 배치하고 그것에 미달하는 이들을 계도하여 자신과 유사한 위치에 두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자답지 못한 이’로 치부하고 배제하는 것.(5) 이는 곧 남성영화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쉽게 보여주는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악의 연대기>의 차동재(박서준), <범죄도시>의 강홍석(하준), 그리고 <청년경찰>의 기준(박서준)과 희열(강하늘) 등은 이를 매우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내가 지금 해야 할 것과 나에게 주어진 것이 스스로에게 잘 맞지 않는다는 것 등을 고민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민할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거나 스스로 떨쳐버려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민하고 있는 이 상황조차 굴욕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부끄러워한다. 별다른 사명감 없이 경찰이 되려던 <청년경찰>의 두 청년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는 목숨을 내놓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다. <청년경찰>은 두 인물의 희극적인 모습들로 그들의 공포를 감추고 진짜 경찰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몸을 단련하고, 역시 몸으로 부딪혀 죽음 앞에 당도해서까지 이루어내는 것은 아직 ‘경찰이 아닌 학생’이 경찰로 넘어가기 위한 과정이라기엔 너무도 위험하다. 

<범죄도시>에서의 홍석은 선배 경찰들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을 늘 멀리서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처음으로 자진해서 돌진했던 순간 큰 사고를 당하고, 정보과로 옮기겠다는 말을 어렵사리 꺼낸다. 이때 홍석에게서 읽을 수 있는 감정은 부끄러움과 죄의식이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가 났다는 것을 아파하기보다 그것을 아파한다는 자체에 대한 부끄러움, 남자로서 ‘강력반’의 체제를 끝까지 견디지 못했다는 죄의식 등은 그가 선배의 얼굴을 보지 못하거나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것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때 그가 동경해 마지않는 선배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이를 덮어주려 하지만, 그가 선배들의 세계, 즉 ‘진정한’ ‘남성’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사회의 남성으로서 위로받을 수 있는 차원이 아닌 것이다. 결국 홍석이 가장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은, 마치 그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범죄자들을 서류뭉치로 때리고, 욕을 하는 선배들과 유사해지는 그 순간이다. 이 모습을 본 선배는 “살살해”라며 의아하면서도 뿌듯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홍석은 ‘진정한’ ‘남성’이 될 수 있다.  
 
  
▲ <범죄도시>
‘남자답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무수한 함의는 결국 이에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남성들까지도 피해자로 끌어내린다. 이 어린 남성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선배들에게 대항할 수 없으며, 선의로 고집스레 대항하다간 결국 그들의 논리 아래에서 죽음으로 은폐되어 버리거나 남자답지 못한 자로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이 강요되는 남성성은 홍석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비단 누군가 그들을 내리누르지 않아도 스스로 자책할 만큼 강력한 것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진정한’ ‘남성’의 영역에 ‘아버지’라는 지위가 부여되는 순간 남성들이 바로서기 위해 배제해야 할 것들은 한 층 많아지며, 한편으로 그들 스스로 힘겨워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도 그들에게 짐 지우지 않았지만, 스스로 지켜나가는 그 아버지라는 무게. 거기에서 또 다른 배제는 발생한다.   

<대호>나 <보통사람>, <침묵>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아버지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부성’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지탱하기에는 어딘가 힘겨워 보인다. 이때 아들이나 혹은 딸과 같은 인물들은 천방지축이거나 보호해주어야만 할 정도로 아픈 이들이다. <대호>에는 1925년의 조선이라는 시간적 배경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많은 설정들이 난무하지만 결국 명포수 천만덕(최민식)을 호랑이 사냥터로 이끈 것은 아들 석(성유빈)의 이해할 수 없는 고집 때문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침묵>의 임태산(최민식)이 자신의 딸 미라(이수경) 때문에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즉, 다 자라지 못해 미흡한 존재를 위해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논리가 극 속으로 들어온다.
 
  
▲ <침묵>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로 숭고하기에 이해해야만 할 것이 된다. 가령 <침묵>의 임태산은 자신의 딸의 범행을 숨기기 위한 태국에서의 모의 중 죽은 약혼녀 유나(이하늬)와 닮은 여인에게서 유나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태산은 이미 유나로 보이는 그 여인에게서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다. 이는 말 그대로 태산의 환상, 그러니까 아버지로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을 한 자신에 대한 찌질한 위로의 한 방식일 것이다. 죽임을 당한 이 여인이 가해자의 아버지까지 달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도대체 무엇이, 누가 괜찮다는 것인지 모를 이 말은 아버지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배제해야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줄 뿐이다. 이처럼 중심적인 남성성은 늘 찜찜한 구석들을 숨기기에 급급하며, 그러한 방식으로 엉성하게 구성되어 있을 뿐이다. 

4.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영화 <추격자>(2008)에서 똑똑하고 맹랑한 미진(서영희)의 딸 은지(김유정)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볼 수도 있다. 만약 엄중호(김윤석)가 은지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가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끝까지 지영민(하정우)을 쫓았을까. 처음 엄중호가 지영민을 추격했던 것은 특정한 전화번호로 걸려온 손님에게 호출된 여성들이 사라지고, 미진까지 이 번호에 호출된 후 연락이 두절되자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이를 찾아 앙갚음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호는 미진을 찾는 자신의 집에 누군가 들어온다며 경찰에 신고하고, 쉽사리 울지 않는 은지를 만나 함께 하면서 더 이상 영민이 여자들을 팔아넘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미진을 찾기 위해 영민을 쫓는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미진을 찾으려던 중호가 변하는 것은 결국 은지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업소에서 일하던 다른 여성들, 혹은 그 이전 영민에게 죽임을 당했던 다른 여성들과 다르게 성노동을 하며 바르게 아이를 키워낸 어머니 미진은 은지의 존재로 부각된다. 결국 영민에 대한 중호의 응징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살인을 저지른 범법자에 대한 분노에서 어려운 와중에 훌륭하게 아이를 키워낸, 그러니까 보호받아 마땅한 이를 위해 악을 처단한 중호의 정의 실현으로 귀결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중호의 분노를 적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미진을 둘러싸고 있는 설정 때문이다. 지켜주어야 할 순수한 아이, 그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어머니, 급기야 잘려진 머리로 영민에 대한 중호의 분노를 응원하도록 만드는 것. 바로 여기에 남성영화들이 자신들의 폭력을 과시하면서도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숨어 있다. 

남성들이 열어놓은 세계가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라면 권력의 충돌에는 승패의 문제가 따라붙는다. 이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결국 누가 이겨 힘을 갖느냐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 추상적인 권력을 가장 일차원적인 형태, 그리고 가장 가시적인 형태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남성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폭력이다. 폭력은 남성들의 젠더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이를 그대로 노출했을 때에는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폭력은 윤리의 영역과 정면으로 배치되기에 그들이 구축한 세계 자체가 부정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마시킬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쉽기까지 하다. 악인에게 당하는 희생자, 도무지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설정된다면 그들의 폭력을 꽤나 멋진 것으로까지 세공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에 대항하는 폭력은 당연하며, 오히려 복수는 의무라고 까지 믿는 남성들의 견고한 체계를 박수 받을 만한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잔인하게도 희생양이 필요한 것이다.
 
  
▲ <범죄도시>
최근 남성영화들에 조선족 비하의 설정들이 달라붙는 이유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청년경찰>(2017)로 가시화 되었지만 외국인을 배제하거나 희화화 하면서 자국민을 부각시키는 방식이 그리 희소한 일은 아니었다. 사소한 것처럼 뿌려져있던 외국인 희화화를 넘어 <황해>, <신세계>, <범죄도시>에서 조선족 킬러로 등장한 이들은 분명 이들이 한국 사회에 이방인처럼 떠돌면서 문제를 일으키기에 도저히 ‘우리’와는 섞일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여기에 각종 범죄와 소문들이 뒤범벅되면서 이 상황이 실제이니(물론 아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의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는 척결의 대상으로서 악행을 일삼는 이들의 설정에 이방인이라는, 그러니까 우리와는 다르기에 배제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그 대상을 새롭게 찾은 것에 불과하며, 이로서 응징의 쾌감을 높이기 위해 더 잔인해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은 것뿐이라 할 수 있다.

남성영화의 악은 촘촘하게 설계된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악행이 깊을수록 그것을 응징하는 폭력이 값지게 포장될 수 있다는 점은 작위적이고 잔인한 가해자와 그로 인한 희생양을 끝없이 생산하는 이유였다. ‘북’이라는 영원한 적성국가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탈북했지만 비호를 받는, 그래서 더욱 없애고 싶은 이로 설정된 김광일(이종석)과 그에 의해 희생된 여성, 그리고 결국 김광일이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비호하던 ‘대한민국’ 국정원 요원 박재혁(장동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V.I.P>의 서사는 권력 구도에서 이데올로기에 이르기까지 남성영화가 무엇을 이뤄내고 싶어했는지를 놀라울 만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즉 남성영화들이 현실의 부당함을 영화 속에서나마 해결하는 것을 스스로의 사명이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악인은 척결이 정당화될 수 있도록 잔인한 짓을 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여야 했고, 그만큼 희생자는 극단적인 위기 앞으로 떠밀렸다. 물론 희생자는 이 위기에서 남성들이 구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마지않는, 구해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들보다 약자인 아이들이거나 여성이어야만 했다.

<아저씨>의 소미(김새론)는 만석(김희원)과 종석(김성오) 형제가 저지르는 악행이 얼마나 극단적인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마약을 하는 엄마를, 마약을 찾기 위해 집에 들이닥친 이들이 엄마를 고문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소미는 납치당하여 마약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었으며, 약냄새에 못 이겨 쓰러지는 친구를 지켜보아야 했고, 마약쟁이 불법 시술자 앞에 자신의 안구를 적출당할 위기에 까지 처한다. <베테랑>에서 배기사의 아들(김재현)은 체납된 임금을 받으려는 아버지(정웅인)과 함께 조태오의 사무실에 갔다가 아버지가 무자비하게 폭행당하는 것을 봐야했으며, 자살‘당’한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한다. <더 킹>에서 박태수(조인성)에게 도움을 청했던 성폭행 당한 여고생은 출세를 위해 한강식(정우성) 라인을 타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할 방법을 잃어 버린다. 소미와 배기사의 아들과 여고생은 차태식(원빈)의 총격을, 서도철(황정민)의 분노를, 박태수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긍정할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악행들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 <아저씨>
남성영화에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어린 아이들은 바로 이런 위치에 있다. 그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고통을 받거나 부모나 주변의 어른들을 (되도록 자인하게) 잃어버리며 배회해야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남성들이 사용하는 폭력의 가치를 극대화 시키며 긍정하기 위해 아이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허우적대야 했다. 물론, 남성영화에서 무조건적인 구원을 보장받는 약자는 아이로 한정된다. 또 다른 약자로서의 여성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한 채 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그만큼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는 누군가까지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역시 남성들이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통용되는 논리에 한해서 말이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남성영화 속 남성들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성취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성영화 속 남자들은 자신들이 정의라 믿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더 큰 악행을 저지르거나 이전의 껄끄러운 것들을 깨끗이 지우는 것이 익숙하다. <신세계>에서 이자성(이정재)과 정청(황정민)의 사이를 끈끈히 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조직을 지키기 위해 죽어나간 이들은 그저 스펙터클처럼 전시되며, <내부자들>의 안상구(이병헌)가 진실을 폭로하기 위한 준비과정 중 이용되며 사라지는 이들 역시 숱하다. <더 킹>의 박태수가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가능해지며, 영민이 쓰러질 때 <추격자>의 중호가 포주였다는 사실은 잊히는 식이다. 그들이 정의에 가 닿는 것이라고 인식되는 시퀀스는 영화의 후반부에 배치되어 약 10-20분 정도를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만, 이를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칼과 각목과 야구방망이와 피와 절단과 함몰과 정신적 고통이 약자에게 쏟아져 내리는 것을 견뎌야만 한다. 그들이 정의에 가 닿는다고 믿는 선행들이 이처럼 셀 수 없는 이들의 희생을 전제한 것이라면, 이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5. 

이렇게 남성영화들이 한국 영화계를 뒤덮는 사이, ‘여성’ 영화가 주목받은 것은 그들만의 잔치에서 새로운 시야를 틔워주길 바라는 어떤 기대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남성’의 반대급부로서의 ‘여성’을 등장시키면서 오히려 그 방향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모른 채 배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성화’된 여성들을 등장시키거나, 공적영역에서 밀려난 여성들을 더욱 사적 영역에 가두면서 많은 남성영화들 사이에서 여성이 중심에 등장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과’라 이름 붙이기엔 어딘가 아쉬웠다. 

최근 거의 ‘사태’라고까지 지칭할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낳았던 영화 <미옥>은 관객들의 기대와 영화 제작상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여기에 처음 보았던 시나리오와 영화가 다르게 나왔던 배우의 말이 더해지면서 이 영화의 내부와 외부가 어떤 식으로 균열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예상해볼 수 있었고, 그것을 굳이 확인하며 있었을지도 모를 의미를 추적하는 일은 꽤나 굴욕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니까 <미옥>의 전반에 깔려 있던 현정(김혜수)과 웨이(오하늬), 김여사(안소영)의 연대나, 여자를 두고 목숨까지 빼앗아가며 위협하던 김회장(최무성)과 대립하던 상훈(이선균)과 다르게 자신이 짝사랑하던 이가 현정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현정을 구하는 것에 뛰어드는 웨이의 행동들은 굳이 찾아야만 보일 수 있는 흔적으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전면에 배치하지 못하면서 포스터에 <미옥>을 새긴 그 의도는 결국 ‘여성’이 현재 셀링 포인트로 전락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 뿐이다.
 
  
▲ <미옥>
 
몇몇 기사를 읽어보고 나서야 현정이 미용실 원장이기에 그러한 스타일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역시 기사에 기대어서야 현정의 모성이 그리 단순하게 치부될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네 엄마야.”라는 대사와 상황, 이 생경한 분위기는 분명 <미옥>의 모성이 태생적으로 갖추어졌다고 믿는 절절함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음에도 그저 김회장 앞에서 수줍어하는 현정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아들만 살려달라는 대사를 남기는 것으로 그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바로 이러한 방식, 그러니까 여성이 공적영역에 나서기 위해서는 남성 같은 모습을 갖추어야 하거나 혹은 모성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들은 많은 여성 영화에 늘 비슷비슷한 설정으로 작용하며 힘을 뺐다.

<마돈나>(2014)에서 해림(서영희)은 임신한 채 위독한 상태로 병원으로 실려 온 미나(권소현)의 행적을 쫓는다. 그렇게 알게 된 미나의 과거는 상당한 고통들로 채워져 있다. 몸을 팔고, 그 사이 남성들이 좋아하는 ‘서비스’를 익히고, 그 방법으로 살아남다가 결국에는 버림받은 미나에 대한 묘사는 고발이라 하기에는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 큰 설정들로 가득차 있다. 게다가 해림이 미나를 쫓는 것은 이 상황에서도 아이를 지켰던 미나와는 다르게 아이를 트렁크에 넣어 버렸던 자신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성 없음에 대한 죄책감, 혹은 모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강박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흔들리지 않는 축으로 작용한다.(6) 초등학생 딸이 성폭행을 당한 후, 범인을 찾아 복수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리는 <공정사회>(2014)의 그녀(장영남)는 영화 내내 눈물을 그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복수를 행하지만, 이 영화의 영문제목 <AZOOMA>는 그의 복수를 지극히 사적인 자리로 내려놓는다. <여교사>(2017)의 효주(김하늘)가 가졌던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은 재하(이원근)라는 학생에 대한 집착으로 갑작스레 전환되기도 한다. 

이 영화들은 왜 아이에 대한 죄책감 없이 효주가 미나의 삶을 추적할 수는 없는지, 자신의 아이가 겪은 일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치부해 버리는 이들에게서 빨리 벗어나지 않은 채 주저앉아 울고만 있는지, 효주가 생각하는 문제의식이 확대되지 못한 채 여성들끼리의 질투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늘 확대되지 못한 채 모성이나 감성, 투기 정도에 머무른다. 이러한 영화들은 여성들이 공적인 영역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남성적 이데올로기(7) 안에서 규정한 그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며, 사회적 일탈에서 멀어진다.
 
  
▲ <공정사회>
이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예가 남성영화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분위기 메이커나 유머, 즉 웃음이 이 영화들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여성을 내세운 영화들이 스스로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선이 있다고 정해놓은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게 한다. 늘 쾌활한 캐릭터를 배치하여 그들이 세워놓은 권력을 조롱하거나, 사소하게나마 전복을 시도하는 남성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들에는 그 어떤 웃음도 존재할 틈이 없다. 웃음은 그 사회의 강력한 규범을 벗어날 때 가장 폭발적으로 유발되며, 엄격한 규범이 깨질수록 진폭이 커질 수 있음에도, 때문에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규범이 엄격할 때, 그들의 유머는 매우 급진적일 수 있음에도(8) 이 영화들은 자신을 가둔 프레임에 대항할 방법을 찾지 않고 내려앉을 뿐이다.

이 사이 <비밀은 없다>(2016)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연홍(손예진)의 사투리는 그래서 반갑다. <비밀은 없다>는 딸을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를 보여준다. 그러나 연홍의 궤적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을 뒤집고 헤집으며 무너뜨린다. 표준어를 쓰던 연홍은 딸을 찾기 위해 점집에서 옛 친구를 만났을 때, 격앙된 전라도 사투리를 터뜨리고 이후 자신의 사투리를 보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국회에 입성하려는 남편 종찬(김주혁)의 선거구가 경상도라는 것, 지역감정 속에서 자신의 고향을 늘 숨겨야만 했던 것 등과 겹치면서 무수한 의미를 생산해낸다. 선거를 위해 딸이 사라진 사실까지도 숨겨야 한다는 선거판의 논리에 한 방을 먹이는 것도, 그만큼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용감해지는 것도 바로 이 사투리에서 시작된다. 더군다나 딸의 행방을 찾던 중 종찬이 딸의 선생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모든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을 안 연홍의 분노는 정확히 남편을 향한다. 여자들만의 싸움에 머무르지 않은 연홍의 분노는 결국 선거에서 승리한 남편의 섹스 동영상을 공개하며 남편이자 정치인의 민낯을 까발린다.
 
  
▲ <비밀은 없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성들이 힘을 겨루는 곳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정치판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려지면서 딸의 과거를 내거티브 전략으로 사용하고, 딸의 장례식까지도 선거에 필요한 일로 만드는 상대 진영 남성들과 그 사이에서 딸을 생사여부보다 선거에서 지는 것이 괜찮겠냐고 반문하는 남편의 모습은 과연 힘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되묻게 한다. 또한 그의 딸 민진(신지훈)과 그의 친구 미옥(김소희)이 구축한 세계 역시 의미심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저 더 자라야 한다고 강요당하는 두 여고생은 성인 남성들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들은 비밀을 지키고, 서로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결국에는 가장 견고하다고 생각한 남성들의 세계를 무너뜨릴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누구들과는 다르게 조건없이) 서로를 믿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비밀은 없다>는 사적인 영역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 공적영역의 위악을 흥미롭게 그려내면서 사적영역으로 밀려난 이들의 전복적인 힘을 흥미롭게 보여주었다. 위태롭게 쌓아놓은 거대한 세계의 붕괴, 시작이어야 한다.

6.  
 
영화를 영화로 보라는 말은 영화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경로를 굳세게 막아선다. 특히 남성영화에 있어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그러나 남성영화의 장점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 영화들이 현실의 부패를 얼마나 낱낱이 밝히고 있는지를 짚어내고, 그것이 얼마나 시원스럽게 해소됐는지 만약 해소되지 못했다면 역시 그 조차 현실의 폭로인 것은 아닌지 등으로 진단하며 영화 밖의 현실을 들이밀면서, 왜 단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이 영화들이 단지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그림에 머물러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영화에서 선택한 모든 배우, 인물, 장면, 대사, 조명, 음악, 포스터, 홍보문구 등등 스크린 안과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크던 작던 의도를 포함하며, 그것으로 누군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영화가 선택한 의도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의 흥행이 늘 보장된다는 인식과 함께 끊임없이 제작되었고 앞으로도 제작될 이 남성영화들은 ‘남성’이 이 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명확하게 보여주며, 그것의 당위를 전시하고 있다. 종종 왜 그 큰 스크린에서 왜 남성들의 엉덩이를 보고 있어야 하는지(<내부자들>, <아수라>),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저렇게 쉽게 결심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인지(대부분의 남성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과시’라는 이름으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표현에는 그 어떤 상상력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인 묘사와는 다르게 남성영화의 세계는 남성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씌워놓은 교묘한 술책으로 운영된다. 그 술책은 배제이거나 삭제이거나 희생, 심지어는 (남성이 아닌 이들의)자학일 수도 있다. 상상력과 직관을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는 이 영화들은 그래서 위험하다.

남성영화들 속 남성들, 혹은 이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는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며,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끼리 만들어 놓은 그 세계가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며, 범접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는 이제까지 늘어놓은 모든 이유로 의문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들은 실상 매우 단순한 말을, 예의상 할 수 없는 말을 열심히 에둘러 화려하고 멋져보이게 하고는 있지만 그 결과물은 늘 속이 뻔히 보이는 가면 뒤에 있다. 잘 가려지지도 않는 가면 뒤의 정체, 단언했던 허탈함이다.

※ 이 글은 『학산문학』(2017, 봄호)에 실린 「위선(僞善)의 잔치 : 2010년대 ‘남성영화’들의 따분한 돌려 말하기에 대하여」를 수정‧확장한 것이다.

2010년대 남성영화 전반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1) 성(性)을 양분한다는 것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시각 속에 있다. 우리는 흔히 양성(兩性)평등을 주장하지만, 이는 ‘성별분업’이나 ‘성역할’ 등 사회가 지정한 사실상의 차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여성의 역할은 오롯이 남성의 반작용으로만 구성되기 때문이다(정희진, 「편재(遍在)하는 남성성, 편재(偏在)하는 남성성」, 권김현영 외,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 모음, 2011, 19-22면.; 이에 대한 좀 더 진전된 논의는 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권김현영 외,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교양인, 2017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성(性)은 남성영화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性)에 국한된다. 남성영화가 배제하는 성이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나, 좀 더 다양한 성에 대해 논의하지 못하는 것은 오롯이 필자가 논의를 더 깊게 진전시키지 못한 탓이다.

2) 최고위 공무원의 대다수는 남자들인데, 그 이유는 취업과 승진, 노동의 내적 분할과 통제의 체계, 정책 입안과 실질적인 절차, 쾌락을 동원하는 방식들이 그 젠더에 배치되는 실천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R.W.코넬, 안상욱·현민 역, 『남성성/들』, 이매진, 2013, 119면.). 따라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는 공적 영역의 직업군에 남성이 월등히 많을 수밖에 없다.

3) 남자다움은 집단적으로 강요된다. 우리는 성인 남성이 이성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성적인 욕구가 아니라고 판명되면 그의 남자다움을 의심한다. 이것은 남성성의 사회적 기준에 극단적인 이성애 우월주의와 호모포비아가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모포비아와 이성애 우월주의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성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할 때, 그 두려움을 상쇄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토니 포터, 김영진 역, 『맨박스』, 한빛비즈, 2016 참조.

4) 이러한 대의(大義)의 추구가 어떤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진흙, 「해일을 핑계대지 말라, 우리는 조개무덤을 쌓겠다」, 페미디아(http://femidea.com/?p=1243) 참조.

5) R.W.코넬은 집합적인 문화적 이상과 제도적 권력이 도와 한 사회가 믿고 있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구축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는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지배적이거나 종속적인 계급 혹은 종족 집단의 주도적인 남성성 이외의 것을 주변화 시키는 것으로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R.W.코넬, 안상욱·현민 역, 『남성성/들』, 이매진, 2013, 124-132면.

6) <오로라 공주>(2005), <세븐데이즈>(2007), <돈 크라이 마미>(2012), <감기>(2013), 미씽(2016)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7) 남성은 여성과 마찬가지로 성별화된 존재이나, 젠더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으로 간주된다. 이로 인해 현실에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개별 남성들은 별다른 노력없이 가족, 국가, 인류를 대표했고, 때로는 여성에 대한 특권을 갖는다. 정희진, 앞의 글, 32면.

8) 윤보라, 「메갈리아의 ‘거울’이 비추는 몇 가지 질문들」, 윤보라 외, 『그러므로 페미니즘』, 은행나무, 2017, 24면.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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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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