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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수성못’ ㅡ “타자 이해의 전면적인 불가능성, 그 진흙의 수렁 속에서 되레 새로운 공통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하다”

 
 

“서설 : 고난의 보편주의도, 그렇다 해서 소박한 리얼리즘도 아닌”


물속엔 밭은 가래마냥 성기게 엉긴 점액질의 덩어리들이 그득히 부유하고 있다. 허나 곪아 문드러져 자꾸만 이물질을 토해내는 그 속내와는 좀 다르게, 수면에 이는 잔파도는 마치 그 나름의 싱그러움과 생기어린 삶의 동력을 머금기라도 한 것처럼 욜랑욜랑 너울댄다. 만일 한 발 더 멀찍이 물러서서 살피게 된다면, 정말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고요만이 오롯이 시선에 드리우게 될 따름일 테다. 사실과 달리 감지되는 건 다만 ‘무색무취한 평면성’일 뿐이란 뜻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수면아래의 모습을 밀착해서 스케치하는 촉지적인 근경 이미지에서부터, 마침내 수성못 전체를 롱-쇼트로 널찍이 조망하는 데에 가닿기까지, 시야와 시점의 거듭된 자리 옮김을 의식적으로 노출하는 방식을 동원함으로써 그 운을 떼고 있다. 이처럼 낱낱 쇼트를 상당히 긴 호흡으로 가져가는 카메라 시선의 궤적을 좇는 동안에 자연히 떠올리게 되는 건, 차갑고 형태가 주어지지 않은 반물질 자체보단 몸피의 두께를 가진 체벽 안에 뜨거운 혈액을 머금은 인간존재의 문제다. 잠시잠간 움직임이 정지하는 순간마다 피어오르는 상상의 편린들은 마치 인력에 끌리기라도 하듯 시각적인 은유의 질서를 따라서 고스란히 하나로 얽어진다.

  
▲ 수면 아래에서 부유하는 이물질들
  
▲ 꽤나 평온해 보이는 수면 위의 잔물결
 
당연하게도 망그러지고 신음하는 개별 존재들의 속사람은 겉으로 쉽사리 현상되지 않는다. 물결의 파고와 너비를 관측해 그 속사정을 가늠해보는 일이 꽤나 어려운 일이듯, 가령 피부의 발색이라든지 얼굴 표정을 이루는 잔 근육들의 세미한 떨림을 정교히 포착하여 그이의 내면 상태를 추적해보는 것 역시 무척 까다로운 일이 될 터이다. 하지만 그보단 훨씬 더 많은 경우에 문제가 되는 건, 애당초 타자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에 에너지를 할애할 필요 그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대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기 때문, 구태여 무엇인가를 그 위로 더 끼얹지 않더라도 이미 만만치 않은 무게감 속에서 고투하며 살아내고 있는 까닭일 테다. 환언하자면 구태여 타인의 특별함을 고려하고 있을만한 여유가 없는 셈이다. 다분히 아름차단 뜻이다. 그렇기에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는 존재 본연의 특수성을 부정당하고 거세당한 채 ‘남’으로 간단히 소비되고 읽혀진다. 물론 이 누군가 역시 나를 그리고 그 밖의 남은 이들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고유명사를 상실해버린 자들로 충만해진다. 이 세계는 오로지 부패하는 살 냄새를 풍기며 스스로의 멍에를 가까스로 짊어진 채 휘청대는 이들로만 그득한 세계가 된다-.

물론 영화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는 여기까지가 아니다. 만일 ‘수난의 보편주의’라든지, 혹은 여느 사람들 ‘모두가 버스름해지고 나달대는 제 삶의 조각들을 설피게나마 그러모으느라 매우 분주하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 싶었더라면, 그저 오프닝 장면을 간단히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만 막을 내린다 할지라도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부적절한 인식판단은 사실상 영화의 거의 전부를 이루는 남은 영역의 풍부한 존재가치를 망실해버리게 만든다.

조금 더 적확하게 진술한다면 앞선 생각은 기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대략 절반가량에 불과하다. 그렇담 1분 남짓한 도입부를 제외한 나머지 1시간 26분이 그 남은 반절 이상을 위하여 오롯이 바쳐진 것이란 뜻이 될 터이다. 여기에 영화의 대부분이 할애되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 다루는 바가 그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됐다는 말을 덧붙여보는 일도 가능한 작업이리라. 가벼이 스칠만한 것에 구태여 공을 들일 까닭이란 없을 테니 말이다. 도대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있고, 또 어떻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가?

계속해서 비유를 이어가보는 편이 관념적인 말들에 기대는 것보단 되레 도움이 되리라 본다. 설령 속아지가 부패하여 수면아래 유영하고 있는 건 그저 부유물들뿐이라 하더라도, 실상 그 고지랑물의 깊이라든지 바닥면의 구조 혹은 주변지형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오염에 대처할 수 있는 수준과 방법 자체가 달라진다는 사실 역시 도외시할 순 없다. 경우에 따라선 윗물만 좀 갈아준대도 그것이 충분한 마중물의 역할을 다하여 다시금 수중생물들이 몸을 뉘일 만한 환경상태를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만일 수변이 꽤 기름진 토양에 연접해있다면 그곳에 심긴 식물들이 좀 더 빠른 회복을 돕는데 기여하기도 할 터이다. 이와는 반대로, 경우에 따라선 얼마간 애를 써보아도 좀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가령 주변에 매립지가 소재하고 있다거나 혹은 어드메인지도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오폐수가 흘러들고 있는 경우라면, 지독히 발버둥을 친다 한들 점차 바스러져만 가는 삶의 파편들을 움키는 일이란 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존재자들의 삶에 스며든 쓰라림의 규모를 가름하는 격차들은 분명 실재한다고 할 테다. 허다한 변인들이 동시에 간여하고 있는 까닭에 그저 음식의 맵기를 측정하는 스코빌 지수처럼 계량화된 수치로 따져 물을 순 없다 할지라도, 인간사의 맵기를 따져봄직한 차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맨살을 세게 꼬집는 것과 스리슬쩍 애무하는 것의 차이처럼 그건 실존적인 감각의 문제다. 그렇담 혹 영화의 남은 부분이 바로 이 점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그리 말하긴 좀 어렵다. 텍스트는 단순히 ‘무엇이 무엇보다 더 혹은 덜 힘들다는’ 식의 신세한탄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고통의 현상학적 체험에 마치 빌보드 차트마냥 순차적 도식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철저히 지양된다. 마치 고난의 무차별성을 긍정하는 듯한 ‘무식한 보편주의’로의 경사도 문제지만, 반대로 소박한 실재론의 연장선상에서 섣부르게 ‘아픔의 계급화’를 시도하려는 태도 역시 다분히 문제적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영화의 눈길이 머무는 자리는 그 둘 사이에 위치한 어디 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중요한 건 자살이 아니다.”

다소 역설적인 명제일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중요한 건 자살 그 자체가 아니다. 혹 자살이란 자극적인 테마에만 온전히 집중하다보면 자칫 해석의 길을 잃고선 출구 없는 공터 속으로 흘러들게 될 여지마저 있다고 할 테다. 도리어 영화 텍스트 속에서 자살이 갖는 의미란 건, 아무렴 모든 이들이 저마다 다루기 힘든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노라는 영화의 첫 번째 명제를 조금 더 확연히 강조해서 형상화하는 ‘일종의 극화된 표지요소’라고 보는 편이 좀 더 옳을 것이다.

  
▲ 현상적 조건을 통한 구분은 불가능하다1
  
▲ 현상적 조건을 통한 구분은 불가능하다2
 
어느 누구라도 자살의 여지를 잠재적(혹은 지연된 가능조건)으로 머금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영화 그 자신의 살점(장면)이 이를 좀 더 명료하게 증언해준다. 자살방지센터에 드나드는 이들은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다. 겉으로 현상된 모습만으로 이 사람이 혹은 저 사람이 자살을 시도했고 다른 누구는 그렇지 않았으리라는 판단을 내리는 건 실상 불가능하단 뜻이다. 그 어떤 지표라고 해도 저들의 다양한 이력을 한 달음에 꿰뚫고서 낱낱의 삶의 주름진 자락 사이로 틀어박힌 어둠을 능히 끄집어낼 만능의 시험약으로 작용할 순 없다. 만 가지 실험엔 만 가지 시약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 이치인 셈이다.

그렇다면 일관된 공식과 해법을 적용할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든 이해하라는 요구 역시 만만치 않게 어려운 일임 것임은 자명하다. 희정(이세영 분)은 그녀의 약점을 잡은 영목(김현준 분)의 의뢰에 따라 센터를 오가며, 자살을 기도했던 이들의 인터뷰를 녹취하는 일에 매달린다. 하지만 듣는 감각과 이해의 영역 사이엔 좀처럼 메우기 힘겨운 간극이 도사린다. 죽음의 문턱에서 귀환한 이들의 고백을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발가락 사일 후비는 무신경함은 지각과 수용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와 불일치를 선연하게 지시해준다. 이따금 입술에서 내뱉는 욕지기 속에선 그들의 ‘노력 없는’ 삶에 대한 냉소와 평가절하 외에 다른 무엇을 읽어내긴 어렵다.

허나 희정의 볼멘소리를 그저 단지 타인의 삶에 대한 맹목적 폄훼라고 보기도 좀 어렵다. 그 언짢음이란 정확히 말해서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불쾌의 감정이 가닿을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시대상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그건 이 까다로운 부정감정의 존재론적 실체가 사실인즉 그녀 스스로에게서 기원하였음을 여실히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다고 한들 말이다. 구태여 ‘노력’이라는 말에 힘을 주고 있다는 점이 이를 잘 확증해준다. 아르바이트와 학업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하루하루를 아득바득 살아내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살아낸다는 말보단 어쩌면 버텨낸다는 말이 더 타당할 터였다. 기실인즉 언제 무너져 내린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살얼음판과 같은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고 본다면 그리 틀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말로 편입에 성공하면 그래서 서울에서의 삶을 마침내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게 된다면 그녀가 그리도 염원하던 만족은 정녕히 이루어지는 걸까? 내밀한 공백이 그만 메워지고, 찢긴 자국들이 확실하게 봉합될 수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심중에 소망을 품고 단 하루 시험을 치르고자 상경한 그곳에서 ‘졸지에 뺨을 맞고 눈앞에서 강도짓을 당하는’ 비서사적 장면을 구태여 삽입했을 이유란 없을 테다. 영화에서 필연과 개연을 위해 소용되지 않는 장면은 분명 또 다른 소용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한결 옳을 것이다. 예컨대, 부정의 강조 말이다.

  
▲ 녹취록을 들으며 발을 후비는 희정
  
▲ 서울 한가운데서 뺨을 맞고 지갑을 빼앗기다
 
맹목적으로 앞만을 바라보며 맹렬하게 내달리는 욕망의 근저엔 만만치 않은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녀 스스로는 자기를 지탱해내는 동력에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줄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대인기피와 중증의 심리적 불안 증세를 겪는 (어쩜 그래서 불안의 냄새를 좀 더 잘 식별해 낼 수 것일는지도 모른다) 동생 희준(남태준 분)은 ‘왜 불안한가?’라는 요지의 저술이 그녀에게 꼭 필요한 책일 것만 같다고 (실상은 자신의 투사이기도 할 터이다) 권하지만, 희정은 짐짓 귓등으로 흘려들을 뿐이다. 반복하자면 이는 그녀 또한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냉소를 내뱉은 이들과 매한가지로 스멀스멀 존재를 잠식해 들어가는 부정감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그리고 자기의 치열한 노력이란 것마저도 (그들이 택한 자살이라는 처방마냥) 역시나 제 안에서 들끓는 부정감정을 잠재우기 위한 제의의식의 하나임을 스스로가 촉지하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그녀의 분주함이란 게 외견상 적잖이 엉성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에겐 전혀 문제되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설령 자기조차 모를 강박에서 기원했든 어쨌든 간에 지금 자신이 내달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이 중요할 따름인 것이다.

  
▲ 영목의 자살클럽을 훔쳐보는 희정
  
▲ 망자의 자취를 추적하던 영목의 시선
 
요컨대 비단 타자들에게 쉬이 공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온전히 대면하는 것조차도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비끄러매고 틀어막아도 의식의 틈새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흔적들마저 막아낼 순 없는 듯하다. 자살을 시도한 이들을 언짢게 여기던 그녀가 돌연 관음증적 시선으로 영목의 자살클럽을 들여다보는 (심지어 기구를 동원해서까지) 장면이 이 점을 잘 드러낸다. 암만해도 녹취 일을 계속하는 동안 죽음의 냄새 이면에 감추어진 ‘다분히 익숙하고 친숙한 것’의 흔적을 세미하게나마 발견할 수 있었던 까닭이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행동을 달리 정당화하는 해석을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모습은 사실 좀 더 일찍이 영목이 수성못을 더듬으며 망자의 흔적을 좇으려 했던 행동과 정확히 겹쳐지는 지점이라고 할 테다.

바로 그때 죽은 줄만 알았던 박씨가 재등장하게 된 사건은 좀 더 기묘한 상황 속으로 존재자들을 견인해 들인다. 희정은 필시 대낮부터 호숫가에 앉아 근사한 와인을 들이키면서 복수를 명목으로 외국어 참고서를 뒤적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즐기던 건실한 중소기업의 사장 박씨가, 한갓 아내의 외도를 이유로 자살을 택하겠다는 걸 아무렴 이해할 수가 없었을 테다. 하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기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노라고 마음먹은 그녀의 모습’ 그 자체에 있다고 하겠다. 영목과 더불어 자살 예행연습을 마친 박씨가 갑자기 죽을 마음을 철회하겠노라 선언하자, 어느덧 희정은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굉장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자기 안의 어두움과 그의 어두움이 순간적으로 공명하고, 더불어 어쩌면 그의 자살을 통해 모종의 대리해소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는 ‘무의식적인 기대감이 발현’된 것이 아니라면, 좀처럼 설명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지점인 셈이다.

  
▲ 자살을 의도한 사람치곤 여유로운 박씨
  
▲ 박씨의 중도포기를 이해할 수 없는 희정
 
“도돌이표와 변칙연주”

내면을 삭히는 어두움의 실체는 발견하기도 어렵지만 설령 발견해낸다 한들 쉬이 해소할만한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목이 세 번이나 연거푸 같은 일에 매달릴 까닭은 없었을 테다. 물론, 항상 같은 방식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은 없다. 은밀히 영목의 클럽에 가입했던 희준은 동반자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끝내 ‘도를 찾는’ 사람들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에 대한 나름의 이해, 따라서 스스로가 맞이하게 될 씁쓸한 결론에 대한 어렴풋한 청사진 역시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편입준비에 실패한 연후 쓸쓸히 수성못가의 벤치를 찾아 앉은 그녀는 언젠가 영목에게 전해 듣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던 수성못 유령 아저씨의 기타 소리를 듣는다. 그것이 환각인지 아닌지는 사실 중요한 게 (다만 나란히 앉은 박씨가 그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전제해볼 수 있을 테다) 아니다. 허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그녀의 내면에도 이제 자살 충동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는 점일 게다.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것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이제 속아지에 똬리를 튼 음습한 것이 제가 걸칠 만한 다른 옷을 열망하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테다. (그 꿈틀거림의 기세가 한층 더 드세어진 채로 말이다) 사실이 그렇담, 대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일까. 벗어날 길 없는 뫼비우스 분면 위를 반복해서 쳇바퀴 돌 듯 하는 서글픈 존재자들을 건져낼 길이란 건 정녕히 없다는 말인가?

  
▲ 도를 찾는 여인에게 일신을 의탁하는 희준
  
▲ 찍이서 들려오는 기타소리를 듣는 희정
 
“폐허로부터 새로운 윤리에의 요청을”

질문에 답하기 위해 텍스트의 마지막 두 장면을 주의 깊게 다루어 볼 필요가 충분하다고 하겠다. 기중 첫 장면 특별히 ‘합격자 명단에 없다’는 문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다소 긴 호흡의 클로즈업으로 끌어내는 쇼트는 아주 독특한 감각을 환기시킨다. 여기서 정말이지 기묘한 것은 망연자실한 그녀의 얼굴이 조금도 이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확실히 섣부른 감정의 동일시나 신파의 정서로 흐르진 않지만, 충격의 효과라든지 더러 그에 비견할만한 특별한 정동 역시 촉발시키지 않는다는 안온함이 문제적이란 뜻이다. 어째서일까?

  
▲ 모니터를 통해 입시결과를 확인하는 희정
  
▲ 빗줄기만 그득한 희정의 참고서
 
물론 널찍한 화면비와 클로즈업의 겹쳐 쓰기가 전경과 배경의 구분을 모호케 하며 화면의 심도를 일정부분 뭉개버린 탓도 있을 테다. 그러나 어쩌면 그녀의 삶을 들여다본 관객들이 보일법한 자연스런 반응이라고 보는 것 역시 ‘일견’ 옳다고도 말해봄직 하리라. 잠결에 손이 가는대로 엉망이 되어버린 희정의 노트며, 낱낱의 문제 번호위로 푸른 빗줄기가 그치지 않고 흘러내리는 참고서,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지쳐버린 몸과 맘도 문제이겠거니와, 그렇다고 딱히 별다른 공부의 재능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녀가 맞게 될 필연적인 결과라고 정돈해 보면 어떻겠냐는 해설인 셈이다.

  
▲ 망연자실한 마음에 수성못가를 찾은 희정
  
▲ 집으로 들어갈 것을 권면하는 박씨
 
여기서 잠시 논의의 전개를 중지해두고서 남은 한 장면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어느새 못가에 앉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온 박씨는 노파심에 ‘집에 들어가라’고 권한다. 여기에서 대사는 묘한 이질감을 안겨다 주는데, 이는 정작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와서 좀처럼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설령 두 사람 모두가 상실의 아픔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 처지는 같지 않다.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호텔에 기식하며 (때로 자기가 당했던 그대로의 방식으로 복수를 꾀하기도 하며)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그와, 집 안팎 어디에서도 일말의 소망을 찾을 수 없을뿐더러 유일하게 바라보던 안식처마저 공중으로 분해되어버린 그녀의 입장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구태여 의식하고 드러내어 밝히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애석하지만 박씨의 진지한 조언은 희정에겐 그리 위로가 되지 않았을 터이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그 순간 두 사람의 감정선은 정확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좀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사람만 혼령의 기타소리를 들을 수 있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이 같은 해석이 힘을 수 있을 테다) 하지만 이 같은 ‘평행선 그리기’는 정말로 발 딛고 선 삶의 지평과 경계를 엄연하게 달리하는 이들 두 사람만의 문제일까?

다시금 희정이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그 장면으로 돌이켜보자. 어째서 박씨와 달리 보통 사람인 우리는 그녀의 아픔에 공명할 수 없었을까. 반복해서 강조해보자면, 혹 과몰입을 중단시키는 영상기법의 미학 때문에? 혹 아니라면 이미 그녀의 삶의 궤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본 입장에서 너무나도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사실 이런 대답들은 지나치게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단지 표피적으로 그녀의 슬픔에 대해 연대하지 못했느냐고 따져 묻는 게 아니라, 그녀가 충분한 고통 가운데 침전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어째서 그리도 무감각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느냐는 의혹을 던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 주변인의 입장에 서서 어쩌면 전지적인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녀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더라면, 타자에 대한 더 깊은 인식에 가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되레 더 마땅치 않겠는가?

요컨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서두에서 밝힌 것과 같이 존재자들 모두는 나름의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살아낸다. 설사 수치화할 수는 없을지언정 그 쓰라림의 크기나 무게가 다를 수 있다는 것 역시도 분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닮음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심지어는 아주 근사한 수준의 경험지형 속에서 분투하는 존재들이라고 할지라도, 서로는 서로의 싸움이 가진바 의미를 온전하게 헤아릴 수가 없다.

삶의 목표를 가지라고 뇌까리는 젊은 상담사는 그녀가 쉽게 내뱉은 말처럼 ‘자살중독’에 몰린 영목을 이해할 수 없다. 혹 이 점은 백번 양보할 수 있다손 치자. 그렇담 그네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희준을 끝내 붙들 수 없었던 그이의 가족은 또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 고난의 전장에서 허우적대는 그 자신에게도 전투의 이유를 깨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테다. 하지만 비자의적인 무감각함 또는 타자 인식의 전적인 무력함이야말로 도리어 공통의 윤리를 새로이 구축해야 할 필요를 제시하는 출발지가 됨을 놓칠 순 없다. 결국엔 어려움을 극복해낼 이상적인 길을 하나 상상해본다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는 비난을 혹 감내한다면) 그건 아마도 조금 덜 힘든 이가 상대적으로 깊은 수렁 속에 잠긴 이에게 손을 내미는 형세가 될 테다. 손에 손을 그리고 그 손이 다른 손을 향해 내뻗는 환대의 연쇄 작용이 아니라면, 보편적인 그러나 다양한 바림(gradation)의 양상으로 세계 속에 스미어 짜인 어두움의 군락을 축출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타자에 대한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이 모두에게 공통의 조건이 됨을 알린다. 대개 쉽게들 착각하는 것처럼 비슷한 조건과 처지가 확고부동한 연대의 근거와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허위를 산산이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모두는 심각한 불안정조건의 실재를 깊숙이 인지하게 된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야말로 아마도 텍스트가 제기하는 최종적인 물음일 테다. 물론 영화는 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주진 않는다. 그렇다고 예술의 본령은 명료한 대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되레 질문을 던지는 데에 있다는 변명을 구태여 상기할 필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새로운 공통의 윤리를 상상케 하고 또 그 필요를 요청케 하는 신뢰로운 출발지가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기여란 다만 그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밖에 실제로 가능조건을 현실화할 몫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요, 그 무대로서의 시공간은 실존의 현사실적 무대로서의 지금여기라고 할 터이다-.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남병수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이나 에세이 등속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지점에서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에 있다. 이를테면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설정이 삶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더불어서,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구원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호명해낼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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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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