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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새벽의 부조리와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 로이 앤더슨의 ‘인간 3부작’

 
 

공허한 공간과 무감한 인물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 한다며 연신 울어대는 사람이 있다. 아내랑 싸우고 직장에 나가 실수를 거듭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고백을 거절당하고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보험금을 타기 위해 30년간 일궈 온 자기 회사를 불 지른 사람도 있다. 그들과 같은 거리를 걷는 누군가는 30년간 근속한 회사에서 이유 없이 쫓겨났으며, 다른 누군가는 16년 이상 일해서 모은 연금 펀드를 거의 다 날리고는 ‘늙어간다’는 말의 공포를 절감하는 중이다. 호수를 8개나 가진 부유한 퇴역장군은 철장 같은 요양원 침대에 갇혀 있으며 택시를 운전하며 시를 쓰던 청년은 말문을 닫은 채 어느 정신병원 의자에 앉아있다. 장난감을 팔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외판원은 누군가에게 물품대금을 독촉하고, 다른 누군가로부터는 동일한 압박을 받는 중이다. 

그들이 사는 도시의 모든 장소는 회칠한 무덤처럼 톤 다운되어 있다.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얼굴도 흰색으로 분칠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급기야 그들 곁으로 이미 죽은 자들이 나타나 배회하기 시작한다. 산 자는 살아서 슬프고, 죽은 자는 죽어서 안타까운 이 염세적 묵시록의 세계. 자기 운명만큼의 절망에 속수무책인 인간들의 나락. 로이 앤더슨의 ‘인간 3부작’은 삶과 죽음이 진배없는 그 곳에서 시작되어 다시 거기로 돌아간다. 

로이의 영화는 그와 유사한 어떤 작품도 생각하기 어려운 스타일과 작가적 비전으로 충만하다. 이 스웨덴 거장의 영화는 숱한 아버지 예술 중에 회화의 유전자를 가장 섬세하게 물려받았다. 실제로 로이의 인간들은 정교한 구도와 톤으로 구축된 프레임 내에 오브제처럼 배치된다. ‘인간 3부작’의 엄정한 형식들은 자신을 사회주의자이면서 휴머니스트로 소개하는 로이의 세계인식을 담아내는 틀로 봐야 한다. 그의 ‘회화적’ 이미지텔링 과정에서 우린 다른 질료를 갖는 온갖 예술이 실체적으로 일렁이는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로이가 만든 심미적 카오스의 세계는 작금의 세계와 끝내 화해하지 못한 그 자신의 정치적 자의식의 집이다. 안착할 곳을 잃은 예민한 도덕감이 ‘인간다움’의 부재를 고발하는 장소다. 직관적 느낌을 말하면, ‘인간 3부작’ 속 몇몇 장면은 니체나 키에르케고르의 하강하는 문장을 닮았다. 혹은 그 문장들을 등에 짊어진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상기시킨다. 혹자의 지적처럼 에드워드 호퍼가 생각나기도 한다. 로이가 즐겨 쓰는 고독의 프레임과 그 안을 떠다니는 무거운 침묵이 서사보다 강력한 정조(情操)를 이루기 때문이다. 광장을 장악한 부조리와 오래전부터 그에 무감했던 것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느린 움직임은 정성일의 말대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다. 

여기에 더하고 싶은 다른 이름도 있다. 우선 말해야 할 것은 ‘인간 3부작’의 곳곳에 모든 피사체가 정지하다시피 하는 순간, 회화의 느낌을 두른 ‘사진적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들은 지시대상의 모사, 곧 도상적 차원으로 읽히는 ‘실재의 거울’에 그치지 않는다. 지시대상의 코드화 혹은 상징이라고 부를 만한 ‘실재의 변형’으로 온다. 더 나아가 현실의 근원적 자국으로 침전하는 지표의 흔적, 곧 ‘실재의 자국’을 드러낸다.(1) 유비적으로 말하면, 프랭크 쿠너트의 정교한 스튜디오 사진이 겨냥하는 희극화 된 불행의 세계, 풍자적 자조가 돋보이는 그의 미니어처 세계가 읽히기도 한다. 로드리고 일레스카스의 ‘Are you there?’ 시리즈에서 엿보이는 고독과 소외의 깊이가 만져지기도 한다. 이처럼 블랙코미디로 나아가는 로이의 계산된 영상들은 철학적·윤리적 아포리아를 뿜어내는 이미지의 향연이다. 그가 세운 ‘스튜디오 24’는 이 같은 실험적 스타일의 전진기지로 로이를 여타의 작가주의 감독과 구별시킨다. 

그런데 로이의 회화적·사진적 순간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낯선 순간에 돌출되는 시구절, 혹은 시구절과 같은 대사들이다. 여기서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이하 ‘<2층>’)에서 반복적으로 읊어지는 사세르 바예호의 「두 별 사이에서 비틀거리다(Strumble between two stars)」를 언급해도 좋겠다. 사실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된 “자리에 앉은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이라는 구절은 어느 책에 있는 것인지, 심지어 시구절인지에 대한 정보도 없이 자막으로 잠깐 명멸한다. 그리고는 영화 속 대사로 이 구절의 앞뒤 내용이 급작스럽게 튀어나온다. 그 순간에도 아무런 부연설명이 없어서 바예호의 시구절이라는 사실을 놓치기 쉽다. 그런데 그 언어들은 매우 중요하다. 매정한 현실에 패배한 이들을 향한 로이의 불가능한 제스처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사실 로이의 ‘인간 3부작’이 내보인 이미지텔링은 그 불가능한 제스처들의 몽타주다. 

딥 포커스로 제시되는 로이의 깊이감 있는 공간은 기묘한 대비적 효과를 의도한다. 대개 전경에는 나빠져 가는 상황을 돌이킬 수 없어 고통받는 인물이 있다. 그 뒤로는 그의 처절한 상황에 아랑곳 않는 공허의 정서와 이를 대변하는 무감한 다른 인물들이 있다. 지금부터는 전경의 인물들을 무너뜨리고 있는 허무의 기원과 이를 다루는 로이의 스타일을 함께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구한 서사무대를 느린 걸음으로 배회하는 저 혼자 슬픈 군상들, 곧 그저 ‘견디는 중’인 인생들에 특히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들의 인생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질서화 되어 있던 부조리를 함께 언급하기로 한다. 

  
 
갈 곳 잃은 사람과 언어 

로이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죽음을 마주하거나 기다리는 자들이다. 기이하게 반복되는 세트공간은 그들을 붙잡아놓고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을 가르친다. 허무의 기운을 물리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불편해하지 않는다. 간혹 상대의 슬픔에 거리를 두지 못하는 자도 있지만, 별다른 위로의 방안이 없긴 그도 마찬가지다. 죽음만이 ‘갈 곳’이라면,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갈 곳’을 잃은 자들이다.

로이의 잃어버린 ‘갈 곳’을 더듬어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이하 ‘<비둘기>’)에는 장난감 외판원으로 사는 샘과 조나단이 등장한다. 두 사내가 파는 장난감은 정확히 세 가지다. 업계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뱀파이어 이빨’, 장난감계의 고전이라는 ‘웃음 주머니’, 그리고 흡사 고블린처럼 생긴 ‘이가 하나만 남은 남자’ 복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난감들은 그 자체로 부조리한 세계의 무소불위한 힘을 환기시키는 은유적 장치들이다. 

이를테면 ‘뱀파이어 이빨’은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고 죽음을 전염시키는 수단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서사적 관습에 따르면, 뱀파이어가 된 자는 그 피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이는 이 ‘뱀파이어 이빨’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 적응된 우리 각자의 생활  양식을 희화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유대를 파괴하는 이기심이 용인되는 구조를 고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바꿔 말해  로이가 ‘뱀파이어 이빨’을 통해 냉소하려 한 것은 착취가 당연한 습관이 되는 현실이다. 더 큰 착취가 가능한 지위를 향한 경쟁이 성공에의 태도로 격려 받는 세계다. 그렇다면 과장된 웃음소리를 반복 재생하는 ‘웃음 주머니’는 이런 세계에서 진정한 즐거움이 가당키나 하냐는 반문을 드러낸다. ‘이가 하나만 남은 남자’ 복면은 서로를 향한 경악할 만한 폭력을 습관으로 하는 우리의 앙상한 자화상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갈 곳’ 잃은 사람들의 면면을 이미 요약적으로 언급했지만 ‘인간 3부작’의 첫 작품인 <2층>으로 그 비극의 내막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30년 근속한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부당하게 잘린 남자 라세가 나온다. 그에게 회사는 자기 정체성의 근간이자 인생의 전부였다. 그는 회사에서 쫓겨난 게 아니라, 그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던 인생에서 방출된 것이다. 위험한 마술을 오랜 세월 해 온 것으로 보이는 마술사는 통 안에 들어간 사내의 배에 상처를 입힌다. 단순한 실수일지 모르지만, 이제 그는 그의 인생이었던 무대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간절히 만나야 할 사람을 찾던 이민자는 도로 위에서 별 이유없이 집단폭행을 당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이 거기 어디 있는지의 문제보다도 이제 그곳을 버티는 게 우선이 되었다. 

이 이상한 일련의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후, 거리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교통체증이 발생하고 시민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이제 운전대를 잡은 이는 꽉 막힌 도로 위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뒤차에 밀리는 속도로 앞차를 밀며 그 대오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손에 든 채찍으로 앞사람을 후려치면서, 또 뒷사람으로부터는 똑같은 방식으로 채찍을 얻어맞으며 그저 고통스럽게 걸을 뿐이다. 

이 기묘한 비극의 풍경 한복판에 칼이라는 사내가 있다. 그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30년을 키워 온 가구회사를 스스로 불태운 자다. 잿더미를 뒤집어쓴 그가 토로하는 슬픔은 불탄 회사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멀쩡하게 택시운전을 하며 살던 첫째 아들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말문을 닫아버리고는 정신병원에 가 있다. 그처럼 평온했던 일상을 잃어버린 후, 칼은 ‘갈 곳’이라고 믿었던 거짓 세계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와 마주한 비즈니스맨의 대사를 통해 말하면, 그는 “뭔가 사들여서 끝자리에 ‘0’ 하나 더 붙여 파는 인생”에 복무해 왔던 것이다. 그런 대사가 회화적 장면의 의미를 중층화하는 어떤 순간에 우린 인물들의 ‘갈 곳’이 그들의 가던 곳과 반대편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인간 3부작’의 두 번째 작품 <유, 더 리빙> 속에도 ‘갈 곳’을 이미 잃어버린 인물들이 단속적으로 등장한다.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는 인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중엔 안나라는 젊은 여자가 있다. 매번 청자켓과 청바지 차림에 핑크색 장화를 신고 등장하는 그녀는 ‘블랙데블’이라는 밴드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미케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음악을 매개로 한 낭만적 사랑의 가능성은 연기처럼 흩어져 버린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안나는 사라진 미케를 찾아다니다가 흠뻑 젖게 된다. 그제서야 그녀가 입었던 옷이 희망의 밝은 블루가 아니라 깊은 우울이 축축하게 묻어나는 블루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핑크색 장화는 마음 안팎이 모두 젖은 그녀를 보호해주지도, 구원해주지도 못한다. 

한편 로이의 ‘인간 3부작’에서는 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갈 곳 잃은 언어들이 세계의 허무와 악수하는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다른 상황, 같은 인물에게서 반복되는 대사는 갈 곳 잃은 사람들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촉감시킨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2층>에서 반복되는 대사 중에는 사세르 바예호의 시구절인 “자리에 앉은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이 있다. 이 시의 문맥은 영화 속 인물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으로 통한다.  

“평범한 양반들 귀가 사랑받기를,/자리에 앉은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모르는 저 분과 그 분인이 사랑받기를/소매, 목, 눈이 있는 우리 이웃이 사랑받기를!//빈대 있는 저 양반 사랑받기를,/비오는 날 찢어진 신발을 신고 가는 이,/초 두 개로 빵 한 조각만 한 시신을 지키는 이,/문에 손가락 하나가 낀 이,/생일이 없는 이,/화재로 그림자를 잃어버린 이,/앵무새를 닮은 짐승,/사람 같은 짐승, 가난한 부자,/정말 불행한 이, 가난한 가난뱅이.//배가 고프거나/목이 마른 이들 사랑받기를,”(2)

그러나 이 공감의 시구절과 냉정한 표정을 바꾸지 않는 로이의 서사무대는 완벽하게 불화한다.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고 같이 근무하는 부부는 항상 같은 레퍼토리로 갈등한다. 이혼을 각오한 듯한 남편에게 아내는 “언제 할 건데? 적어도 대답은 해줄 수 있잖아?”라고 물으며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그녀는 예정된 미래에 희생당한 오늘‘들’을 오래 견뎌온 여자다. 첫째 아들을 만나러 정신병원에 들를 때마다 칼은 “안녕, 한 마디를 못하니?”라고 쏘아 붙인다. 그 대사가 계속 반복되다보니, 우리는 첫째 아들 토마스의 침묵에서 어떤 항변의 제스처를 느끼게 된다. 칼이 몸담고 있는 세계를 향해 언어를 닫음으로써 토마스는 침묵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침묵이 저항을 웅변하는 태도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세사르 바예호의 시구절은 정신병원 의자에 앉은 토마스를 두고 그의 동생의 목소리로 읊어진다. 그렇게 로이는 혁명적 사상에 사로잡혀 시처럼 살다간 세사르 바예호의 언어를 토마스의 침묵에 새겨 넣는다. 이로써 토마스의 슬픈 침묵은 로이가 선물한 시의 육체에 힘입어 우리의 잃어버린 ‘갈 곳’을 환기시킨다. 제목에 박힌 의뭉스러운 구절, ‘2층의 노래’의 진의를 상상하게 한다. 이로써 토마스는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대사, 부조리한 세계가 구성원을 회유하는 대사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야”에 끝내 굴복하지 않는다. 

<유 더 리빙>에서도 특정한 대사가 반복되는 바, 항상 울분에 찬 표정으로 등장하는 여자의 “아무도 이해 못해”라는 외침을 우선 언급하고자 한다. 이 불평은 가식과 위선의 세계에서 이기적인 섬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공격처럼 느껴진다. 문장의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말은 소통에의 포기 선언이다. 이 대사의 주인인 여자는 매사, 모두를 향해 불만이다. 술이 없으면 음식을 먹지 못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 그런데 이 여자의 불만이 다른 사연의 롱테이크씬들 틈에서 반복되면서, 그녀의 언어는 광장을 향한 언어로 비약하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책임관계를 타고 흘러 다니는 부조리를 두고, 살아서는 그것을 물리칠 수 없다는 깊은 회의가 그 말에 있다. 

이 영화에서 타자에 대한 진심어린 연민과 위로가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은 장례식 씬뿐이다. 화면 한복판에 죽은 이의 관이 있고 꽃을 든 문상객들은 지상을 등진 자에게 다가가 각자의 꽃을 내려놓는다. 그때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슬픔과 질병, 고통이 없는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이 완전한 합일의 찰나, 곧 평화에 대한 염원으로 하나 되는 순간은 곧바로 비극의 현실을 날카롭게 찌른다. 살아서는 그런 위로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그 평화로운 노래 배면에 들러붙기 때문이다.

이러한 블랙 코미디는 ‘인간 3부작’ 전체를 관류하는 로이의 영화적 화법이다. <유, 더 리빙>은 매우 낯선 환상이나 꿈 장면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 갈 곳 잃은 사람들의 갈 곳 잃은 언어를 마주하게 한다. 예컨대 <유, 더 리빙>에는 허구적 캐릭터로 기능하는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거는 순간들이 있다. “어젯밤 꿈을 꿨어요”라는 반복적인 대사와 함께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읊어지는 꿈 내용은 공포스러운 환상이거나 환희에 찬 환상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조적 내용을 무색케 할 만큼 두 종류의 꿈은 절망을 품은 블랙 코미디로 귀결된다. 전자의 경우 경악스러운 현실을 더욱 과장적으로 은유함으로써 절망이 되고, 후자의 꿈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희망의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펼쳐보임으로써 결국 앙상한 현실을 체감시킨다. 그러니까 “어젯밤 꿈을 꿨어요”라는 대사로 시작되는 꿈과 환상은 우리에게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는 표지가 된다.  

<유, 더 리빙>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대사 “마지막 주문 받습니다. 마지막이요”는 느즈막한 시간 레스토랑과 술집에 모인 사람들을 카운터 앞으로 결집시킨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후경에 두고 전경으로 걸어 나오는 인물은 유난히 외로워 보인다. 길들여지지 않은 자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그 세계에서 전경의 인물은 사적인 고통을 토로한다. 들어주는 이 없어 가 닿을 곳도 없는 그의 언어도 길을 찾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비둘기>는 자막을 통해 우리를 세 종류의 죽음과 조우하게 한다. 반복되는 대사 속에서 ‘갈 곳’을 잃은 언어를 말하기 전에 이 죽음들을 성찰하는 건 중요하다. 첫 번째 죽음은 전경의 사내가 술병의 코르크 마개를 따다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쓰러지면서 도착한다. 방문 저 너머 부엌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만의 부엌에서 음악에 취해 건너 방에서 벌어진 남편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근원적인 고독과 싸우며 결국 섬처럼 살다 가는 인간의 초상이 거기 있다. 

두 번째 죽음은 죽을 날이 가까이 닥친 늙은 노모의 병상에서 시작된다. 지긋한 나이의 세 남매에 둘러싸인 노모의 육체는 그녀가 죽어가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핸드백이 들려있다. 살아있는 동안 모은 온갖 귀금속, 보석류, 그리고 돈이 그 안에 있다. 아들들이 그건 천국에 가져갈 수 없다면서 핸드백을 떼놓으려 하지만, 핸드백을 붙든 손만큼은 초인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다. 침대가 움직일 정도로 핸드백을 잡아당겨 보지만, 노모의 물질적 욕망을 부축하는 악력을 아무도 이길 수가 없다. 결국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자식도, 거룩한 천국의 소망도 핸드백 앞에서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마는 남루한 현실이다.  

세 번째 죽음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벌어진다. 전경에는 쓰러진 사내와 응급처치를 하는 사람이 있다. 후경에는 자기 테이블에 앉거나 둘러서서 이 광경을 무감하게 지켜보는 여러 인물들이 있다. 얼마 후 쓰러진 사내가 완전히 죽었다는 정보가 공유된다. 이때 죽은 사내가 이미 값을 치른 새우 샌드위치와 맥주를 공짜로 나눠주겠다는 레스토랑 종업원의 목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그때 죽음을 무표정하게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 사내가 카운터에 다가와 그 맥주를 집어간다. 타인의 죽음을 멀찌감치 지켜만 보던 이들도 공짜 맥주는 구경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끼어드는 왈츠풍의 발랄한 음악은 이 블랙코미디의 상황을 냉소하게 한다. 

이후 <비둘기>는 바로 이 씁쓸한 죽음들의 의미를 연장하는 롱테이크 씬들로 이어진다.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윤리적인 연대가 가능한 세계는 그곳에 없다. 이 ‘불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흥미로운 씬이 있다. 부모들까지 초대된 아이들의 학예회장에서 빌마라는 숫기없는 소녀가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사회를 보는 선생님에게 시낭독을 준비했다고 말하며 혼자 쓴 시의 내용을 들려준다. 한 비둘기가 나뭇가지에 쉬면서 돈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다가 둥지로 날아간다는 시. 영화의 제목이 된 이 시 내용은 순수한 아이들의 장기자랑 풍경과 완전히 어긋난다. 이 웃자란 아이의 마음에 엎질러진 기성사회의 비참한 풍경은 우리를 찔러오는 <비둘기>의 냉소적 시선과 결부된다. 

<비둘기>에서 반복되는 대사 중에는 장난감 외판원의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고 싶어요”라는 문장이 있다. 무표정 위에 분칠을 하고 배경의 정물처럼 시간을 견디는 군상들을 떠올릴 때 이 대사는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비둘기>가 포착한 도시의 풍경을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으로 비유할 때, 그 대사는 불가능한 시도처럼 느껴진다. ‘뱀파이어 이빨’과 ‘이가 하나만 남은 남자’ 복면을 반복적으로 쓰고 벗는 그 외판원은 조울증 상태에 처해 있기도 하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 반복적으로 튀어나오는 “잘 지내다니 다행이야”라는 말은 아이러니의 정점을 이룬다.  우리는 <비둘기>를 보는 중에 아무도 잘 지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둘기>에는 ‘다행’스러운 사연들이 거의 실체화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다행’으로 비치기 위한 행위들, 즉 잘 지내는 상황을 흉내 내는 표정과 제스처, 언어가 간혹 있을 뿐이다. 이러한 비극적 세계인식은 로이가 20여년에 걸쳐 만든 ‘인간 3부작’을 면면히 흐른다. 그래서 <비둘기>에 몇 번 등장하는 자동응답기의 음성 “새 메시지가 없습니다” 는 로이가 써내려간 염세적 묵시록의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염세를 가두는 엄정한 형식들

로이가 만든 염세적 분위기의 세계는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다. 대사를 주고받는 타이밍이나 인물들이 프레임 안을 나고 드는 방식 등도 약속된 패턴에 따라 계산적으로 진행된다. 시나리오도 없이, 정교한 스케줄도 없이, 지인이나 지인들의 친구와 함께 띄엄띄엄 찍은 영화가 이러한 정합성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그는 영화작업 과정을 즐기면서 한 씬, 한 씬의 완결성을 중시하는 감독이다. 쫓기듯 영화를 만들지 않기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따라 개별 씬을 완성하는 동안, 한 시절의 상념과 감정이 돌출적으로 끼어들기도 한다. 그래서 수년에 걸쳐 촬영된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로이처럼 그의 영상들도 이런저런 생각들에 치이며 수년을 살아왔다고 느끼게 된다. 그럼에도 다시 말해지만, 로이는 확실한 자기 스타일과 엄정한 작가적 비전을 일관성있게 보여주는 감독이다. 단속적인 씬들을 연결시켜가는 방안에 대해서도 확실한 안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에게는 배우의 훈련 정도도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연장선에서 ‘인간 3부작’의 일관된 스타일을 자세히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공간을 채우는 공허의 정서, 허무의 기원을 생각하게 하는 인물과 세계, 인물과 인물의 대비적 효과, ‘견디는 중’으로서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영화적 호흡 등이 모두 그 엄정한 형식적 틀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재차 말하면 로이의 영화는 회화적·사진적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프레임을 이용한다. 폐쇄된 실내 장면들이 유독 많은데 그때마다 일정한 격자구조, 곧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인물들은 대게 작은 창이나 문을 가진 방이나 사무실, 술집 안에 정물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머문다. 창이나 문은 바깥과의 소통 가능성을 공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유, 더 리빙>을 보면 정갈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갤러리 안의 남녀는 거대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깥의 노동자와 마주보고 있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는데, 그때마다 노동자는 손가락이 지시한 곳에 묻은 유리창 얼룩을 닦아낸다. 추측컨대 그들은 일정한 임금 계약관계에 놓여 있을 것이다. 로이는 그 창문을 사이에 둔 채, 인간적 소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현실의 관습을 묘사한다. 언어도 불필요하다. 단지 권리와 책임에 따른 태도들만 잘 교환된다면 세계는 안전할 것이다.  

로이는 광각렌즈를 활용하여 공간의 깊이와 너비를 충분히 확보하려 한다. 다소 과장된 원근감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전경의 인물과 후경의 인물군상을 명확히 대조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소실점을 활용한 질서정연한 구도는 공간에 스미는 공허감을 충분히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보인다. 거의 고정된 카메라는 우리를 관찰자로 포지셔닝하면서 롱테이크 씬의 의미와 정서를 십분 성찰하게 한다. 한편 거의 모든 씬이 평균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위치, 즉 다소 하이앵글로 포착한 풍경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브제처럼 등장하는 인물을 왜소하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에게 관조자의 시선을 선물한다. 이러한 형식들이 맞물리는 자리에서 로이의 인물들은 더더욱 음험한 세계에 압착당하고, 허공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평균적으로 로이는 50여개의 씬으로 한 영화를 끝내는데 음악과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매칭시키는 장면보다도 언밸런스하게 결속시키는 경우가 훨씬 잦다. 이는 블랙코미디의 정서, 냉소적 희화화의 순간을 각별하게 전하려는 의도로 통한다. 그렇게 자기완결성을 갖는 씬들은 이격감을 숨기지 않은 채 불균질하게 연결된다. 또한 그는 뮤지컬 씬을 즐겨 쓰는데, 그들 씬은 문제적 사태에 대한 봉합이라기보다는 문제적 사태를 더욱 낯설게 마주하게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비둘기>에는 난청에 시달리는 노인이 늦은 밤 바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씬이 나온다. 그는 이 바의 60년 이상 단골이다. 후경에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다. 그때 종업원이 전경에 위치한 노인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대화를 시도한다. 이때 중경에 위치한 손님 중 한 명이 온갖 헛소리 안 들으니 노인은 좋겠다고 말한다. 

뮤지컬 씬은 바로 그 다음 씬에 등장한다. ‘1943년’이라는 자막과 함께 그 바의 과거 모습이 동일한 구도에서 가시화된다. 이러한 현실적 맥락에 근거한 플래시백은 ‘인간 3부작’에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앞 씬의 난청 노인일지도 모르는 한 사내가 전경에 앉아있다. 그때 바의 주인 여자 로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의 멜로디는 기독교 찬송가로 익숙한 「Battle Hymn of the Republic」(국내 찬송가에서는 388장 “마귀들과 싸울지라”)이다. 이 노래는 원래 공화국 전투송가로 남북전쟁 때 전투의 열정을 종교적으로 고취시킬 목적으로 불리기도 했다. 바를 운영하는 로타는 이 노래 가사를 “술 한 잔이 단돈 1실링. 예테보리의 ‘절름발이 로타’ 바에선”으로 바꿔 부른다. 전경의 사내는 흐뭇한 웃음으로 이 노래와 맥주와 바의 분위기를 즐긴다. 그때 후경에 있던 사내들이 로타의 노래를 그대로 받아 개사한 후 “한 푼도 없는 우리는 어떻게 돈을 대신 할까요. 예테보리의 ‘절름발이 로타’ 바에선”으로 바꾼다. 다시 로타는 “돈이 없으면 키스로 대신하면 돼요. 예테보리의 ‘절름발이 로타’ 바에선”으로 응답한다. 그러자 바 안에 있는 사내들은 모두 줄지어 서 절름발이 로타를 차례로 안아주며 “키스로 술값을 대신할 수 있네. 예테보리의 ‘절름발이 로타’ 바에선”이란 가사로 답가를 한다. 

이 뮤지컬 씬은 삭막한 정적이 흐르는 앞 씬과 명백하게 대비된다. 유럽 전역이 전쟁의 광풍에 휩싸여 있던 1943년의 상황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바 안의 정경은 ‘인간다움’ 그 자체에 대한 묘사인지도 모른다. 로이는 무소불위의 교환가치를 과시하며 ‘인간다움’을 좀 먹는 실체로 돈을 묘사해 왔다. 그래서 흐뭇한 웃음으로 노래를 즐기던 1943년의 사내가 수십 년이 흘러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난청 노인이 되었다는 설정, 그런 그가 아직도 그 바를 떠나지 못했다는 설정을 함부로 간과해선 안 된다. 난청 노인은 돈에 무너지지 않는 ‘인간다움’에 대한 향수를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오브제인 것이다. 그와 아울러 우리는 그 노인의 무거운 침묵을 헤아리며 작금의 현실이 언제부터, 어디로부터 무너진 결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비둘기>에서도 죽은 자가 되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그들 중에는 스웨덴 역사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며 무수한 전쟁을 치렀던 칼 12세와 그의 군대도 있다. 전쟁터로 가기 전, 허름한 술집에 들른 칼 12세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우스꽝스러운 지시를 한다. 이때 술집 바깥 후경으로 지나던 군대가 앞에서 언급한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을 행진가로 활용해 부른다. 이처럼 로이는 동일한 음악을 계산된 타이밍에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서 특별한 정조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동일한 음악이 낯설게 사용되는 그 순간,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또 다른 최종심급으로서 ‘권력’을 성찰하게 된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착취와 계급화를 조장하는 또 다른 팩터다. 칼 12세가 등장하는 두 번째 씬에서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같은 술집에 이른다. 술집 바깥으로는 눈이 멀고 발이 잘린 패잔병들이 비틀대며 지나간다. 비현실·초현실로 다가오는 그 장면으로부터 우리는 이 세계에서 퇴각시켜야 할 대상을 더 명징하게 목도하게 된다.  

  
 
믿음, 실낱같은

다시 한 번 상기해보면, <2층>의 절망적 분위기는 기괴한 교통체증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험이 시민들에게 고조되면서 형성된다. 이때 도시의 위정자들은 충격적인 일을 실천한다. 먼저 그들은 안나(<유, 더 리빙>의 안나와 이름이 같다)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에게 이룰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리고는 “개미는 코끼리를 잡아먹을 수 없단다”와 같은 당위적 멘트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종교인, 정치인 등 그 도시의 위정자들은 소녀의 눈을 두건으로 가린 후 그녀를 낭떠러지로 인도한다. 심지어 엄마, 아빠로 보이는 이들이 소녀를 위정자들에게 인계한다. 소녀가 낭떠러지 끝에 서자 한 여자가 대표로 나가 소녀를 등 뒤에서 밀어버린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곳을 가득 메운 위정자들은 곧이어 울려 퍼지는 성가 앞에 단정하게 정렬한다. 

이 기괴한 집단폭력의 메커니즘은 유약한 희생양을 향해 ‘폭력적 만장일치(unaninité violente)’를 이룸으로써 공동체의 희생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으로 읽힌다.(3) 이 실천은 외관상 르네 지라르가 말한 희생제의의 형식을 따르는 것이다. 응당 자기 자신을 향해야 할 폭력이 있는데, 희생양을 세워 제의적으로 폭력의 방향을 틀어버리는 이 절차에 대해서는 더 언급이 필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법제도가 존재하고 그리하여 합법화된 국가적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계에서 그런 비의적인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 로이는 이 도시가 원시공동체로 퇴행한 것을 공지하면서 사회안전망의 합리적인 작동이 마비된 세기말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미래를 가진 이들의 삶을 앗아가는 이 문제적 장면. 로이가 가진 정치적 자의식의 기저에 놓인 분노는 이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실체화될 것이다.  

이제 <2층>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곧 엔딩 씬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 장면은 ‘인간 3부작’을 통틀어 단연 백미라고 생각된다. 우페라는 이름의 사내가 차에 실린 십자가상을 차례차례 던져버린다. 우린 영화 중반 ‘엑스포 2000’ 부스에서 예수의 십자가상이 돈이 된다는 사람들을 마주한 적 있다. 예수의 2000번째 생일의 의미를 상품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페가 무수히 많은 십자가상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칠 때, 우린 그 비즈니스 셈법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어리석은 아이디어”였고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불평하면서도 “난 끝자리에 ‘O’ 몇 개를 더 붙여서 팔 수 있는 것을 찾아내고야 말거야”라고 말한다. 

우페 곁에서 돈 때문에 자기 회사를 불지른 칼도 팔려고 구입한 십자가상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이때 저 지평선 끝에서 전경의 칼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던 이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씬이 시작될 때부터 칼이 있는 전경으로 서서히 육박해왔던 죽음. 그들의 면면을 소개하면 이렇다. 먼저 죽을 때 자기 목에 걸렸던 목줄을 달고 있는 청년이 있다. 영화 중반에 등장한 바 있는 그는 러시아에서 여동생과 함께 독일군에게 목매달려 죽었다. 그는 여동생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 있었는데 그녀가 죽기 전 사과할 기회를 잡지 못해 칼에게 처음 나타난다. 그 옆에서 칼에게 걸어오는 또 다른 죽은 자는 스벤이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내로 살아있던 당시 칼에게 많은 돈을 빌려준 적 있다. 영화 중반, 스벤을 맞닥뜨린 칼은 그가 자살했을 때 채무에 관한 서류도 남아있지 않아서 해방감을 느꼈었다고 정직하게 고백한 바 있다. 그들 앞에 선 또 다른 죽은 자는 흰옷을 입은 흰 두건 소녀다. 그렇다. 그녀는 도시의 위정자들에 의해 두 눈을 가리운 채 낭떠러지에서 죽임을 당한 바로 그 희생양이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칼은 빈 깡통을 던지며 외친다. “내가 어떡했으면 좋겠어? 과거는 잊어버려.”, “내 입장에서도 생각해줘.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러자 흰 두건 소녀만 제외하고 나머지 죽은 자들이 뒷걸음치며 달아나려 한다. 그때 빈 들판에 숨어있던 사람들(산 자 인지, 죽은 자인지도 불분명한)이 일어나 그들과 함께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흰 두건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칼을 향해 제 속도의 걸음을 유지한다. 그러자 다른 죽은 자들과 들판에 있던 사람들도 칼을 향해 다시 육박해 온다. 이 경악스러운 긴장의 순간에 칼이 자조 섞인 탄식을 쏟아낸다. “한 인간에게 뭘 기대해? 식탁 위에 올라갈 음식 약간 마련하기 위해 싸울 뿐이야. 그리고 인생을 즐기려고 할 뿐이야.” 

이 대사가 우리를 다녀갈 무렵 우리는 놀라운 영화체험을 하게 된다. 죽은 자를 돌아보던 칼이 갑자기 몸을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전경에는 카메라 너머의 우리를 응시하는 칼이 있고, 중경에는 흰 두건 소녀가 있으며, 후경에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구별 안 되는 인간 군상들이 떼 지어 있다. 사적인 상념을 밝히면, 그 약간의 침묵 속에서 말문을 닫은 칼의 큰아들 토마스가 생각났다. 토마스의 침묵에 흥건한 ‘시적인 것’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칼의 처진 어깨는 그 ‘시적인 것’을 던졌다. 이 체험은 우리에게 어떤 입장을 요청한다. 로이가 가진 어떤 믿음, 어쩌면 ‘혁명을 향한 잠재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때 <2층>의 정조는 마르크스의 아름답기까지 한 예언자적 비탄과 맞닿는다. “확고하게 정립돼 있는 것들은 모두 허공으로 사라져버리고, 신성한 것들은 모두 더럽혀지며, 인간들은 마침내 냉철한 판단으로 자신의 현실적인 삶의 조건들과 인류와 자신의 관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4)의 심미적 실현. 그리하여 우리는 로이의 작가적 태도를 집약하는 그 표현, 곧 ‘혁명을 향한 잠재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특히 ‘실낱같은’이라는 수식어는 로이의 내면을 장악한 허무의 기원을 짐작케 한다. 돌이켜 보면 <2층>에는 “우리가 기댈 건 희망뿐입니다”라는 낙관적 대사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근엄하게 회의를 하던 신사들이 회의실을 먼저 빠져나가기 위해 아우성을 친다. 길 건너 집이 움직이는 광경(관객은 그 광경을 볼 수 없다)에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는 동안 안쪽으로 열어야 하는 문은 한동안 열리지 못한다. 

그런데 <유, 더 리빙>에서는 ‘집이 움직이는 광경’이 직접적으로 시각화된다. 떠나간 미케를 잊지 못한 안나가 꾼 꿈 속 장면이다. 기차처럼 움직이는 집 안에서 안나와 미케는 안락한 환희에 도달한다. 안나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고 미케는 그녀를 위해 노래를 연주한다. 집 밖에 둘러선 군중들은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며 희망에 찬 언어들을 쏟아낸다. 얼마 후 기차처럼 잠시 정차되었던 집이 그곳을 빠져나가자마자 씬이 바뀐다. 이제 안나는 술집 안에 서 있다.무심한 후경의 사람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서 처량하게 혼자 서 있다. 안나의 내면을 장악한 우울을 뿜어내는 청자켓과 청바지 아래로 그녀가 신은 핑크색 장화는 여전하다. 그 장화를 두고도 ‘실낱같다’는 표현은 매우 적확해 보인다. 

<비둘기>의 오프닝씬에는 자연사 박물관 내에서 박제화 된 새들과 공룡 뼈 등을 구경하는 남자와 그를 지켜보는 여자가 나온다. 살아있는 것 같은 죽음이 거기 있고, 감정없이 그 죽음 사이를 걷는 인간이 있으며, 죽음과 남자 곁에서 무료해 보이는 이웃이 있다. 이 한 씬으로도 우리가 처해 있는 생득적 현실에 대한 로이의 은유를 읽을 수 있다. 이 절망적 부조리의 순간과 반대되는 장면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보는 이에 따라 <유, 더 리빙>의 마지막 장면을 그에 근접한 장면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 위로 정체 모를 거대한 비행기가 떼 지어 날아가는 풍경이 거기 있다. 이 풍경은 시각적으로 그로테스크하고 의미적으로는 양가성을 갖는다. 시민들은 창문에 기대어 있다가, 또 잔디밭에서 뛰놀다가 그 광경을 올려다본다. 이 장면을 굳이 희망을 향한 염원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오늘은 ‘실낱같은’ 믿음에 매달린 채 로이의 휴머니즘과 연결되는 잠언 하나를 취하고자 한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으라.”(5)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1) Philippe Dubois, 이경률 역, 『사진적 행위』, 사진마실, 2005, pp.26-27 참고.
(2) 국내 번역된 세사르 바예호의 시선집에 다르면 시제목이 「두 별 사이에서 부딪치다」로 번역되어 있고  “자리에 앉은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은 “앉아있는 이들이 사랑받기를”로 기술되어 있다. 나머지 인용구절은 번역 출간된 시선집을 따른다. 세사르 바예호, 고혜선 역, 「두 별 사이에서 부딪치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다산북스, 2017, pp.220-221.
(3) René Girard, 김진식·박무호 역,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12, p.125.
(4) Karl Marx, Friedrich Engels, 권혁 역, 『공산당 선언』, 돋을새김, 2010, p.34.
(5)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입』, 문학과지성사, 1995, p.113.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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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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