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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 정주와 여행, 그 어느 편도 될 수 없는 <소공녀>의 존재양식, 그리고 우리의 실존에 대한 물음.

 
 
“불가지한 것의 불가능한 현전”

쉬이 납득되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건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을 머금고 있다기보다는, 차라리 스크린 앞에 마주선 관람객의 지각 및 인식 체계 가운데 정합한 이해가능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묘한 감각을 환기시키고 있노라고 보는 편이 한결 옳을 터이다. 좀 더 자세히 번역해볼 수도 있겠다. 도대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으로부터 무엇을 느끼면 된다거나 혹 어떠한 것을 인지하라는 뜻인지조차 좀처럼 가늠할 수가 없는 가운데, 혼연해진 의식의 줄기를 비집고 틈타 모종의 이물감이 스며들어오게 된 형국이라고 말해본다면 아마도 큰 무리가 없으리라. 
   
더하여 이 과잉의 체험은 그저 단회적인 불쾌의 경험 정도로 간단히 포섭되고 갈무리되진 않으려는 듯, 틈만 나면 몸을 떨쳐 제 존재감을 지속적으로 환기시키면서, 나아가선 스스로를 영화의 다른 부분들과 아울러 엮어내고자 적극적으로 몸부림친다. 이로 인해 관객들의 의식지형에 반복적인 간질임이 촉발될 것임은 물론이다. 손쉬운 의미화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계속해서 문제적인 것으로 현출해내길 즐겨한다는 맥락에서, 어쩌면 근일 유행하는 정동이란 말을 빌려와 수식해본다고 한들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다 할 터이다. 그렇담 영화의 서두에서 제 몸을 드러낸 이래로 텍스트체험 면면에 걸쳐 복수적인 어지러움을 야기하는 이 ‘장면의 정체란’ 건 과연 무엇인가? 

  
▲ 흩어져 내리는 쌀알
  
▲ 마침내 한 톨도 남지 않다
 
계속해서 쌀알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중간 중간 패닝이 카메라워크의 매듭요소들로 간여하고 있는 트래블링 쇼트의 연속이 꽤나 긴 호흡을 머금고 전개된다. 그렇지 않아도 창피를 무릅쓰고 구걸하다시피 얻어낸 곡식이 그 낱알 한 점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흩어져 내리기까지 카메라의 지루하고 집요한 움직임은 계속된다. 마치 비밀스런 잠입취재기자의 시선으로 포착하듯 모짝모짝 사그라져가는 쇠락의 동세를 놓치지 않고 끈덕지게 붙들어낸다. 왜, 어째서?

몇 번을 달리 곱씹어본다 해도 이 장면이 플롯진행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순 없다. 뿐만 아니라, 서사의 논리가 아닌 경험의 논리 측면에서 따져본다고 한들, 얼핏 한 눈에 보아도 묵직하기 그지없는 쌀 주머니가 요란스레 제 속아지를 모두 게워내는 동안 아무런 낌새를 차릴 수 없다는 것 역시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렵다. 찰나의 순간이라면 혹 모르겠지만 상당한 시간을 경유하는 동안 시나브로 거든해져가는 손의 감각이라든지 귓전을 간질이는 경쾌한 소리를 전혀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장면이 대단히 특별한 영상미학의 쾌거를 담지해내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장면의 존재지위를 견고하게 지탱해내고도 남음직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나 필연성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고민의 결과를 한 마디로 갈음해본다면 무용성 자체에 방점을 찍어보는 편이 어떨까 싶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무용함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에야 비로소 조금 다른 층위의 의미들이 산출되는 게 가능해진다. 혹 더 과격하게 밀어붙인다면 무용함이야말로 새로운 의미적 차원을 열어젖히는 지평확대의 길로 미덥게 복무할 수 있단 말도 그리 틀리지만은 않을 터이다. 물론 여기에서 새로운 차원이란 것은 명료한 현전의 바깥, 곧 직선적인 시야에 온전히 포획되지 않는 허다한 영역들을 지칭할 따름이지, 영화세계 바깥에 자리한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이질공간을 호명해 들이려는 시도와는 전연 무관하단 점을 기억해둬야만 하겠다. 

요컨대 일견 쓸모없어 보이는 장면을 구태여 영화 속에 삽입해 넣은 것은, 만일 그것이 그저 협소한 가시권역의 수준을 넘어서는 보다 광범한 시야의 국면들 속에서 고찰될 수만 있을진대, 분명 텍스트세계 전반에 걸치기까지 능히 독특한 생기와 리듬감을 부여하는 효과를 산출해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과 기대감에 근거한 기획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 기대감이란 마땅히 텍스트의 조직을 한층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영화의 살점을 이루는 낱낱의 요소들을 찢고 다시금 조합해보려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적절히 충족될 수 있을 만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테다. 따라서 이 의미의 형성발생과정을 추적하기 위해서라면 영화구성의 기본단위인 쇼트들의 사이-공간 또는 쇼트와 쇼트의 행간에까지 가닿으려는 보다 세심한 지형탐사가 요청될 것임은 물론이다. 그 길잡이의 소임을 담당하는 게 자연 비평의 몫이 될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 미소의 하루살이 영수증
 
“시나브로 수렁 속으로”

미소의 비루한 보금자리를 기점으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놓치지 않고 붙들어낼 때 비로소 갈증해소의 실마리를 거머쥐는 것이 가능해질 터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그녀의 가계부를 프레임 가득히 잡아낸다.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문자들이 최우선적으로 지시해주는 것은 그녀의 일일 벌이가 4.5만원이라는 것과, 그 전체의 거의 삼분지 일에 달하는 수준의 금액을 그녀가 위스키 비용으로 스스럼없이 토해내었다는 점, 나아가 심지어는 그 비용이란 것이 그녀가 생존을 위해 주린 배를 채우는 데 들어간 돈의 거의 세 배 가량이나 된다는 점 정도라고 할 테다. 물론 매번 가계부를 쓸 때마다 그 구체적인 세목은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거니와, 그녀에게 가장 주되게 고려되고 있는 지출 항목이 위스키란 점은 아무래도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그 뿐만은 아니다. 위스키와 아울러 장부의 중추신경을 잠식하고 있는 또 하나의 오브제가 존재한다. 담배다. 그녀가 오른 방세를 지불하길 택하는 대신에 새해를 맞아 덩달아 값이 치솟아버린 담배를 취하기로 맘먹는 지점은 다소간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겠다. 집을 버리다니, 미소에게 집 또는 정주의 감각이 안겨다주는 안정감이란 건 정말로 각양 쾌락의 도구들이 제공하는 일회적인 충족감보다도 중하지 않은 까닭일까. 확실히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 외화면 처리된 집주인과의 대화와 바퀴의 움직임
 
아무렴 그리 판단하기란 어려울 터이다. 상황에 한 발 앞서, 그녀가 주인과 월세를 흥정하던 순간을 한 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겠다. 카메라는 두 사람의 만남을 다분히 의식적인 외화면 쇼트를 통해 처리해낸다. 다시 말해 지금여기 우리 앞에서 현존하고 있는 것은 단지 바깥에서 스며오는 대화소리의 사운드뿐이다. 이처럼 시지각적 요소를 일부러 제한하는 것은 청력이라는 단일감각에 오롯이 의식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허나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고작 5만원을 둘러싼 실랑이가 벌어지는 가운데, 시야를 박탈당한 채 오롯이 귀만을 쫑긋 세운 우리의 눈을 별안간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한 톨의 기괴한 움직임이 있다. 마치 고요를 찢어발기는 낙숫물소리가 머금은 힘과도 꼭 같이 이 작은 꿈틀거림은 대단히 강렬한 운동감을 갖는다. 텅 빈 벽면에서 움직이는 바퀴벌레는 이처럼 청각에의 집중을 완전히 흐트러트려놓는 것만 같지만, 동시에 대화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벌충하는 모순적인 입체감의 효과를 낳는다. 단선율의 울림보다는 대위법의 교향을 거친 울림이 보다 더 훌륭한 공명의 에너지를 갖는다는 유비가 아무렴 이에 적절히 들어맞을 성싶다. 

  
▲ 상승이 하강의 이미지로 전도된다
  
▲ 마침내 가닿게 된 밑바닥 사북자리
 
고작 단돈 5만원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미소의 보금자리는 커다란 바퀴가 대놓고 벽면을 기어 다니는 수준 정도의 방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매달 월세를 꼬박꼬박 지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잠시잠간 머무를 것이 허용된 일시적인 체류의 대가로 말이다. 그마저도 정주할 자신의 집은 아니라는 뜻이다. 달리 번역하자면 그 수준의 집마저도 가질 수 없는 게 그녀의 처지라고도 말해볼 수 있으리라.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그녀가 몸을 누이고 안온하게 정주할 수 있는 공간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소가 처한 실제현실이다. 그녀는 이 점을 선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앞으로 상황이 더욱이나 여의치 않아지리란 점 역시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스며드는 외부의 한기를 전연 감당하지 못하는 빙벽 탓에 사랑하는 이와 살갗을 부대끼며 체온으로 서로를 위무할 엄두조차도 낼 수 없는 허름한 방이지만, 그나마도 온전히 유지해내지 못할 만큼 구석을 향하여 시나브로 내몰려가고 있는 것이 미소의 삶이라고 하겠다. 간단없이 몰아쳐 오는 파도의 격랑은 더욱더 거세어질 테고, 따라서 정주할 곳을 가질 수 없는 이의 생이란 날로 더 서글퍼만 간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이 서글픔은 공간감각의 대칭적 대비를 통해서 한층 선명하게 가시화된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산동네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는 ‘상승’의 이미지는 점점 더 처참한 광경으로 내려앉는 ‘하강’ 이미지와 스스럼없이 포개어져 표상된다. 오를 수 있는 극점에까지 올라가 간신히 가닿을 수 있게 된 자리는 확실히 더 내려갈 곳을 찾을 수 없을 만치의 저점으로 현상된다.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감이 미소의 가슴 결 곳곳에다 새겨놓은 흔적들처럼, 카메라는 이리저리 곰팡이로 마구 얼룩진 밑바닥 사북자리의 광경을 섬세한 패닝쇼트를 통해 여실하게 담아낸다. 허나 만약 그 밑바닥마저도 쉬이 선택할 처지가 못 된다고 한다면? 심연을 향해 한없이 내려앉고 있는 미끄럼틀의 경사로란 말로 밖에는 그녀의 삶을 달리 해설할 방도가 없을 터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는 끝을 모르고 자꾸만 흘러내리던 쌀알들의 이미지를 겹쳐 읽을 수 있게 된다. 이로써 한 줌, 한 알도 남지 않을 무렵까지 끈덕지게 쏟아지는 곡식은 미소의 존재감과 정확하게 일체화된다.
 
“지푸라기와 위안물 그리고 완충장치”
 
한 곳에 정박할 동력을 얻지 못해 자꾸만 미끄러져 내리는 삶. 잠시 힘을 내어 움켜본다고 해도 금세 빠져나가버리며, 되레 당면한 처지를 이전보다도 더 참혹하게 만들기만을 반복할 따름인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 앞에서, 그녀가 달리 취할 수 있는 생의 자세란 게 과연 무엇이겠는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는 공허를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손에 온전히 거머쥘 수 있는 소소한 것들에 몸을 파묻고 또 위안을 누리려는 존재방식을 겨냥하는 선택지가 어쩌면 보다 더 나은 편에 해당할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위스키와 담배와 한솔’은 오롯이 미소의 것이다. 물론, 알고 보니 실상은 그녀가 품은 허망한 믿음일 뿐이었지만, 확실히 처음엔 그렇게도 보였다. 그러니 그것들이 어딘가를 향해 흘러내리고 도망갈 것이라곤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기에 미소는 이들에게서 위로를 얻었다. 메우지 못할 구멍이 뚫린 듯 온몸의 진액이 빠져나가 점차로 메말라가는 삶이 완전하게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간신히 붙들어 매는, 뿌리를 내리고 머무를 곳을 찾을 수 없어 매일의 풍랑 가운데 아득히 미끄러져만 가는 그녀의 존재를 어떻게든 지탱해주는 최후방어선의 완충장치가 되어주었던 셈이다. 만일 그것들마저 없어진다면 어디에도 몸 붙여 정주할 데 없는 그녀는 결국 간단없는 떠밀림 가운데 자신을 완전히 망실하고야 말 터였다. 
 
  
▲ 사치가 아니다, 삶의 지탱수단이다
 
허니 이를 사치라는 말로 간단히 재단해버리는 건 좀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지나치게 섣부르고 성급한 비아냥거림이라는 힐난을 피해갈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옛 동료들이 진실을 깨우치기란 아무래도 힘겨워 보인다. 적어도 그이들은 닻을 내리고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해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는 수준의 존재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미소와는 전연 다른 존재양식을 갖는단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삶의 고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 역시 저마다 나름의 어려움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최소한 그네들의 고민이란 튼실한 정박지에 발 딛고 선 바로 그 자리 위에서의 고민이다. 앞으로 갚아야 할 융자가 남은 아파트든, 초라한 연립주택이든, 혹은 올려다보기엔 목에 담이 올 것만 같은 부촌의 고급주택이든 여하간 그이들에겐 발붙이고 정주할 그들 소유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안전하게 발을 내딛을 곳이 없어 물결치는 대로 부유하고 있는 자의 신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단 뜻이다.

“정주와 여행, 마주할 수 없는 야누스의 두 얼굴”
 
환언하자면 최소한도의 생의 기틀을 갖춘 이들이 토대 없는 이의 삶과 그 존재형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란 말로도 옮겨볼 수가 있겠다. 그들은 어째서 변화를 꾀하지 않느냐는 말을 미소를 향해 쉬이 뇌까리지만, 실상 변형이란 말은 그 처음부터가 변화를 가할 나름의 견실한 토대를 전제 할 때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것이다. 쉽게 말해 어떤 틀거지 바깥의 삶을 꿈꾼다는 것은 적어도 먼저 그 틀의 존재가 선언된 다음에야 어떻게든 모색해볼 여지나마 주어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집도 없는 주제에 담배나 위스키를 여전히 끊지 못한다는 지탄은, 어떻게 해도 집을 가질 수 없기에 절망감에 주저앉거나 나락으로 침전하는 대신,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실존을 붙들어보려는 그녀의 고투를 ‘이해할 수 없기에’ 뇌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소를 폄훼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 멋대로 다루어도 무방한 함량미달의 존재로 간주하기까지 하면서도, 한편으론 그녀의 자유로움에 대해 미미한 동경의 정서를 머금기도 한다. 물론 이 동경 역시도 앞서 언급했듯 어디까지나 철저한 몰이해에 기원한다고 할 테다. 그네들이 미소에게서 여행자의 정취를 느낀 건, 사실 알고 보면, 그녀를 당신의 추억을 견인해낼 매개물로 삼아 자신의 흘러간 과거 속에서 망실해버린 ‘크루즈 시절’의 기억을 호명하고 불러올림으로써 수반된 감각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미소에게 공명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 

이처럼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방식을 가진 이의 삶을 헤아려보고 그 처지를 이해한다는 건 무척이나 까다로운 일이다. 그나마 미소와 유사한 형국이 한솔이나 민지 정도일 터이다. 공장 기숙사에서 숙식하는 그녀의 연인 한솔에게도 역시 정주할 집이란 건 없다. 그러나 그는 조금만 수고하면 어두운 삶의 노정을 이제 그만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공허한 환상에 도취되어 있다. 미소는 자신의 곁을 떠나 사우디로 가길 결정한 한솔을 배신자라 부르지만, 사실 위의 맥락에서라면 그에겐 바보라든지 천치라든지 하는 말들이 조금 더 어울릴 성 싶다. 민지는 한솔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환상을 가진다. 그녀에게도 물론 닻을 내릴 공간이란 주어져 있지 않으나, 민지는 자신 앞에 임의로 허락된 것들을 마치 본디부터 제 것이라도 된 듯 착각하는 환영에 빠진다. 삶에 갑작스레 들이쳐 온 절박한 문제 상황을 통해서야 허구의 장막은 걷어지고, 그녀는 가려졌던 진실에 가닿는다. 제게 붙여진 것들이란 사실은 ‘반납’을 기다리는, 그러니까 누군가로부터 한시적으로 빌린 것들에 불과하며, 본시 제게 속한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허나 진실을 깨닫는 일 자체도 물론 어렵겠지만, 미소의 삶을 반추해보면 알 수 있듯, 그 진실을 알았다 해도 살아내는 것 자체가 덜 힘겨워 지는 건 결코 아니다.

물론 미소는 자신의 정처 없는 떠돎을 스스로 ‘여행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고난의 여정이 한때나마 여행이라는 낭만화 된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자기존재를 지탱해낼 최소한의 근거들에 기댈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담배가격이 오르고, 한솔은 중동으로의 파견근무를 택하게 되며, 끝으로 위스키 가격마저 2천원이 올라버린 상황 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여행이라는 존재형식’을 고수하는 것이 힘겹다. 그렇다고 해서 집을 가질 수 없는 미소에겐 ‘정주의 존재형식’을 택할 일말의 여지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젠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게 돼버린 상황 가운데 내던져진 그녀는, 사실상 과거와는 다른 자가 되어버렸다고 보는 편이 옳을 테다.

  
▲ 완전한 백발로, 존재형식의 변화를 겪다
 
“이젠 그녀는 미소가 아니다”

그득한 백발은 미소의 변화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자다. 카메라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낸다. 부러 약을 끊었는지 상황에 의해 끊어지게 된 것인지, 혹은 짐작대로 둘 다에 해당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답을 내릴 순 없겠으나, 적어도 그녀가 아주 오랜 시간, 정말 만만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고 복용해온 약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와 더불어 이제 완연한 백발이 되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카메라가 의식적으로 마주하길 꺼려하고 있다는 점 역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테다. 만일 낯선 존재라면 혹 모르겠거니와 이제 와서 구태여 미소의 얼굴에 다가서기를 끈덕지게 거부하는 까닭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이미 우리가 아는 그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 우리가 잘 모르는 타자의 얼굴을 굳이 비추어줄 필요란 없는 셈이다. 이때로부터 마지막 쇼트에 이르기까지 미소의 얼굴은 단 한 번도 스크린 위로 현상되지 않는다.

  
▲ 부분적인 보여주기를 통해 가리다
  
▲ 이제 미소의 얼굴을 붙들지 않는다
 
영화의 말미는 강 건너편에 소재한 화려한 고급 아파트촌과 강 이편의 고수부지에 세운 붉은 빛의 작은 텐트를 대비함으로써 갈무리된다. 아주 대단한 집들 너머로 집이 아닌, 도저히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채 집이 되지도 못한 허름한 것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심각한 부조화의 감각을 촉발하는 그 무엇 속에선 정주하는 이의 삶을 취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여행자의 삶에 머무르길 고수할 수도 없었던 이의 실루엣이 아련하게 비추어지고 있다. 그 주인은 아마 미소일 것이고, 미소여야 하겠지만, 그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상은 미소가 아닌 ‘다른 누가 되어도 무방한’ 이의 그림자라고 해설하는 편이 조금 더 타당할는지도 모른다. 
   
  
▲ 텐트 속에 있는 건 과연 누구인가
  
▲ 집, 차마 집일 수 없는 것, 또 심연
 
익명의 존재성이 갖는 처지와 그 너머에서 번쩍이는 세계 사이를 가름하는 강물이란 기실은 쉽사리 건널 수 없는 심연과도 같다고 하겠다. 좀처럼 메워지지 않을 이 야멸친 간극엔 정말로 많은 것들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차마 거센 물살을 횡단하지 못하고 도중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허다한 그림자들 속엔 혹 우리의 것이 끼어있을 수도 있다. 그렇담 우리네 위치란 건 어쩌면 멀찍이서 피는 화려한 조명불빛보단 차라리 텐트 속의 미광에 조금 더 가까운 것일는지도 모른다. 이 점을 기억하는 게 의외로 대단히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미소의 얼굴을, 그녀의 존재를, 구태여 눈앞에서 증발시켜버리면서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또박또박 뇌까려올 이유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요컨대 패닝과 트래킹을 통해 한층 더 강조되는 의도적인 빗겨가기와 선택적 보여주기, 강변을 무대로 삼아서 아득한 롱 쇼트와 급격한 줌인이 일구어내는 시각적인 변증법에 이르기까지, 카메라는 그 언어를 계속 바꾸어가면서 무어라고 말을 걸어오고 있다. 미소는 어디에 있고, 그녀를 찾고 있는 우리는 지금 과연 어디 즈음에 서 있는가?         


글 : 남유랑

비평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및 제37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에 정기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다.

1986년 출생. 실명은 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고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에 대해 묻는다면 두어 가지로 답해볼 수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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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조회수6,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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