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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토리노의 말(馬)> ― 니체와 세상에 바치는 묵시록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영화감독이 된 철학자

20세기 후반 문화·지성계의 정점에 존재했던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2004)이 매년 한 번씩 벨라 타르(Béla Tarr: 1955~ )의 <사탄탱고 Satan’s Tango>(1994)를 감상하겠다고 했을 때, 적잖은 사람들은 멈칫했다. 걸작이긴 하지만 <사탄탱고>는 러닝 타임이 일곱 시간이 넘는 대작(大作) 아닌가? 아무튼 손택은 벨라 타르를 모던 시네마의 구원자로 칭송했고, 헝가리 출신의 이 감독은 줄곧 평론계의 주목을 받았다. 

벨라 타르는 원래 철학자가 되기를 꿈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생은 그리 녹록지 않았던지, 계획과는 달리 영화계에 투신했다. 영화를 통한 사회의 진보를 꿈꾸며 사회적 리얼리즘에 경도되기도 했던 그는 이후 영화를 통해 철학에 다가가는 방법을 발견한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종말 같은 철학적 주제도 천착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가 문학의 영역에서 철학의 주제를 견인해 낸 것처럼, 벨라 타르는 영화를 통해 철학을 이야기한 것이다. 

  
 
<토리노의 말 The Turin Horse>(2011)은 단순한 내러티브 시네마를 넘어 형이상학적 문제에 접근하는 작품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니체를 호명하며 인간의 존재와 세상의 종말에 대해 사색한다. 벨라 타르는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영화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이제 더는 할 말이 없다는 의미일까? 세계의 종말을 다루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변화 없는 일상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직시하는 영화. <토리노의 말>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2. 묵시록 ..... 그리고 니체 

벨라 타르는 <토리노의 말>에서도 자신의 기법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롱 테이크를 사용했다. 각각의 쇼트는 평균 5분 정도로 편집되었다. 그래서 이 146분짜리 영화는 겨우 서른 개의 쇼트로 구성돼 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 내레이션은 도입부의 역할을 뛰어넘어 작품 전체의 의미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니체라는 인물은 부재하지만, 그의 철학은 이 서문을 통해 영화 속에 상존(常存)하기 때문이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문밖으로 나선다. 산책하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마부 이름이 뭐였더라? 주세페, 카를로, 에토레? 하여간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로 다가가서 분노로 미쳐 날뛰는 마부의 잔혹한 행동을 말리려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들어 말의 목에 팔을 두르더니 흐느낀다. 이웃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워 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그 후로 10년 동안 그는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얌전하게 정신 나간 상태로 누워 있는다. 그 토리노의 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후 화면이 채워진다. 단조롭지만 장엄하게 반복되는 음악을 배경으로 노쇠한 말과 마부(馬夫)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간다. 흑백 필름은 이들의 고단함에 호소력을 더해준다. 

  
 
<토리노의 말>의 시작은 무겁고 우울하다. 카메라는 말을 클로즈업했다가 다시 거리를 두며 풀 쇼트와 롱 쇼트로 담아내고, 앞에서 로우 레벨 쇼트로 잡았다가 뒤쪽에서 아이 레벨 쇼트를 사용하기도 한다. 4분 30초로 구성된 롱 테이크는 균질적인 반복 행위로 채워진다. 전진하는 마부와 말. 변화 없이 고단한 삶. 지루하지만 견뎌 내야 하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생. 말의 삶을 포함한 피조물의 시간은 그리 다양하지 않다. 그렇게 첫째 날이 시작된다. 마부가 말을 끌고 오는 걸 보고 뛰어나오는 장성한 딸. 반가움은 없다. 아버지의 얼굴처럼 그녀의 얼굴에도 표정 변화가 없다. 그 흔한 인사 한마디조차 생략된 일상. 딸은 아버지의 귀가를 환영하지 않고, 아버지도 딸의 안부가 궁금하지 않다. 딸은 말을 마구간에 넣고, 마부는 그런 딸을 기다렸다가 마차를 차고에 넣는다. 마부의 귀가를 마무리하는 건 딸의 몫.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계처럼 행동한다.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처럼 무표정한 부녀(父女)의 움직임은 가족의 삶을 노동으로 격하시킨다. 침대 앞에 선 아버지. 딸은 그 아버지의 신발과 옷을 벗긴다. 단조로운 음악이 다시 반복된다. 말의 자리에 딸이 있다. 딸이 옷을 벗기고 입히는 동안 아버지는 딸을 위험한 눈길로 바라본다. 음험하고 광기 어린 마부의 시선 앞에 관객은 긴장한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도의 호흡을 고르는 순간, 그 어떤 일은 이미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수면 위로 상승한다. 감자 두 개를 삶아 식탁에 올려놓고서야 첫 대사가 나온다. “식사하세요.”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22분이 지난 뒤다. 너무 검소해서 참담한 식탁. 메시지는 분명하고 뚜렷하다. 살기 위해 먹는 이들. 식사는 이들에게 아무런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마부는 소금을 뿌려가며 감자 한 알을 허겁지겁 탐하지만, 늘 다 먹지는 못한다. 그러고 나서 부녀는 번갈아 창밖을 바라본다. 무미건조하면서도 지겨운 일과. 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 이 모든 반복과 일상 가운데 일탈이 일어난다. 58년 동안 들렸던 나무좀 갉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종말이 시작되고 있다. 파국은 작은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전율적인 것은 다른 데 있다. 58년의 세월을 그들은 그렇게 살았던 것. 나무좀 갉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만큼 그들의 세월은 무료하고 지루했다. 다음 날에도 부녀는 같은 일을 반복한다. 다만 말이 마차 끌기를 거부하고, 술이 떨어진 이웃 남자가 술을 찾아 방문한 것이 파격이다. 염세주의자인 남자는 파멸을 야기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악인의 승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부는 이웃 남자의 주옥같은 언어들을 ‘헛소리’로 일축해 버린다. 그때까지도 마부는 모르고 있었다. “파멸을 향해 가고 있네. 모든 것은 파멸하고 타락하게 마련이니까. 그들이 모두 파멸하고 타락하게 한 거야”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웃의 장광설이 바로 자신과 세상을 위한 것임을. 어쩌면 이 마부는 파멸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셋째 날도 그들의 일상과 침묵은 반복된다. 그러다 멸절을 앞둔 시간인 만큼 비일상적 사건이 또다시 침투한다. 집시들이 물을 찾아 마부의 우물에 도착한다. 부녀는 그들을 내쫓는다. 저주를 퍼부으며 돌아가는 집시들. 그 와중에 늙은 집시는 마부의 딸에게 책 한 권을 주었다. 성경의 첫 부분이 ‘창조’를 언급하는 반면, 이 책의 첫 부분은 ‘종말’을 언급하고 있다. 일종의 반(反) 성서(anti-Bible)인 셈. “아침은 곧 밤으로 바뀔 것이나 밤은 머지않아 끝나리라.” 서구문화를 지지해 온 기독교적 전통과 반(反)기독교적 전망 사이의 경합. 넷째 날에는 우물이 말랐다. 말은 여전히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 불길함, 그리고 현실적인 생존 불가능함으로 인해 부녀는 살림살이를 챙겨 도망가지만 갈 곳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집으로 돌아온 부녀는 다시 정물이 된다. 좌절조차 표현하지 않는 이들의 표정은 더욱 큰 절망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다섯째 날에는 기름에 불이 붙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랜 어둠을 비춘다. 종말은 논리적으로, 자연의 법칙하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여섯째 날에 아버지는 생감자 껍질을 벗겨 씹고, 딸은 죽은 듯 침묵한다. 아버지도 곧 먹기를 그만두고 또다시 풍경에 편입된다. 아마도 그렇게 죽을 것이다. 

  
 
<토리노의 말>은 마부와 딸이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을 겪게 되는 엿새 동안의 일상을 다루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작품은 그 외피를 넘어 보편적 인간 존재와 세계를 이야기한다. 태초에 하느님이 엿새 동안 천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한 것과 대구를 이루는 종말의 시간. 자연스럽게 이 작품은 반(反)기독교적인 의미를 선언하며, 니체를 불러들인다. 신(神)이 처음 만드신 것은 빛이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에 도전하기 위해 벨라 타르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묘사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말은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니체의 그림자 같은 이웃 남자는 이들을 방문해 ‘신의 부재’와 ‘인류의 종말’을 연설한다. 말은 물을 포함한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집시들의 예언과 저주. 그리고 갑자기 우물이 마르고, 기름 가득한 램프에 불이 붙지 않는다. 종말의 엿새 동안 이러한 기현상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나더니 결국 여섯 번째 날에는 빛이 사라져 버렸다. 

  
 
3. 위버멘쉬(Übermensch)의 죽음

<토리노의 말>의 서문에서처럼 니체는 1889년 토리노에서 말을 껴안고 내재돼 있던 연민의 정(情)을 폭발시켰다. 이후 그는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정신병원을 드나들다 삶을 마감했다. 토리노에서의 에피소드를 통해 니체가 자신의 지난날을 ‘바보짓’으로 요약했다는 벨라 타르의 포커스는 소중하다.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유언-죽기 12년 전에 한 말도 유언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과도 같은 말이 지니고 있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니체가 자신의 출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발간한 것은 1882년이었다. 니체 철학의 근간이 되는 이 작품에서 그는 ‘신의 죽음’과 함께 ‘초인’으로 번역되는 위버멘쉬와 영원회귀 사상을 주장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를 가지며, 끊임없이 현재를 극복하고 살아가야 하는 위버멘쉬. 위버멘쉬는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였고, 영원회귀 사상을 체득(體得)할 수 있는 인간이다. 
 
벨라 타르는 카뮈의 ‘시시포스’처럼 주어진 고통 속을 묵묵히 행진하며 삶을 견뎌내는 마부를 위버멘쉬의 모델로 제시한다. 그는 말을 듣지 않고 전진하기를 거부하는 말에게 채찍을 휘둘렀고, 그 참담한 환경 속에서도 목숨을 놓지 않았다. 파멸과 멸절을 이야기하는 이웃의 예언과 진단을 무시했고, 우물이 마르자 생존을 향한 투지를 불태웠다.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흙먼지 부는 강풍이 지배하는 적대적 환경은 그의 삶의 의지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또한, 그는 근친상간의 유혹을 극복해 냈을 수도 있다. 혹 그렇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이후의 죄책감을 극복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건 설명할 수 없는 현실. 누구나가 맞닥뜨려야 하는 부조리한 세계. 왜 말은 갑자기 식음을 전폐하는가? 어떻게 우물이 하루아침에 마를 수 있는가? 무슨 이유로 기름에 불이 붙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비논리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감자만 먹고 살 수 있겠는가라는 건 질문도 되지 못한다. 

  
 
이성과 의지의 영역은 인간과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삶은 짧고 자연은 유구(悠久)하며, 인간은 이성과 의지로만 살아갈 수 없었다. 본디 그렇게 존재할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할 때의 니체는 30대 후반이었다. 선천적으로 병약한 그였지만, 상대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 책을 썼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은 존재가 항상 권력의지(힘에의 의지)를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쓴 글은,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아폴론 적이었던 니체를 부끄럽게 했다. 시간의 끄트머리에서 병약해진 그는 어느 겨울 타향에서 가엾은 말을 목격한다. 연민은 학습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었다. 아마도 니체는 투쟁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극복, 위버멘쉬를 주장했던 과거의 논리가 그 말(馬)에 대한 가눌 수 없는 연민 앞에서 덧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과거의 주장에 의하면 연민 또는 사랑은 위버멘쉬가 극복해야 할 감정이며, 그로 인해 신이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말을 연민하지 않고 가혹하게 독려했던 마부. 벨라 타르는 그 마부가 바로 젊은 니체였음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토리노의 말>은 그 마부의 삶을 추적한다. 분노와 잔혹함으로 말을 다루었던 마부는 오늘도 세월의 흐름을 견뎌내고 있다. 그는 묵묵히 전진한다. 그에게 삶은 마치 극복하고 버텨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그의 일상에는 기쁨도, 쾌락도, 즐거움도 없다. 그의 초인성(超人性)은 딸에게도 파급되었다. 부녀는 웃음은 물론 대화까지도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무의미하다. 죽음보다 못한 목숨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삶의 지루함 또는 지겨움. 그 넌더리 나는 반복성은 관객에게 롱 테이크로 전달된다. 시간은 롱 테이크처럼 집요하다. 그리고 한 번도 인간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렇게 일곱 번째 날에는 멸망이 찾아올 것이다. 혼돈과 타락의 세계. 탈출구 없는 인생. 위버멘쉬는 혼돈과 종말 앞에 무기력하다. 신과 운명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위버멘쉬는 바보였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토리노의 말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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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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