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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형사가 살인범을 검거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사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사실에 하나의 차원을 덧입히는 경우를 우리는 이야기라고 한다. 작가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사실’들을 ‘이야기’로 바꾸어야 할 때 가장 효율적이거나 극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모든 사실들을 재가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늘 한 겹의 차원을 더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문제는 사실이라고 규정되는 원래의 사건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내밀한 겹을 갖고 있으며 영화는 그 결을 얼마나 정교하게 재가공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이야기의 완성도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되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실의 연쇄를 구성한다. 다시 말해 사실이 이야기로 변한다는 것은 어느 ‘인물’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면 무슨 ‘선택’을 하는지, 그 순서를 추적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순서의 나열이기도 하니 우리의 삶, 그 자체 역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 <암수살인>은 사실이 이야기로 바뀌게 될 때의 이 순서(인물-상황-선택) 중에서 ‘상황’을 따로 떼어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러고 나서는 또 다른 등장인물에게 이 ‘상황’만을 추적하게 만든다. 이 때 그 ‘상황’은 또 다른 결의 이야기를 만든다. 앞서 언급한 “사실이라고 규정되는 원래의 사건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내밀한 겹”을 갖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고 한 나의 말은 여기에 부합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암수살인>의 완성도는 꽤 괜찮은 편이다. 특히 이 상황을 떼어 놓는 모험이 성공한 듯 보이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 ‘상황’을 추적하는 인물이 영화의 서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실이라는 것의 과하지 않는 특성’을 잘 맞춰놓고 있고 거기에 더해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잠깐씩 나오는 주변 인물들의 대사들조차 생활연기처럼 자연스럽고 과하지 않은 유머가 현실과의 균형을 잘 조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살인범 강태오(주지훈)의 유년 시절을 설명하는 데에는 꽤 짧은 분량만을 할애하는데다가 그 순서 역시 후반부로 미뤄놓는다. 이것만 보더라도 강태오가 왜 살인범이 되었는지에 대한 상황 설명에는 오히려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형사 김형민(김윤석)이 왜 정의로운지에 대해서도 불친절하다. 그런 식으로 등장인물 혹은 주인공들의 캐릭터 설명은 대수롭지 않은 듯 모두 뒤로 물리고 오히려 살인피해자, 그러니까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들의 인생 이야기, 그들의 억울함에 집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보니 죽은 피해자들이 매장된 곳을 찾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 되고 그 덕에 그 위치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가해자 강태오는 특별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오로지 강태오의 입을 통해서만 피해자의 매장 장소를 알 수 있도록 판을 짰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명을 죽였는지 조차 그의 입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이 조건은 강태오를 타락한 신으로서 영화 속 모든 상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에 강태오가 왜 살인범이 됐는지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불필요하게 할뿐만 아니라 김형민의 캐릭터마저 뒤바꿔놓는다.(물론 영화 속에서는 뒤바뀐 캐릭터가 주를 이룬다) 강태오의 진술이 김형민의 새로운 성격과 그렇게 직결 되므로 이 영화는 강태오의 두터운 진술의 결을 촘촘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두터운 진술의 층위를 이 영화는 세 개의 관계로 구분한다. 김형민과 피해자, 강태오와 피해자, 김형민과 강태오. 이 관계에서 강력하면서도 중요하게 부각되는 관계는 바로 김형민과 강태오 사이에 놓인 ‘피해자’들의 상황이다. 김형민은 강태오의 진술을 점검해 가면서 피해자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강태오의 거짓진술에 속아도 그 거짓 속에서도 진실을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이런 장면들이 보여주듯 김형민은 강태오와의 대화에도 적극적이면서도 피해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기위한 교감 역시 강하게 이어 나간다. 그런데 여기까지였다면 이 영화는 일종의 심리범죄수사물 장르로 입성했겠지만, 이 영화의 차별점은 사건의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는데 있다. 이 사건의 ‘사실’은 아직 완결되지 못한 채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추적하는 김형민은 실존인물이지만 영웅적 사건 해결자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김형민이 영웅적인 사건 해결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강태오 역시 학술적으로 분석이 안될 정도로 악마성을 초월하고 사이코패스를 넘어선다. 어떠한 것으로도 그 둘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이 어떤 눈물겨운 영웅, 어떤 악마적 범죄자로 규정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강태민은 ‘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는가.’이고 김형민 역시 ‘왜 그의 진술을 믿게 되었는가.’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답이 없다. 그저 그들 모두 해야 하니 했고, 할 수밖에 없으니 회피하지 않았다고 여겨볼 뿐이다.
실제로 강태오가 김형민에게 들려주는 끔찍한 이야기는 이미 벌어진 일에서 무슨 답을, 의미를 찾느냐고 반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명령조의 그 진술, “여 한번 가 보이소.”라는 그의 진술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니 김형민이 피해자를 찾아나서려는 의지에는 이런 의구심이 든다. 김형민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도 아니고 사건을 해결하면 고과에 반영된다는 성과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라면, 다시 말해 어떤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쩌면 그저 그는 지금을 초월한 삶의 상태, 그러니까 ‘지금’을 벗어나기 위해 강태오의 진술을 받아들이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이를테면 강태오의 진술을 믿느냐 마느냐의 선택은 지금의 삶이 고통이라면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픈 의지 때문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는 역으로 강태오도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달갑지 않다.
결국 영화 <암수살인>은 가해자와 피해자는 존재하지만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그 두 종류의 사람을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 모두 더 나은 삶을 의지할 뿐이라는 사실이 같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과거의 사실을 어떤 식으로든 꺼내들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하기는커녕 지속시킬 수조차 없다는 그 하나다. ‘암수살인’은 ‘암수범죄’로서 ‘Hidden Crime’이고, 영화의 영문제목이 ‘Dark Figure of Crime’이라는 것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그 의미는 명료해 보인다. 김형민이 강태오에게서 듣게 된 숨겨져 있었던(Hidden) 어둠의 모습(Dark figure)은 ‘사실’의 나열로써 어둔 곳에서 세상 밖 밝은 곳으로 나온 것 아니겠는가. 먼지 가득한 문서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었던 피해자들의 보고서들이 살인범 강태오의 진술로 인해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되는 장면이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죽은 피해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해자들에게 이 모든 이야기는 나를 발견해줄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발견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의미는 그저 요행을 바라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의 삶도 이렇다면 누군가에게 발견될 요행만이 ‘지금’을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좋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의미를 안겨준 이 영화는 나에게 “어떻게 발견될 것인가”라는 답 없는 질문을 강하게 던져놓고 시간이 다 됐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글: 지승학
영화평론가. 현재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문학박사이며,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등단하였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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