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박태식 신부(‘함께사는세상’ 원장)
<도가니>(황동혁감독, 극영화/고발, 한국, 2011, 125분)가 요란하게 끓고 있다. 언론 매체들은 영화 <도가니>의 포함 된 사실 관계를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고, 사태 수습을 위한 갖가지 대책들이 강구되는 중이고, 급기야 어느 신문에는 ‘영화의 힘’이라는 표제어가 1면에 등장했다. 그야말로 도가니 사건이 세간의 화제가 된 것이다. 과연 영화의 힘이 그렇게 위대할까?
아내가 죽고 천식이 심한 어린 딸을 둔 강인호(공유)는 친한 교수님의 소개로 장애인 학교인 자애 학원에 미술 교사로 임명받는다. 오랫동안 아들, 남편, 아빠 노릇을 제대로 못한 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기회였다. 그런데 자애학원에 첫 출근을 하는 날부터 인호는 무엇인가 불안한 기운을 느낀다. 학생에 대한 교사의 무자비한 폭력, 공공연한 기부금 요구, 화장실에서 들리는 비명, 교장과 지역 형사의 유착관계, 벌을 준다며 아이의 머리채를 붙잡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기숙사 사감. 결국 인호는 장시간 조직적으로 행해졌던 성폭행의 진상을 알기에 이른다. 그에게 지역 인권 단체의 간사인 서유진(정유미)이 합류하고.
그 후로 영화는 속도감을 더해 곧바로 재판 과정으로 넘어간다. 그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들의 파렴치한 시치미 떼기와 가해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공무원들과 전관예우 해택을 받으며 그들을 변호하는 전직 부장판사와 그에게 매수당한 검사와 솜방망이 처벌을 한 판사가 등장한다. 거기에 장애 학생들이 당한 수모에 비하면 그야말로 몇 푼 안 되는 돈을 받고 합의서를 써준 보호자와, 더 이상 모나게 살지 말고 가족만 염려하라는 인호의 어머니(김지영)까지 포함시켜보자.
이렇게 간단히 정리를 했지만 이미 <도가니>를 본 독자 분들은 충분히 공감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도가니 사건 자체도 문제지만 이를 사회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 훨씬 심각한 부조리가 들어있음을 고발하는 데 영화의 목적이 있다는 점 말이다. 이는 요즘 한창 벌어지는 사회적 논의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우선 도가니 법을 제정해 성폭력(특히 아동 성폭력)을 근절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이는 공소 시효를 없애자는 의견으로 이미 법적 처리가 끝난 도가니 사건을 다시 심사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깨버리겠다는 시도이다. 물론 앞으로 적절한 논의 절차를 거치겠지만 법치국가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해결 방안으로 보인다. 혹시 대한민국이 아직도 법보다 인정人情에 휘둘리는 나라라면 모를까?
다음으로 실제 사건의 해당 학교인 광주 인화학교를 폐쇄하고 학생들을 일반 학교로 전학시키겠다는 방안이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대단히 몰상식한 조치이다. 우리나라는 장애인 학교를 혐오시설로 여기는 시선이 있다. 그래서 장애인 학교 하나를 개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장애인 센터를 실제 꾸려가는 필자의 경우 그 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편인데, 학교 폐쇄란 최악의 선택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벌을 주자는 말인가?
도덕적 기준이 높은 나라의 경우, 이런 일이 터지면 범죄자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키고 그런 압력을 못 이긴 당사자의 자살로 사건이 정리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일처리가 불분명하고, 죄인들을 쉽게 용서하는 풍토에서는 기대하기 불가능하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이라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자들이 얼마나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가?
황동혁은 <마이 파더2007년>를 통해 입양아 문제를 실감나게 다룬 바 있어 기억에 남는 감독이다. <도가니>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몇 번이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원작 소설과 영화는 어디까지나 사실에 기초를 둔 픽션일 뿐이지 사실 보도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와 소설은 보고서나 신문 기사와 구별된다. 소설가 공지영과 영화감독 황동혁이 하느님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네티즌들의 모습을 보면 그 경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심지어 사건을 맡았던 당시 변호사와 검사와 형사까지 등장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고 ‘예수 믿는 것들은 어찌 다 그 모양이냐?’면서 그리스도교를 싸잡아 비난한다.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인심을 잃었는지 뼈저리게 보여주는 좌표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냉정한 입장은 아니다.
도가니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는 아직 미지수고 좀 더 지켜보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악덕 재단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될 것 같고 장애인 학교와 시설들에 대한 감시의 눈이 보다 날카로워져야하고 장애인들에게 돌아가는 피해는 절대 없어야 한다. 그래야 ‘영화의 힘’이 제대로 발휘됐다는 후일담을 듣게 되리라. 눈을 크게 뜨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