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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밑의 삶>- 강유정

강유정(영화평론가)

트럭 밑에도 삶이 있을까? 영화를 보기 전 이 제목은 마치 어떤 삶의 은유처럼 상상된다. 가령 진흙 속의 삶이나 동굴 속 삶처럼 말이다. 그런데, '트럭 밑의 삶'은 어떤 삶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라 직설적 서술이다. 트럭 밑에도 삶이 존재한다. 아니 어떤 사람들은 트럭 밑에서야 겨우 살아갈 수 있다.

아돌프 알릭스 주니어의 영화 '트럭 밑의 삶'은 대형 컨테이너 밑에 살림을 차리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메트로시티가 메가 시티가 된 지금, 거주야 말로 생존의 문제이다. 아주 오래 전 해결되었다고 믿었던 거주 공간의 문제가 여전히 가장 현재적이며 절실한 문제라는 뜻이다.

살 곳이 없는 노라는 컨테이너 트럭 밑을 주거공간으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제공하는 쉼터는 가족을 찢어 놓는다. 어린 딸과 헤어질 수 없는 그녀는 결국 컨테이너 밑까지 찾아든다. 철거촌, 쪽방촌, 벌집촌보다 더 혹독한 삶이 바로 이 곳 필리핀의 컨테이너 촌에서 지속되고 있다.

그런 노라에게 유일한 희망은 바로 딸이다. 그녀는 딸만큼은 번듯하게 교육시키기 위해 매춘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사실 매춘이야말로 그녀를 이 혹독한 삶으로부터 지켜줄 안타깝지만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트럭촌 주변의 남자들은 그녀를 남용한다. 아이의 과제비를 마련하기 위해, 날개옷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녀는 남자들의 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다. 단속을 핑계로 그 작은 권력을 이용하는 경찰은 그녀를 지켜주기는커녕 착취하는 남성적 권력의 형편을 잘 보여준다.

그녀가 굴욕과 가난을 참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이런 딸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 혹시나 싶은 불행은 사실이 되고 만다. 노라는 아이를 잃자 살아갈 이유도 잃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놀이 공원의 대관람열차를 타는 노라의 텅 빈 시선을 바라 본다. 그녀는 딸이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놀이 공원을 딸이 죽고 나서야 가게 된다. 딸 아이의 소원을 뒤늦게 들어 준다 한 들 빈 곳이 채워질리는 없다. 이미 딸은 죽었고, 희망은 사라졌으니 말이다.
'트럭 밑의 삶'은 이 지독한 순간순간들을 매우 차분한 시선과 어조로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카메라 너머 주인공 노라의 연기는 눈빛으로 출렁인다. 기쁨, 슬픔, 모멸과 기대감은 대사나 행동이 아니라 노라의 눈빛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복수가 통쾌하다기 보다는 애처럽고 안쓰럽다. 그녀는 날카로운 칼로 자신을 유린했던 남근을 도려내지만 사실 이 남근하나를 처리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이 복수 끝에 화면 너머로 사라질 때, 이 사소한 복수를 통해 우리가 그녀에 대한 미안함을 덜 수 없는 이유이다.

노라의 복수는 임상수의 영화 '하녀' 은이의 선택처럼 필연적이며 고발적이다. 은이는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래도 노라는 남근 하나에 상처를 낸다. 하지만 여전히 트럭촌에는 무수한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딸아이의 천사 날개가 지켜질 수 있는 세상, 그 세상을 향한 강렬한 바램은 비단 필리핀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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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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