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영화평론가) 영화는 어둠 속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커다란 침대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든 남자의 등 뒤로 한 눈에 보기에도 쇠약해 보이는 여인이 누워 있다. 그녀는 바로 남자의 어머니 그리고 남자는 고백한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일종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라고 말이다.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부채감, 사실 이는 특별한 감정만은 아니다. 굳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어머니의 살을 찢고 나온 순간부터 일종의 부채감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부채감은 조금 색다르고 둔중하다. 이 이채로움은 그가 반복적으로 꾸는 꿈에서 구체화된다.
공중에 매달린 배에 타고 있는 남자는 죽고 싶은가 그리고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받는다. 그는 생의 시작이 애초부터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중요한 매개는 바로 옆 집의 음성이다. 옆집과 나란히 공유하고 있는 벽 너머로 들려오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는 마치 계시처럼 가깝고도 멀게 들려온다.
그런데 그녀가 그만 불치병에 걸리고 만다. 간절히 아이를 원하던 그녀는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만다. 유산, 불임, 병의 고통 속에서 그녀는 육체 뿐 아니라 정신까지 마모되어 간다. 이에 남자는 어떤 점에서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자 곁을 지켜준다.
업보라고 번역될 수 있을 카르마는 살아 있는 존재라면 그 무엇이라도 가질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이다. 남자는 어머니의 부재 때문에 고통스럽고 여자는 빈 자궁과 닳아가는 생의 에너지 때문에 괴롭다. 그와 여자는 두 사람 가운데 놓인 인연의 업보를 그렇게 서로를 통해 확인하고 대속한다. 남자는 여자의 빈 가슴을 통해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여자는 남자와 함께 죽음을 대면하게 된다.
마치 꿈처럼 영화 '카르마'는 단속적 이미지와 은유로 연결되어 있다. 친절하게 이야기를 쌓아가는 서사적 드라마보다 '카르마'는 삶, 죽음, 고통, 생존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이미지화하는 데 치중한다. 숨소리, 고통스러운 탄식, 단말마의 호소를 담아 내는 영화의 사운드도 귀를 사로잡는다. 이는 절실한 질문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꿈을 공유하는, 내밀한 체험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