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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문라이트] (참석자: 윤성은, 정재형, 박태식, 민병선, 송아름)

 

* 연출: 배리 젠킨스  

* 출연: 알렉스 R. 히버트, 애쉬튼 샌더스, 트레반트 로즈, 메어샬라 알리  

* 개봉: 2017년 2월 22일  

 

<문라이트> 합평회


날 짜: 2017년 2월 1일

참석자: 윤성은, 정재형, 박태식, 민병선, 송아름

 

윤성은: 2월 1일 <문라이트> 시사 후 합평회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윤성은이고요, 제가 빨리 가야해서 저 먼저 짧게 하고 자리를 떠야 할 거 같아요.

 

일단 <문라이트>는 지금 <라라랜드> 다음으로 노미네이트가 많은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확하지 않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라라랜드>가 14개 부문의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면서 이 작품이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문라이트>가 흑인 감독의 흑인 사회를 다룬 작품으로 너무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그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라라랜드>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거든요. 그런 소문을 듣고 이 작품을 봤는데,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한, 웰 메이드한 작품이었고 이전까지 봤었던 비슷한 종류, 맥락에 있는 작품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한 느낌을 줬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노미네이트 된 부분들 당연히 너무너무 훌륭한데요, 제가 집중적으로 봤던, 듣게 됐던 부분은 음악이 정말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때그때 아는 음악들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도 참 감정을 잡아내는 데 아주 섬세하게 음악들이 되게 많이 사용되거든요. 각 장면마다 많이 사용되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종류의 영화, 어떤 리얼리티를 다룬 영화들에서는 상당히 과잉되다싶을 정도로 많이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슬리지 않고 그때그때 분위기를 잘 잡아줬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영화 끝나자마자 처음 말씀드리다 보니) 두서가 없는데요, 저는 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사실 이안 감독 영화였거든요. <브로크백 마운틴>의 멜랑콜리한 흑인판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여기에 사실 그들이 청소년기의 어떤 남성과, 스포일러입니다만은, 둘이 어떤 대담한 스킨십이라고 보기에는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다른 종류의 게이영화에 비해서 훨씬 수위도 약하고 그렇지만 저는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LGBT를 다룬 영화 중에 레즈비언 영화들은 사실은 굉장히 감정의 교감을 섬세하게 다룬 영화들이 많은데 남성들의 영화, 게이영화 같은 경우에는 감정의 교감을 다루기보다는 약간 섹슈얼한, 어떤 역동적인 느낌들, 그런 장면들을 담아낸 영화들이 많아서, 왜 그럴까 인물 사이에 오가는 오묘한 감정선들이 왜 게이 영화에는 많지 않을까 이런 걸 고민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니까 그 부분에 대한 갈증이 조금 해소되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케빈과 샤일록사이의 감정은 처음부터 섹슈얼한, 입체적인 마찰 같은 것들이 아니라 소외당한 한 소년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주는 한 소년에 대해 느끼게 되는 특별한 감정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다른 게이영화들에서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감정선, 감수성 같은 것들이 많이 해소가 되는 그런 느낌이 있었고. 이 부분과 더불어 스타일이라든가 영화의 플롯 같은 것들이 많이 닮아 있는 영화가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연장선상에서 다시 한 번 이 영화를 생각해보고 싶었고요,

그리고 중요한 인물이 또 엄마인데요. 처음에는 엄마가 중독된 여성으로서 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갈등 관계를 보여주려고 등장시킨 것 같지만 뒷부분에 샤일록과의 대화 장면은 이것이 단지 개인 흑인 아이의 성장담이 아니라 흑인 커뮤니티와 흑인들의 보편적인 삶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는 백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든요. 제대로 화면에 잡히는 인물이 백인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흑인들은 흑인들끼리 만나고 흑인들끼리 살아가는데 그 삶은 샤일록 뿐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몇몇의 인물들로 대변됩니다. 감방을 갔다 오는 것은 다반사죠. 케빈은 그래도 직장을 잡고 아이도 낳고 살고 있지만, 샤일록은 마약을 팔게 되는 길로 갔죠. 엄마 같은 경우는 아이를 혼자 기르는 책임감도 있지만 마약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치료를 받아야 했죠. 그렇게 망가진 상태에서 아들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 그 대화에 ‘운명’이란 얘기가 나오잖아요. 난 이렇게 만들어졌고, 이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야. 얘기하는데 이 대화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그런 좌절감에 빠져 사는 많은 흑인들의 모습이 그녀와 샤일록 안에 있는 거죠. 케빈의 경우에는 그래도 다른 길로 빠져나와서 “나는 보호감찰 좀 남았지만 걱정 없이 산다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샤일록 가족 보다는 조금 안정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는 흑인입니다. 결말부에 그의 말이 남기는 교훈이 있다고 보고요. 샤일록이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들과 일대일로 만나 나누는 대화들-엄마, 후안, 테레사, 케빈-은 시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답고 중요한데 이 서정적인 영화의 정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이제까지 나왔던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스타일이나 어떤 방식과는 정말 다른 맥락에서 접근한, 할 이야기가 많은 그런 작품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정재형: 흑인 영화라는 측면에서 저도 좀 얘기를 하겠습니다. 백인이 한 명도 안 나온다고 했는데, 두 명 정도 나오는 것 같아요. 케빈의 식당에 백인이 살짝 있었던 것 같은데.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흑인은 흑인 볼 일이 많고, 백인은 백인 볼 일이 많은 거예요 그러다보면 배제가 되는 거죠. 알프렛 히치콕의 <The Wrong Man>(누명 쓴 사나이)에는 흑인이 거꾸로 한 명도 안 나오죠. 인종전시장이라는 뉴욕을 소재로 했는데 말예요. 미국은 흑백갈등이 심각하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문라이트>에서도 백인을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흑인 내부의 문제라는 것을 포커싱 하고 있다고 보여져요.

윤성은씨가 <브로크백 마운틴>하고 비교를 했지만 저는 또 다른 백인영화 <보이후드>와 비교하고 싶습니다. 게이나 동성애자 측면이 아니라 한 인간의 성장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영화가 떠오르더라고요. <보이후드>가 백인 중산층 중심의 성장사, 공적인 미국의 역사를 같이 서술하면서 한 인간이 변해가는가,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보여줬다면 이 영화는 그런 측면의 성장사가 보이지 않아요. 대신에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는 한 인간이 어떻게 미국 사회에 적응해가는 지를 보여주죠. 그것이 바로 흑인의 역사라는 말을 하죠. 이 사람은 게이가 될 수밖에 없구나 하는 논리를 설득시키죠. 자신의 고통을 그나마 인정해줬던 유일한 사람이 바로 친구였고. 동성친구였고. 그래서 자신도 게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고백을 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 이면의 성장사가 너무나 가슴이 아픈 거예요. 이렇게 마약쟁이로밖에 살 수 없는 그런 인생을 보여주는게 가슴 아프죠. 그건 사회적으로 반향이 좀 있는 거예요. 미국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 시각의 영화가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로서 흑인의 시각에서 그린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박태식: 이 영화를 보면서 우선은 굉장히 불교적인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면 불교에 보면 자기 안에 아름다운 구슬이 들어있는데, 그걸 불성이라 그러는데요 그것이 더러워져있어요. 그것을 잘 닦아서 환하게 빛을 내라 하는 것을 불성을 닦아서 빛을 낸다 이런 의미인데, 이 영화에서 저는 주목해서 봤던 게 이 아이는 굉장히 아름다운 게 있어요. 아름다운 게 있는데, 세상이 잘 안 돼서 계속 썩히고, 썩히고 하다가 이렇게까지 왔잖아요. 마지막에 엄마가 마약중독자 보호소에 있었을 거예요. 엄마가 하는 말이 굉장히 좋더라고요. 내 마음은 검지만 네 마음은 검지 않다고 하는 말. 그래서 자식이 갖고 있는 가치를 발견해주는 사람이 엄마잖아요. 그러니까 얘가 오랜 세월을 지나서 여기에 다시 들어온 굉장히 중요한, 마이애미에 돌아온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서 온 게 아닌가. 그래서 거기에서 어머니도 만나고, 자기 친구도 만나서 자기 자신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어요. 그래서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자신의, 진짜 나다운 무엇인 어떤 것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아주 괜찮다고 봤고. 그래서 제가 한 몇 가지 장면들이중요하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뭐냐 하면 처음에 포한하고 바닷가에 나갔잖아요. 그랬더니 흑인은 이 세상 어디가나 있다. 그러니까 흑인과 백인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누구하고 똑같은 보편적인 인간으로 갖고 있는 거지, 우리가 뭐 흑백이라든가 그런 인종적인 문제를 따로 갖고 있는 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보통 흑인들 나오는 이런 영화 보면 흑인들은 거칠고 못 배우고 그런 의미는 좀 벗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고. 그리고 자기가 지나갈 때 보니까 할머니가 너는 이제부터 블랙이 아니라 블루라고 했다라는 것. 달빛을 받아서. 그래서 이렇게 문 라이트가 된 거잖아요. 그것에서 이제 색이라든가 그런 부분이 없어지는 이야기. 그런 것이 난 전 참 좋더라고요. 그리고 엄마 얘기도 괜찮았고. 그리고 아이가 이제 나중에 와서 나를 왜 불렀느냐 라고 하는 질문,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 같은 것. 그게 괜찮았어요.

그리고 뭐 이제 음악, 아까 얘기하셨지만. 음악도 아주 좋았어요. 처음에는 클래식 풍의 곡들이 주로 나오고요. 그러다가 중간에 랩도 나오고 그런 다음에 아주 고전적인 스탠다드 팝이 나오고, 그런 여러 가지 음악들을 적재적재 섞음으로 해서 영화가 음악을 잘못하면 좀 싸구려처럼 보일 수가 있는데 처음에 클래식이 나오니까 이 영화는 굉장히 고급스럽다는, 아주 고급스러운 걸 지향한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런 게 아주 괜찮았어요. 등등 해서 이 영화가 글쎄 상을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메시지도 아주 좋고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방식도 굉장히 좋았고. 그리고 특별히 셋으로 나눴잖아요, 그 파트가. 첫 번째는 리피트, 두 번째는 샤이론, 그리고 세 번째가, 나는 세 번째가 도대체 무슨 이름이 나올까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랬더니 블랙이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블랙이, 주인공이 갖고 있는 원래의 자기 정체 같은 것을 찾아나가는 그런 게 아닌가 싶어서 나는 또 이제 중간 중간에 소제목을 붙여준 것도 좋았고.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방식도 괜찮았고 메시지도 좋았고 등등등 해서 저는 글쎄 뭐 이게 올해 작품상을 받는다고 해도 <라라랜드>보다는 나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송아름: 저도 영화 되게 잘 봤는데요, 저는 약간 성장서사와는 약간 다른 방면에서 좀 봤던 게 일단은 성소수자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영화가 두 가지 방식인 것 같아요. 하나는 그들의 사랑에 집중하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방해를 받는지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저는 이 영화를 고평할 수 있는 것은, 그러니까 이 남자아이가 왜 그것을,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말하지 못하고 계속 고통스러워 했는가 라는 것을 그 남자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남성성이라는 그 폭력적인 방식을 이 영화가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 샤이론이라는 이 남자아이는 첫 장면부터 다른 남자아이들한테 쫓기는 거죠. 보통 남성성이라고 하면 거기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게 박혀있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배제하면서 자기들의 힘을, 권력을 가지고 있으려는 욕망이 사실은 아이들 때부터 계속 벌어지고 있는 거거든요. 나중에 결국에는 이 샤이론이 친구에 대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중에도 자기가 동경을 했을 거다, 혹은 이런 사람이 힘을 가질 거다라고 믿고 있는 그 모습으로 맨 마지막에 성인이 돼서 나타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람에게, 이 샤이론이라는 한 개인이 성장을 할 때 얼마나 많은 그 남성성, 맨 박스 이런 것들이 만들어져서 얘를 옭아매고 있었는지를 너무나 유려한 방식으로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최근의 한국 영화들이 남자 영화가 많다 이런 말이 많은데, 우리한테 그냥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별 고민 없이 그냥 그럴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성성에 되게 지쳐있었던,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이런 것 때문에 이렇게 피해를 받는 사람들도 있고 혹은 이런 것 때문에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누군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좋은 방식으로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또 하나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인물을 되게 여성스럽게 위치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는 샤이론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시켜서, 거대한 사회적인 어떤 그 체계가 얘한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그 밖에 있는 남자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를 되게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사실 케빈이라는 인물도 과하게 여자들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얘랑 자야된다 뭐 누구랑 어떻게 해야 한다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결국에는 샤이론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걸 숨길 수밖에 없는 거죠.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려면 여자가 도구가 돼야 되는 거니까. 그런 방식들을 되게 잘 보여줬던 것 같아서 아까 <브로크백 마운틴> 얘기도 하셨지만 그들의 사랑에 집중했던 그 방식과는 또 다른 면에서 되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병선: 이 작품의 원작이 연극이잖아요. 장 구조를 영화에서 그대로 따온 건지, 감독의 스타일인지 전작을 보지 못해 파악은 못했습니다. 원작을 알고 보면 감독의 어떤 스타일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알겠는데 그걸 안 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감독은 <문라이트>는 연극을 보고 내가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너무 유사하다 느낀 거 같아요. 그럼 감흥을 받죠. 내 얘기 같고. 그래서 깊이 감흥을 받아서 영화로 다시 만들고 싶다 생각했겠죠. 연극에 없는 삼장 부분을 좀 영화적으로 늘렸다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언뜻 든 느낌이, 194~50년대에 미국의 연극들 있잖아요. 수정사실주의라고 그러나? 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든지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연극들처럼 거리를 두면서 어느 한 부분들, 마약이면 마약, 학교폭력이면 폭력, 성적인 거든. 하나하나를 깊이 들어가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전체를 보여주니까 아 이게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부님께서도 불교적인 느낌이 든다고 그랬는데, 톡톡 던지듯이 인생을 보여주죠. 시간의 순서대로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는 과정을 쭉 그리면서. 주인공이 1장에서 봤던 ‘후안’이라는 마약상처럼 훗날 돼죠. 어른이 됐을 때 거의 또 흡사하잖아요. 이야기를 뒤집자면 후안의 어린 시절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불교적이든 윤회적이든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인생을 얘기하려다보니 그런 거다 생각도 들고.

연극제목이 <달빛 아래에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 그래서 차별에 관한 얘긴가? 이런 느낌이 좀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니고. 흑백 간의 얘기도 아니고, 인생에 있어서 한 소년이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 그걸 받아들이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드라마로서의 미덕들이 보였어요. 근데 아쉽거나 조금 관점을 달리 본다 이런 게 뭐냐면, 인생을 얘기하는 거라서 꾸며내진 않잖아요. 이 소년의 환경이 이렇고, 소년이 받는 갈등이라든지 차별이라든지 그런 걸 던지듯이, 우리에게 관조하듯이 보여주는 면이 있다 보니 운명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이제 마지막에 어릴 적 두 친구가 만나면서 얘길 나누면서 끝나잖아요, 영화가. 그래서 뭔가 좀 허무함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인생은 이런 거야, 꾸미지도 않고 작위적이지도 않고, 딱 던져놓고 이렇게 하면. 아, 이게 굴레 같잖아요. 벗어날 수 없는. 이 안에서 우리는 주어진 삶대로 살아야 하는가. 영화가 인생을 그리는 이유는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교훈을 주기 위함인데...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운 감정이 들었어요.

 

정재형: 크게 두 가지 메인 이미지가 대립이 돼요. 맨 마지막 장면에 보면 그 애가 어린 시절에 바닷가에 있던 뒷모습이 보이고, 뒤를 딱 돌아보면서 끝나잖아요. 영화 전체를 통해 메인 이미지 두 개가 교차 되는데, 하나는 실내 공간들이죠. 절망적인 뒷모습을 많이 보여줍니다. 그리고 폐쇄적이죠. 엄마가 빨간 조명 아래 나타나는데 그 장면이 주인공의 꿈에서 나타나죠. 공포스런 소리를 지르고 깰 정도로 그의 인생 전반을 지배합니다. 밥 먹을 때도 폐쇄적인 구도로 잡혀집니다. 양쪽에 기둥이 있는 것처럼 프레임이 나뉘어져 있고 정 가운데서 밥을 먹는 답답한 장면으로 구성되지요.

이런 절망적인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 반면에 개방된 이미지가 한편으로 존재해요. 초반에 후안하고 물속에서 수영할 때 보면 카메라 앵글이 그로테스크합니다. 하늘을 보여주는 앙각이지만 너무 극단적으로 하늘을 많이 보여주거든요. 또 한 장면은 애들이 축구를 하는데 아프리카 빈민들 처럼 헐벗은 애들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쾌활하게 축구를 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성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나옵니다. 상당히 유럽적이고 백인적이고 중상류층적인 고전음악이죠. 저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마지막에 바다를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그건 어린 시절로의 순수함을 강조했던 것 같아요. 후안은 어린 애에게 수영을 가르치면서 자유와 평등을 가르친 거죠. 그래서 카메라맨이 자유롭고 평등한 하늘을 갖다가 잡았던거 같아요. 그런 대사가 있었죠. 어디나 흑인이 있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어떤 흑인, 인간의 자존심, 성스러움 같은 것들을 갖다 놓죠. 주눅 들지 말고 흑인도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메시지를 주죠.

이런 두 개의 메인 이미지들을 통해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줬다고 봐요. 그런데 현실은 아직까지는 어둡다,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유일한 벗은 동성친구일 수 밖에 없다, 이런 말을 한편으로 하는 거죠. 이 친구는 자기가 원하지 않지만 운명처럼 마약도 하고 살고 있음을 보여주죠. 동성애도 그런 식으로 운명적이란 비유를 듭니다. 그런 의미들을 이미지로 보여준 것 아닌가, 현실은 어둡지만 뭔가 희망이 있다, 이런 것들을 대비시켜서 보여준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민병선: 후안이라는 1장에 나왔던 마약상의 죽음을 안 보여주잖아요. 뒤에 어떻게 됐다라는 걸 안 보여주는데, 그냥 대사로만 총 맞아 죽었다, 이렇게 나오잖아요.

 

정재형: 장례식 했다 그러고.

 

민병선: 네. 그래서 이 주인공, 이 친구도 결국은 또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는 유추? 추측으로 이렇게 흘러가서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으로 그린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예술적으로는 진지하게 삶을 가감 없이 그린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아름: 후안에 대해서 저도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후안이 그 샤이론이 와서 우리 엄마한테 마약을 팔았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라고 얘기를 하고, 샤이론이 나가고 나서 울잖아요. 울먹하면서 그걸 케이샤가 보듬어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으로 더 안 나오고. 근데 아마도 이 후안이 어렸을 때 자기가 아는 누군가가 자기의 식구들에게 마약을 팔았을 것 같아요. 그런 일을 동일하게 계속 당하면서,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 인거죠. 그래서 후안도 샤이론 만큼이나 되게 외롭고 그런 삶을 살았겠죠? 그걸 보여주는 순환적인 방식이 되게 흥미로웠던 것이 있고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던 걸 약간만 더 확장을 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이 영화에서는 아이들도 그렇고, 케빈하고 둘이 싸우는 장면 있잖아요. 너 자꾸 이렇게 약하게 대거리 안하면 다 무시한다 왜 강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얘길 하면서 케빈이 사이론을 때리고 둘이 막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이게 카메라가 희한하다라고 생각했던 게 둘이 엉켜있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 어깨, 다리, 이렇게, 이들이 엉겨붙어서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고, 몸들이 부딪히고 있는 그 부분들만을 쪼개서 보여주고, 나중에 청년이 돼서 케빈이 샤이론이 때리려고 하는 장면도 그렇게 길게 보여주지를 않았던 것 같아요. 그걸 그러니까 이 영화는 폭력이 영화 전면에 나서는 자체를 경계하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폭력적일 수도 있고 마약이나 여러 가지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자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방식, 그런 연출들이 괜찮았던 것 같고. 그게 아까 이야기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 남성성에 대한 경계를 장면으로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샤이론이 케빈한테 얘기를 하면서 자기의 감정을 얘기를 할 때가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장면도 같은 맥락에서 아주 상징적인 것 같아요. 너는 울지 않는구나 라고 얘기하면서 나는 많이 운다, 너무 울어서 내가 눈물이 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되게 중요했던 것 같아요. 남자아이들이 자기의 감정을 얘기하는 걸 못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배우고, 특히나 눈물은 숨겨야 된다고 배우고. 그런데 그 순간에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샤이론이 가지고 있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만의 어떤 줏대라면 줏대고, 중요한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들을 되게 영화가 찬찬히 조심스럽게 보여줬던 것 같아요.

샤이론이 어쨌든 자기의 정체성을 자기는 알고 있었지만, 느끼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금은 알 필요는 없다고 후안이 얘기를 하잖아요. 그리고 나서 자신이 어디에 끌리고 있는가를 자기가 깨닫게 되는 그 순간에 그걸 솔직히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자기의 힘으로 되어 있다라는 그 자체를 영화가 되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생각에 기댈 데가 없어서 동성친구를 만나게 됐다 이거는 약간 아닌 것 같고요. 이 아이가 정체성을 어떻게 용기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다른 많은 것들을 쳐내고 말할 수 있는가를 되게 천천히 훑어가는 그런 방식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박태식: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이미지들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게 샤이론이 어린 시절에 엄마가 나가 하면서 애한테 막 소릴 세게 지르고 들어간 게 계속 꿈에 마지막 순간까지 꿈에 도달해서 주인공의 꿈에서 아주 악몽으로 자리 잡잖아요. 또 그 친구랑 같이 바닷가에서 했던 그런 게 자리 잡고. 이 두 가지의 기억이 얘한테 계속 평생을 따라다니는 거예요. 나는 근데 이거를 게이영화라고 볼 수 있겠지 기본적으로는,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측면을 동시에 바라본 것 같아요. 뭐냐하면 엄마와 자식의 관계도 봤고, 자기가 이상적으로 삼고 싶은 남자, 얼마나 후안이 멋있어요. 그 사람의 엄마한테 약을 팔았다는 것 때문에 좌절을 하고. 그래서 나는 순간순간 움직여가는 그 아이 때부터의 감정의 움직임 같은 걸 굉장히 섬세하게 잘 잡아낸 것, 그런 것이 난 좋더라고요. 그리고 밖에 애들 있으면 두려워서 못 나가잖아요. 나가다 맞을 것 같으니까, 걔들을 계속 살피고 있고 등등. 여러 가지 보조장치를 많이 써서 이 샤이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아까 했던 얘긴데, 처음에 인생은 어디 가나 흑인이 있다 하는 얘기는, 글쎄 흑인이니까 기죽지 말고 살아라 그런 것보다는 보편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이. 흑인이라고 흑인에게만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어디나 똑같으니까.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에. 그렇게 하고 살아야 돼. 실제로 네가 흑인이라고 이건 가리고 이건 해야 해 이런 것이 아니라, 네가 추구해야 될 보편적인 가치가 있으면 그건 색깔과 인종이라든가 문화 같은 거로 구별이 안 돼. 그 얘기를 해준 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 이제는 백인이라는 것, 흑백은 사라지고 파란색 아이들만 남게 되는 겁니다. <문라이트>한. 그런 거를 처음에 이 사람이 되게 도사처럼 얘기를 하는구나, 그래서 그 이야기를 계속 갖고 가는 게 사람 인생이 그렇지 않잖아요. 살다보면 처음에 가졌던 생각도 사라지고, 그걸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중요하겠죠. 그래서 샤이론은 어쨌든 자기가 갖고 있는 인류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게이, 그렇죠. 그리고 내가 얘기 듣기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굉장히 착하대요. 그리고 굉장히 섬세하게 사물을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면을 여기서 잘 보여주는 것 같아. 그걸 우리가 잘못된 성적 취향, 그래갖고서 막 얘기를 할 수 있잖아요, 남성적 입장에서,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여리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이렇게 남한테 상처 안 주려고 노력하고, 오히려 자기가 한 대 맞는 게 낫고, 그런 것들이 좀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게이의 사랑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라는 것도 하나의 중요한 축이지만 오히려 차라리 이 사람이 게이로서 이러이러한 심성과 이러이러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라는 것도 보여주면 오히려 편견 같은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영화는 두 사람의 사랑에 정말 집중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는 두 사람의 사랑보다는 주변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섞어놓음으로 해서 좀 더 입체적이고 포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좀 잘 만든 것 같아요.

 

정재형: 종래에는 흑백 갈등 영화가 많았는데, 흑인들이 미국사회에서 백인들에 치여 어렵게 살고 있는 상황들을 항변하는 식의 그런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좀 포커스가 다르지요. 스파이크 리부터 바뀐 것 같아요. <Do The Right Thing>(똑바로 살아라)에서 보면 흑인 내부의 문제로 돌리고 있죠. 우리 흑인이 이렇게 못 사는 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남 탓 하지 마라. 이런 식의 시각을 줬거든요. 그런 시각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마약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공부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합니다. 근데 공부를 못 할 수밖에 없는 건 집에 어머니 마약문제도 있고, 또 학교에서 폭력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학교라는 게 중요한 사회이고, 작은 조직인데, 힘없고 불쌍한 애들이 서로 북돋아주는 분위기가 아니고, 놀리고 린치하는, 그런 사회로 묘사하고 있죠. 사회화 과정을 보여줍니다.

나중에 가해를 했던 애가 있잖아요. 그놈이 조직을 해가지고 케빈을 꼬드겨서 케빈으로 하여금 때리게 하죠. 가해한 애들은 은닉이 됐고, 신고도 못했지만, 주인공은 오히려 가해한 놈을 가해함으로써 경찰서로 가게 되죠. 이 사회적 논리는 선한 폭력을 배제하는 방식이랄까. 정의로운 자는 그 사회 안에서 완전히 아웃사이더로 남게 하고 퇴출되는 사회화 과정을 보게 되죠. 그런 것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너는 또 아웃된다, 또 왕따가 된다, 이런 식의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게 백인이 아니라 흑인 스스로에 의해서 저질러진다는 것이죠. 주인공은 백인한테 린치를 받아 사회 부랑자가 된 게 아니고, 같은 처지의 흑인들에게 린치를 당한 거잖아요? 이런 시각이 흥미롭다고 생각을 해요. 그게 미국사회의 어떤 문제를 축소적으로 보여준 거죠. 그걸 운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미국 당국 입장에선 정치적으로, 사실적으로 와 닿을 것 같아요.

이 영화에는 중요한 여자 두 명이 나옵니다, 어머니란 존재와 죽은 후안의 아내 테레사입니다. 테레사는 거의 양모나 후견인처럼 그려져 있어요. 어머니도 정확히 그려져 있지 않지만 남편 하고 사이가 안 좋은 거죠. 남편이 집을 떠낫거나 죽어서 불행한 여자로 설정되어 있죠, 그 어머니 때문에 주인공도 망쳐지는 거죠. 끝까지 반항심을 갖고, 비뚤어지게 되고요, 흑인들이 처한 상황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요.

단지 그 여자만의 문제는 아니고 가족의 파괴로 인해 악순환 되어가는 늪과 같은 구조를 보여주는 것 같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흑인이 제대로 자립해서 잘 살 수 있겠나 하고 말하죠.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불안정한 삶을 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태식: 저는 지금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하는데, 학교에서 그런 폭력이 있는 게 흑인 학교에서만 있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백인 학교에서도 왕따가 되고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까 얘도 그렇고 엄마 마약하고 아빠가 떠나가고 불행해지는 거는 백인 사회도 그럴 거고 우리나라 사회도 그럴 수 있죠. 그런 남성적인 것. 이런 거니까, 나는 이 문제가 흑인 사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은 이게 보편적인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럼 거기에서 진짜 아름다운 가치는 뭘 찾아야 되는가, 진짜로 너의 색깔을 찾아내야 하는 그 과제를 줬다는 점에서 저는 이것이 이제 흑인 영화로 꼭 분류하긴 힘들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보다는 흑인영화라는 그 틀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하는 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뭐 근데 인제 보면 이 상황은 흑인들의 절대 다수가 처할 수 있는, 쉽게 노출 될 수 있는 상황이 분명해요. 아무래도 백인 사회에선 이런 일이 자주 있을, 상대적으로. 그렇지만 같은 문제는 우리나라 사회에도 있지 않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자기 안의 자기를 찾아 나가는가 하는 게, 굉장히 심각한 질문을. 그러면 이게 꼭 어떤 하나의 문제라든가 어디에 소속된 영화로 보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오히려 지평이 오히려 확 넓히지 않았는가요. 난 처음에 흑인들만 나와서 흑인 뭐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거는 아니더라고요. 하여튼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민병선: 미국 영화도 우리의 사극처럼 흑인만 나오는 영화, 그런 언더그라운드 쪽에서는 있을 것 같아요. 굳이 자기들만 나오는 영화면 흑인의 문제, 백인과 대립되는 기준으로 갈등이나 고민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이 흑인끼리 만드는 인생 얘기 같은 거, 그런 장르로 분류되는 영화로 봤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흑인영화다 라는 선입견도 없어지고, 그랬어요.

중간부터 드는 고민이랄까 뭐 드는 게, 어떤 돌파구라는 것이 있잖아요. 뭔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지점에서 성적인 문제, 게이나 뭐 이런 쪽으로 가는 거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느껴요. 대중 관객이 보면 삼천포로 빠졌다라고 할 수도 있거든요. 가다가 딴 데로 확 하고 이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인공이 소년이었을 때, 1장이요. 처음에 그런 대사를 하긴 하더라고요. ‘호모랑 게이의 차이가 뭐냐?’ 이야기를 초반에 나온 게 있고, 그 다음에 중간쯤에서 소년 둘이 왕따를 당하고 할 때 서로 위로할 때 게이 씬, 해변가에서 사랑의 행위를 해버리잖아요. 정체성의 혼란이, 꿈속에서 나타나죠. 남녀가 성행위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것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갖고 있는 정체성에 있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고 하려는 무의식의 발로겠죠. 근데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제자리로 끌려서 오잖아요. 그래서 가만 보면 흑인의 어떤 삶의 문제 뭐, 어릴 적부터 환경의 문제, 어떤 계급의 문제 이런 거를 쭉 논하다가 동성애로 가는 거는 혼란스럽더라고요. 예술 영화는 그럴 수 있는데 대중적으로는 이러면 관객들은 싫어하잖아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송아름: 저는 나름 이 영화가 되게 일관성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후안이 처음에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게이와 호모의 차이가 뭐냐 했을 때, 게이라고 그러면 괜찮지만 호모라고 하면 싸워야 한다. 그건 비하하는 것에 대해서는 네가 거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고.... 케빈의 꿈에 대해서는 케빈이 그러잖아요. 지하 어디에서 누구랑 자려고 하다가 들켜서 정학 맞을 뻔 했는데, 어쩌고저쩌고.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샤이론이 그에 대한 상상을 거의 악몽처럼 꿨던 것 같아요. 샤이론이 나중에 그 성장한 케빈의 모습을 꿈에서 봤을 때는 몽정 비슷하게 그런 행위가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은 사실은 처음부터 되게 명확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어떤 식으로 노출이 될까를 그리고 샤이론이 이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가지고 이제 영화는 계속 이야기를 해 나가니까 저는 꽤나 일관성이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마지막에 이렇게 샤이론이 케빈의 식당에 찾아갔을 때 저는 이 사람이 중간에 나가면 어떡하나 사실 그게 정말 많이 걱정됐어요. 샤이론이 잠깐 기다려 하고 나서 케빈이 뭘 하고, 잠깐 기다려 한 다음에 음식을 가져오고 이랬을 때. 저기서 샤이론이 나가서 그냥 차를 타고 가버리면 어떡하지? 이게 걱정이 됐는데, 끝까지 케빈의 집까지 같이 가고 결국에는 얘기를 하잖아요. 네가 나를 처음 만져줬던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기까지 딱 갔을 때, 이 영화가 정말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명확하게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영화가 저는 나름대로 일관성을 가지고 쭉 끌고 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민병선: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게, 그 둘이 마지막에 같이 차를 타고 너 잘 데 없잖아 그러고 갔잖아요. 그럼 같이 갈 것 같아요, 아니면 따로 갈 것 같아요? 둘이 다시 만나서 또 사랑을 할 건지 안 할 건지. 일관성을 얘기해서 나는 혹시 거기까지 생각을 하셨나.

 

송아름: 그것까지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처음에 바닷가 있는 데로 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샤이론은 그걸 확인을 하러 간 거고, 케빈도 모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둘이 기대는 장면이 나오죠. 그 이후가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재형: 가정이 있잖아요.

 

송아름: 아니 근데 깨졌잖아요. 애만 키운다고 나왔잖아요.

 

민병선: 아 그래서 깨졌다라고 하는 구나.

 

박태식: 어릴 때 샤이론이 후안에게 질문을 했고, 중요한 순간에. 그 다음에 그 사람이 가르쳐주잖아요. 호모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성장해서는 바닷가에서 둘이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그리고 돌아와서 하고.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순간마다 그것이 있기는 했는데, 이게 영화를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핵심주제인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이 생긴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너무 많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깔아놨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 이 사람이 얘기하고 있는 건, 그건 최저에 있지만,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좀 더 다양한 흑인들의 삶도 어디나 찾을 수 있는 보편적으로 다양한 것이 있다라는 거. 그걸 좀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샤이론이 어릴 때 바닷가에 딱 마지막장면이 바닷가에 서 있잖아요. 바닷가에 가다가 애들 하는 걸 보고. 그런데 실제로 파랗게 보이데요. 그걸 오히려 중요하게 생각을 했던 것 아닐까요?

 

송아름: 핵심을 뚫고 있다기보다는, 제 생각에는 이 영화가 맨 처음에 이 아이가 쫓길 수밖에 없는 그 상황, 우르르 남자애들이 들어오면서 쫓겨야 되는 그 상황이 샤이론이 등장하는 첫장면이고, 아주 상징적이라는 거죠. 남자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을 보여주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소년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그랬을 때 그 폭력성이 계속 도드라지면서, 그것과 함께 이 남자아이의 어떤 소수자로서의 방향들이 보이는 것이 저는 잘 가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고, 그리고 그 외에 당연히 다른 환경들도 다 중심이 될 수 있죠.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사실은 중요한 게 보일 수 있을 텐데, 저는 여기에서 이 남자애들이 갖고 있는 그 과한 남성성이 도드라지게 보였고, 그것에 대비돼서 이 게이의 모습을 보여줬던 게 되게 괜찮았던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다른 환경은 당연히 다 같이 가는 거죠.

 

박태식: 끌고 가는 지점이, 끝으로 쭉 해서 도달하는 지점이 게이라고 한다면, 얘가 했던 모든 이야기는 그 논리 구조 안에서 설명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것보다는 같은 남자, 내가 그래서 그런가, 같은 남자들이더라도, 나는 게이가 아니더라도 그런 폭력성이 너무 싫거든. 나는 정말 잘 울 수 있고, 아까 엄마 미치도록 그립다고 했잖아요, 나도 엄마 미치도록 그립고 하는 게 꼭 말하자면, 물론 게이들이 그런 걸 갖고 있다고 하면 신선하고 우리와 다르긴 하겠죠. 그런데 그것보다는 누구나 다 사람에 따라서는 남성적인 폭력성을 거부하는 그런 남자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반드시 게이여야 한다 이런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서 하나의 패턴을 보여주는 겁니다. 감독이 그 패턴이라고 해서 감독이 갖고 있는 인간의 휴머니즘, 휴머니티의 그것이 함몰돼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송아름: 휴머니티가 함몰된다는 것이 아니라요, 지금 남성의 폭력성을 더 싫어하고 더 겪었기 때문에 게이가 된다라고 표현을 하시면 안 될 것 같고요. 정체성이 있는 걸 사실은 발견을 하는 거죠. 아니 그것을 샤이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발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구요. 그래서 저는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그 부분을 재밌게 보시는 것 자체가 저는 약간 이상한데, 그게 되게 많이 보인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이상한가요? 잘 모르겠어요. 지금 어쨌든 남자 분 세 분과 제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데.

 

민병선: 게이라는 게 선입견이 있다 보니 그런데. 어떻게 보면 폭력의 반대되는 게 사랑이잖아요. 외롭거나 왕따 당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사랑을 하려는 거잖아요. 사랑을 얘기하려는 건데 이게 게이처럼 보이는 거잖아요. 그게 어떤 모성 같은 그런 사랑으로, 뭔가 치유의 개념, 수단? 이런 걸로도 장치화해서 쓴 건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긴 한데요.

 

정재형: 주인공은 폭력의 첫 피해자였습니다. 집단폭력의 피해자였죠. 주인공은 얼음물을 얼굴에 끼얹으면서 변해가죠. 자기가 폭력을 하는 가해자로 변하고 감방 갔다 와서 약을 파는 그런 인물로 변했죠. 주인공은 피해자였다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어찌어찌 하다 보니까 결국은 폭력을 옹호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등학교에서도 분명히 보여줬거든요. 폭력에 대한 반대적인 폭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감방에 갔죠.

주인공의 인생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죠. 영화는 폭력적인 남성성이 거짓으로서의 남성성이라고 설득시킵니다. 겉으로 위장되어 있는 삶. 주인공이 마지막에 게이의 정체성을 갖잖아요. 케빈을 찾아가잖아요. 물론 케빈이 불렀으니까 갔지만 이 사람에게는 항상 케빈에 대한 생각이 있었어요. 있었는데 케빈이 불렀으니까 바로 달려간 거죠. 사실 케빈도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주인공을 보고 싶었던 거예요. 고등학교 시절 주인공이 맞을 때 케빈의 안타까운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여럿 나오거든요 때리고 싶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케빈의 심정을 드러낸 거죠. 그 잠재된 욕망이 나중에 그를 부른 거겠죠.

흑인 남성사회에서 남성들이 위선적인 가장 속에 있다,라는 걸 솔직하게 고백하는 영화라고 보고 싶습니다. 주인공의 외모를 보면 드러나요. 위장된 틀니 낀 거라든가 화려한 장신구라든가 이런 것들이 허위를 나타내거든요, 이런 장면이 나오죠. 돈을 똘마니가 가져왔을 때 막 협박하면서 애가 겁 먹으니까 너 겁 먹으면 안 된다, 이 세계에 살려면 허위가 있어야 한다, 이런 걸 가르쳐 주잖아요. 저는 이런 것들이 같은 맥에 있다고 봅니다.

이 영화는 마지막에 유일하게 너 밖에 없다,라고 고백하면서 친구끼리 포옹을 하는 거죠. 이 세상은 차갑고 냉혹하고 가식적이죠. 사람들도 근육질이고. 그런 남성성을 보여주지만 그건 결국 허위다. 결국은 엄마 앞에서 울고 끝없이 엄마를 생각 하는 그런 연약한 남성성 그걸 감춰야만 되는 외로움, 그런데 마지막에 님성 둘의 포옹을 통해 계속 허위적인 남성성을 갖다 녹이는 휴머니즘을 보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박태식: 정리를 하자면 우리가 어디서 부딪치느냐 하면, 남성성에 대한 고발인가 아니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건가. 둘 사이의 경계선이 있다면 나는. 남성성에 대한 고발이 강하고요. 이 둘을 동시에 같이 갖추고 가려고 한다면 나는 영화가 너무 복잡해지는 것 같아요.

 

송아름: 그런데 그게 차이점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는 게, 과도한 남성성, 위선적인 남성성 안에서 이 사람이 고통스럽게 찾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저는 그렇게 다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보다 분리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 잠시 프레스 키트를 보면 사실 이 스토리 첫 문장이 비문인데, ‘마이애미를 배경으로 한, 한 흑인 아이가 소년이 되고 정체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푸르도록 치명적인 사랑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이게 비문이에요. 유심히 읽다가 비문을 찾은건데,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사실은 다 직감을 하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정체성은 성적인 정체성이라는 걸 생각했을 거고....

다시 얘기하면 전 부딪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두 개가 저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이 남성성이라는 것 안에서 아주아주 힘겹게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찾는데 무엇보다 영향을 끼치는 것이 헤게모니적인 남성성이니까요.

 

박태식: 그러면 게이영환데 논리적으로 훨씬 구조가 복잡해졌다, 그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요. 지금까지 다루던 게이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면 게이영화다라는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다는 거고. 나는 그렇게 넣기에는 영화가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민병선: 저도 이 부분이 조금 고민인 부분인데, 영화는 창작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연극이라는 원작이 있잖아요, 영화의 3장. 블랙 부분은 연극에는 없는데 만들어 넣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그러니까, 연극은 한 소년이 성장해가는 얘긴데, 배리 젠킨스 감독은 그걸 보고서 뭔가 감흥을 받아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할 때, 해석을 할 때 게이 부분이 추가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재형: 게이 영화다, 아니다 할 때 나는 게이영화라고 봐요. 마지막 3막 부분은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었어요. 레스토랑문에 달린 벨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전체를 관통하는 통일된 이미지입니다, 그 문에 들어갈 때. 마지막 나올 때 벨이 보이거든요. 그건 구조죠. 그 부분을 함축하는 상징적 기호가 벨과 벨소리고. 쌍으로 되어있다는 운율(rhyme)과 벨소리를 통해 둘의 조화로운 해피엔딩을 그리는 겁니다.

레스토랑에서 집에까지 전 장면이 왜 감동적이냐면, 둘이 쭈뼛쭈뼛하면서 마지막에 정말 마음의 문을 여는 이것까지가 너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이지요. 상당히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 부분을 하이라이트로 본다면 게이영화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물론 단순한 게이영화가 아니에요. 사회비판영화이기도 하죠. 젠더와 계급과 인종갈등이 다 들어가 있는 영화예요. 그래서 미국 흑인이 미국사회에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하는 역사적, 사회적인 문제를 잘 배합했고 은유화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중심은 게이영화인 것이 마초에 상반된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퀴어적인 감성일 수도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영화의 원어에는 동성애자를 부르는 게이보다도 더 비하된 패곳(fagot)이란 용어가 나오거든요. 꼴통 같은 놈들 이런 식으로 비하해서 한 말인데, 그게 마초적인 시각인 거거든요. 마초이즘이라는 것 자체가 위선이야 라는 것 자체를 까발리면서, 게이를 중심에 놨으니까 저항적인 의미가 있는 거죠. 정치적인 의미도 있는 거고. 흑인사회에 마초이즘을 반성하는 시각도 있다고 보는 점에서, 게이라는 소재를 전면화 시켰다는 점에서 게이영화고, 정치사회적인 의미까지도 주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타임즈에서 이번에 화제가 됐던 영화들을 논하면서 두 가지 측면으로 성분표를 했더라고요, 어느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있나. 하나는 오락 대중성과, 그 다음에는 예술성, 진지함. <문라이트>는 50대 50이에요. <라라랜드> 같은 경우에는 오락성이 조금 더 강하고 진지함이 40프로 정도 되죠. 이건 딱 50대 50으로 나뉘는 유일한 영화더라고요. 그러면서 이게 굉장히 많이 노미네이트 돼 있는데 저는 오히려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을 못 받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미국사회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저항적인 문맥을 읽으면 백인 중산층 남자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영화는 떨어질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예측을 합니다.

 

박태식: 이 3부가 감독이 만들어서 넣은 거란 말이죠?

 

정재형: 내용은 있는데 자세히 설명은 안 돼 있어요. 전화통화만 한다는 거죠.

 

박태식: 그러면 감독이 갖고 있는 입장은 분명해지네. 그러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걸로밖에 볼 수밖에 없겠네. 나는 감독이 원작을 그대로 봤다면 나는 좀 다른 설명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3장을 이렇게 붙여서 만들었다면 그러면 송아름 선생님의 얘기가 맞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해 놓으면 흥행하기는, 큰 상 받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송아름: 그걸 왜 분리해서 생각을 하시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안가네요.

 

박태식: 나는 게이라는 게, 인간성을 찾아나가는 것에 비해 하부 구조라고 생각해요. 하부 논리라고. 그러니까 여기에 소속되는 논리지 이것이 곧 이 논리를 과도하게 넘어갈 수는 없다고 보는 겁니다. 나는 그래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송아름: 아까 남성성이라는 것과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것 이 두 개를 가지고 어느 쪽으로 얘기를 하는 거냐고 하시는 거잖아요. 근데 전 이게 왜 분리가 돼야 되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거죠.

 

박태식: 아니 두 개를 분리를 시킨다는 건 뭐냐 하면, 아까 얘기했잖아요. 보편성인 인간성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위에서 추구해야 될 가치라고. 그러면 거기에 게이도 들어갈 수 있고 우정도 들어갈 수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단 말이죠. 그러면 감독이 그 쪽에 방점을 줬다면 게이라는 건 저 사람들의 삶이 참 아름답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보여주는 것 그 이상의 것을 읽어야 되잖아요. 그 이상의 것은 거기에 있겠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3부를 일부러 만들어서 넣었다면 감독은 의도가 분명해집니다. 그럼 내가 생각했던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거죠. 감독의 의도는 분명히 게이의 삶에 가는 거죠. 그런데 그래서 아마 편견이 있어서 그럴 거예요, 내가. 게이라는 영화를 보면 언제나 나는 약간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이 좀 있어요. 지나치게 왜곡시킨다는 것도 문제가 있고, 지나치게 왜곡시켜서 방어적으로 나오는 것도 문제가 있고. 그게 우리 삶의 한 부분인데 왜 그것을 분리시켜서 생각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거부감이 있어서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정재형: 여기 두 여자가 나오잖아요. 후안과 살았던 테레사라는 여자하고 엄만데, 사실 두 여자의 존재가 미미하게 나와요. 나는 그게 어떤 의도도 있다고 봐요. 흑인들이 굉장히 거칠고 마초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데 위선적이다 이런 걸 비판하면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여자들이 우울하고 음지에 살고 있다는 걸 드러내죠. 피해자처럼 보이기도 하죠. 게이영화가 여러 유형입니다. 이건 다른 게이영화하고 좀 달라요. 반 정도는 정치사회적인 백그라운드를 많이 강조한 영화라고 보여져요. 우리나라에도 과거에 박재호 감독인 만든 <내일로 흐르는 강>(1996)이라는 영화가 있었거든요. 충무로 최초의 게이영화라고 보고 싶은데, 그 이후에 나왔던 게이영화하고는 아주 달라요. <문라이트>가 <내일로 흐르는 강>과 비슷합니다. 둘 다 어쩔 수 없이 게이가 될 수밖에 없는 남자를 그리고 있거든요.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는 아버지가 마치 군사독재시절의 군부처럼 그려져 있어요.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체계에서 혐오를 가진 남자가 결국은 결혼을 기피하고, 우연히 갔던 게이바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면서 그 남자에게 끌려서 게이가 된다,라는 식의 사회적 설정을 하고 있죠. 선천적으로 성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가부장적인 폭력을 보고 혐오를 느낀 남자가 게이가 된다, 동성애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라는 식의 사회적 자아를 보여주더라고요.

<문라이트>가 똑같진 않지만, 인간적인 부분을 더 잘 묘사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좋게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건 정치사회적으로 흑인이 처한 위치를 은유적으로 보여주었고, 의도적으로 구조화돼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처음 에피소드에 나왔던 후안과 똑같은 직업을 되풀이되고 있다,라는 설정은 흑인들이 변함 없이 낮은 지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는 절망적인 사회적 위치를 설명하는 구조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는. 단지 게이 정체성만을 추구한 다른 게이영화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민병선: 이 영화의 지배적인 이미지는 성장기 모습인 것 같아요. 아이가 매운 걸 먹으면 얼굴을 빨갛게 그리고, 추운 데 가면 얼굴을 파랗게 그리고 사람의 얼굴은 변한대요. 흑인 인권 얘기할 때 나왔던 것 같은데, 흑인은 춥거나 맵거나 덥거나 무조건 까맣대요. 우리 인식이 그렇대요. 그래서 흑인이든 아니든 똑같다라는 거죠. 그래서 <문라이트>도 그런 의도인 것 같아요. 영화의 지배적 이미지는 한 소년이 성장해가면서 겪게 되는, 인생에 있어 겪게 되는 많은 장애물과 난관 속에서 어떻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후반부 하이라이트 쪽에서 그 이미지가 좀 세다보니까 그쪽으로 해석이 가는 부분도 좀 있는 것 같고. 저는 하여튼 이 영화가 제대로 평가를 잘 받으려면 정말 아이의, 소년의 얼굴에 닿는 달빛마냥 제목 그대로 문라이트가 돼야 작품성이 잘 인정받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정재형: 그런데 <문라이트>가 왜 <문라이트>예요?

 

민병선: 달빛 아래에서는 빛에 의해서. 언뜻 느낌은 사람을 피부색으로 보았을 때에 우리가 잘못 보잖아요, 불을 끄고 보면 흑인이나 백인이나 동양인이나 다 똑같은데. 가시광선에서는 그런데. 그런 한 소년의 꿈을 어쩌면 우리 사회가 억압하고 눌러서 없애버린 건 아닌가, 그래서 그 아이의 달빛이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었던 건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같습니다.

 

정재형: 네. ‘블랙 앤 블루’라는 제목의 뮤지컬도 있어요. 근데 블루는 멍든 자국을 블루라고도 하거든요. ‘블랙 앤 블루’의 블루가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흑인의 고통스러운 멍 자국, 멍들은 모습으로도 읽힐수 있거든요.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면 주인공의 세 얼굴을 겹쳐놓은 것인데 마치 멍투성이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구요. 그런 처절함 같은 것들, 그런 멍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읽히죠.

 

송아름: 이 포스터 되게 인상 깊게 봤는데, 이게 세 명 얼굴이에요. 쪼개서 색만 다르게. 그래서 애기 때랑 청소년기랑 성인이된 샤이론이 하나의 얼굴이 완성되는 거여서. 블루... 그건 잘 모르겠네요.

 

민병선: 이 영화가 수준이 높은 게, 장르영화는, 하나의 목표점을 향해서 파고들어 가서 안 보이는 곳까지 제대로 다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 게 장르영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영화는 해석을 여러 개로 할 수 있게 다층적이잖아요. 블루라는 이미지도 잘 보면 긍정적일 수도 있고, 소년의 어릴 적 추억에서나 볼 수 있었던 희망 이런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정말 멍 자국처럼 전체의 억압의 색깔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알아서 잘 해석하라고, 감독이.

 

정재형: 네. 어쨌든 이 영화는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도전적인 영화라는 점에서 올해를 결산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미국영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박태식: 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감독, 작품, 각색 주요 세 개의 상에 노미네이트가 됐대요. 근데 나는 이게 하나는 받을 것 같아요. 각색 정도를 받지 않을까요?

 

정재형: 저는 여덟 개 부분 노미네이트된 부분에서 하나도 못 받을 것 같아요. 과거에도 그런 적이 많았어요. 최근에 마틴 루터 킹을 그린 <셀마>라는 영화가 대표적으로 탈락한 영화였죠.

 

박태식: 나는 세 개는 받을 것 같고, 각색 정도는 받지 않을까요?

 

송아름: <라라랜드>보다는 저는 2.5배 정도 좋았습니다.

 

민병선: 저는 감독상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것으로 오늘 합평회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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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성진수

등록일20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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