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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동주> 합평회 (박태식, 이대연, 이수향, 송아름, 정재형)



 

감독: 이준익    각본: 신연식

주연: 강하늘(윤동주 역), 박정민(송몽규 역)

 

<동주> 합평회

 

날 짜: 2016년 2월 25일

참석자: 박태식, 이대연, 이수향, 송아름, 정재형

 

영화 <동주> 합평회 시작하겠습니다.

 

박태식 : 제가 윤동주의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지는 꽤 됐어요. 보통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애기를 듣고 나서 실제로 만들어지기까지는 워낙 우여곡절이 많아서 항상 의심을 하는 편인데, 어쨌든 이 영화는 극장에 올라왔고 보게 됐어요. 소문이 중간에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와서 됐다, 라는 얘기를 들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워낙 저예산으로 만들고, 많은 주목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영화 만드는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많았기 때문에 걱정을 했었는데 어쨌든 극장에 걸렸다는 건 중요한 겁니다.

제 생각에 윤동주의 일생을 다룰 때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는 한쪽은 사상이 강건한 독립운동가적인 측면에서 다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조화를 이루는 게 감독으로서 쉽지 않았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제 영화를 보니까 35년에서 45년까지 한 10년 정도 되죠. 사실 그 때가 윤동주로 보자면 우리에게 알려진 인생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 시간에 만주의 은진중학에서 시작해서 경성의 연희전문, 동경의 릿교대학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이 했던 학업을 따라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종사촌인 송몽규와의 관계를 추적하는 거죠. 그 사이사이에 윤동주 시인의 수려한 작품들을 영화 전개에 맞게 배치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으니까, 말하자면 한 번에 세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는 부담이 감독에게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대단원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윤동주의 사망으로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이 세 개를 동시에 다루다보면 110분 동안에 지루해질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제가 일차적으로 받은 느낌으로는 사실 나열식으로 진행되면 지루할 뻔 했는데 감독이 적절하게 배치를 했어요. 어떻게 배치되었느냐는 우리가 얘기를 나눠봐야 겠지만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에서 우선은 긍정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대연 : 저는 평을 한다기보다는 감상이 맞을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제 감성을 저격하는 영화였어요. 예전에 윤동주 시 외우고 다녔는데…. 저는 약간 영화 같다는 느낌보다는 투명한 흑백 시집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영상으로 보여주는 시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사실 윤동주는 그 당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 6~70년대 와서야 알려진 거잖아요. 당대에는 이름 없는 문학청년으로 죽어갔던 이 시인의 삶의 궤적을 다시 따라가 본다는 면에서 의미 있었던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이수향 : 저도 <동주>라는 영화가 준비된다는 얘기를 듣고 관심 있게 지켜봤는데요, 영화는 사이즈는 작지만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흑백의 영상미였습니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색깔이나 추구하는 방향과 흑백이라는 방식이 잘 맞는 것 같아요. 흑백으로 촬영했기 때문에 영화가 약해보이거나 다운돼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고전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오히려 예전에 보았던 오래된 좋은 영화들을 보는 것 같은 효과를 주더라구요. 이준익 감독 인터뷰를 들어보니까 유아인 배우도 하고 싶어 했었고, (제작비 탓도 없진 않았지만) 꼭 흑백으로 찍지 않았어도 됐었는데, 여러 이유로 이 영화는 이 정도 크기의 배우와 이정도의 영상미로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싶어서 이렇게 찍었다고 하던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영화엔 워낙 현란하고 세련된 화면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이 영화의 단조로운 화면이 도리어 문학적 감성이나 잔잔한 내레이션 등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주는 거죠.

제가 이 영화에서 제일 기대했었던 것은 저항 시인으로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윤동주를 어떻게 새롭게 그려낼까의 측면이었습니다. 혹시 너무 항일적인 의식만 전면적으로 드러나서 영화가 일차원적으로 흐르지 않을까 싶은 우려도 있었는데, 저는 그 부분에 있어 50%의 성공과 50%의 아쉬움이 있었다고 개인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좋았던 건 윤동주를 시대 앞에 괴로워하는 선각자 내지는 의식이 전면화 된 인물로만 그리지 않은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의 윤동주는 그 나이에 걸 맞는 고민, 즉 하고 싶은 일에 욕망과 주변의 우려, 사촌이자 친구이면서도 자신보다 뛰어난 몽규에 대한 열등감, 그러니까 재능 있는 자에 대해 옆에서 그걸 보는 사람이 가지는 미묘한 질투심 같은 것들을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하고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항일 의식으로 ‘윤동주 시인’를 끌어온 것이 아니라, 그저 시를 쓰고 싶은 시인지망생으로서의 ‘동주’를 끌어오고 있다는 것이죠. 이 사람이 원하는 건 시대나 역사적 책무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시인이 되고자 하니까 모국어로 시를 쓰고 싶다는 것, 이게 그에게 문제가 됩니다. 시를 제대로 쓸 수 있다는 건 한 언어와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감각, 그 언어의 토양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국어’인 ‘조선어’로 시를 쓸 수 없다는 것, 당시 내지(內地) 일본의 언어인 ‘国語’로만 시쓰기가 가능해진 억압적 상황은 ‘동주’를 더 이상 문학청년에만 머물러 있게 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시인이 되고 싶다고 인생의 항로로 결정하는 순간, 이 사람한테는 어쩔 수없이 역사가 침투하게 되는 것이죠. 시인으로서의 윤동주가 가지는 그런 미묘한 지점들을 이 영화가 굉장히 적절하게 돌파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평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말미에 갔을 때 저는 두 인물이–물론 영화적인 재미나 대중적 호소력으로는 그게 나을 수 있었겠지만-감정적으로 너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그게 약간 아쉬웠습니다. 제가 항상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 느끼는 것이 영화가 괜찮은데 싶다가도 마지막쯤에 가서 속된 말로 뽕삘이 난다고 할까 약간 과잉된 감성이 들어가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부분으로 저한테 느껴졌습니다.

 

송아름 : 저도 영화를 재미있게 봤는데 최근 식민지 시기를 그린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사실 우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식민지라는 시기 자체가 워낙에 드라마틱할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어떤 나름의 상상력이 과해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대호>, <경성학교> 거기서 그려지는 식민지가 오히려 일차원적으로 흐르거나 아니면 과장하는 방식이 아니지 않나 싶었는데 <동주>는 거기에서 적절한 선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 얘기가 가장 많이 나올 수밖에 없을 텐데 아까 적절하게 인물이 시대 안에서 배치가 될 수 있었다는 건 사실 시의 역할이 크게 있을 것 같아요. 요새 연극에서는 시극이나 낭송 공연 같은 것들도 하는데 그런 것들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배우는 윤동주는 대부분 이육사랑 비교를 하면서 배우잖아요. 이육사는 ‘진취적이고 남성미적으로 표현’한 작가로 이야기되고 윤동주는 ‘여성스럽고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항일정신을 표현한 작가’ 이런 식으로만 얘기가 됐었는데 그것만이 아닌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볼 때가 아니라 보고 나서 연표가 적힌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볼 때, 나보다도 어린 저 사람이 저런 생각을 하고 저렇게 갔겠구나 하는 생각과 형무소에서 맞았던 주사나 이런 것들은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구체적으로 나왔었는데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이 겹치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 흑백이 너무 좋았는데 그게 너무 디지털의 느낌이었어요. 흑백이긴 한데 너무 쨍해서 그게 조금 더 흐리거나 필름의 느낌이었으면 정말 좋았겠다 싶었어요. 만든 흑백의 느낌이 나서 그게 조금 아쉬웠습니다.

 

정재형 : 저는 영화 재미있게 봤고요, 시인 윤동주에 대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것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어찌 보면 윤동주의 이야기가 아니고 송몽규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윤동주나 송몽규의 이야기도 아니고 사실 그 시대를 살았던 억울한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처럼도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의 새로운 점이라면 윤동주를 보통은 부각시키려고 할 텐데 이준익 감독은 시대를 부각시키려고 했다는 점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싶고요. 이준익 감독이 묘사한 식민지 시대정신이 지금 2016년을 사는 한국 사람에게도 와 닿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것은 바로 열패감이죠. 마지막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울먹이면서 만들어진 자술서에 서명하는 장면에서 드러냈던 심정이 열패감이죠. 주권을 잃고 독립운동에 실패했던, 특히 송몽규가 그걸 잘 드러내죠. 윤동주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들이 느낀 열패감 이런 것들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이자 주제인데 지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치 사회적인 분위기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자신이 없고 패배적인 열등의식 속에서 현대 한국인이 살아간다면 굉장히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봤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많은 공감들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박태식 :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감성에 젖고 좋았던 이유가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내가 많이 아는 사람들이에요. 정지용이 나와서 윤동주와 대화를 나누면서 제일 부끄러운 건 모르는 거다, 아마 둘이 실제로 이야기를 나눴을지는 모르죠. 하지만 ‘서시’에 보면 부끄러움에 대한 얘길 하잖아요. 그 아이디어를 누구한테 얻었을까 그걸 가상적으로 대화로 만들어 낸 거죠. 근데 정지용이라는 분은 휘문고를 나왔어요. 그리고 휘문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납북이 된 분이에요. 그래서 내가 휘문고를 다닐 때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계속 정지용에 대한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분을 많이 알고 있는데 봤고, 그리고 우리 장인어른이 은진중학교를 나오셨는데 윤동주가 선배에요. 또 은진중 동년배에 문익환 목사님도 있지요.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 또 문성근이고 여기 정지용으로 나와요. 그런 것도 의도적으로 영화를 재미나게 만들었을 거 같아요. 또 일본군이 운영하던 만주 군관학교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근데 만주 군관학교는 박정희가 나온 학교죠. 이런 많은 암시들이 오버랩 되면서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또 이 사람이 릿교 대학을 나왔는데 성공회대에요. 일본 릿교대에서는 윤동주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고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 시대에 우리 아버님은 메이지 대학을 나왔어요. 같은 시대에, 동갑이에요.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엮여 있으니까 영화를 보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중간에 이광수가 써놓은 글도 나오고. 이게 뭔가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한번 쭉 훑어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막판에 두 사람이 얘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윤동주는 싸인을 안하겠다는 쪽이고 송몽규는 하겠다는 쪽이었는데 둘 다 자신을 항변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에 아마 배우 두 사람하고 이준익 감독하고 거기다 승부를 걸었을 거 같아요. 이 장면을 정말 열심히 봐줬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들어있는 겁니다. 배우들도 굉장히 그 부분에서 잘했다고 봐요. 그래서 저는 그 당시에 갖고 있던 지식인들의 삶의 어떤 걸 투명하게 보여주려고 했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시대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주려고 감독이 노력을 하는구나. 그러니 만주 군관학교니 문익환 선생의 얘기도 꼭 하고 등등등 해서, 저는 오늘날 이 시대에 사는 사람으로서도 읽어낼 거리도 좀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들었어요.

 

정재형 : 문익환 선생 같은 분들, 실제 우리가 알만한 분들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이게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다, 바로 얼마 전에 살다가 가신 문익환 목사님이 그때 윤동주하고 있었어, 라는 어떤 연결 의식 같은 걸 느끼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넣은 것 같아요. 대부분 문익환 목사님 알잖아요. 지금 우리가 2016년을 살지만 윤동주가 멀지 않아, 바로 옆에 있었어, 라는 임장감(臨場感) 그런 것들을 느끼게하는 장치 같아 보여요.

 

박태식 : 내가 말하려던 게 그런 거예요.

 

정재형 : 그런 걸 많이 느낄수록 영화가 더 재미있는 거죠.

 

이수향 : 저는 결국 윤동주가 시인인데 이 영화에서 시를 어떻게 처리할까가 가장 궁금했거든요. 근데 이걸 세련되게 잘 처리 했더라고요. 가령, 이걸 옆으로 세로줄 자막으로 계속 제시한다거나, 시를 내러티브에 맞춰서 작위적으로 배치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내를 건너 숲으로 가자”이러면 갑자기 개울을 걷는 동주와 몽규가 보인다든가ㅎㅎ. 그러니까 윤동주의 비교적 수사가 적고 담백한 시들을 너무 장면 장면과 정확하게 조응하게 하면 유치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부분을 배우의 내레이션으로 깔끔하게 처리했더라구요. 윤동주의 시가 가진 문학으로서의 예술성, 저항 정신 등의 가치에 더해 영화적인 재현의 방식으로 어조, 톤, 운율 이런 부분들을 살려 배우의 목소리로 차분하고 담담하게 들어가니까 영화가 굉장히 빛이 반짝반짝 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원래도 좋은 시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강하늘 배우의 발성 잘된 좋은 목소리로 들으니까 시가 더 좋더라구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박제화된 시, 수능문제로만 나오는 인위적으로 외운 시들이 정말 잘 살아나서 한 구절 한 구절이 생동한다는 느낌을 받아서 그런 부분들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대연 :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두 장면이었는데 하나는 윤동주와 송몽규가 경성 갈 때 나란히 앉아 송몽규가 윤동주 어깨에 기대 졸고 있고 윤동주는 수첩에 뭔가 적고 있고. 그 장면이 어떻게 보면 송몽규와 윤동주의 갈등관계를 계속적으로 직조해내는 그런 느낌인데 사실 그렇게 기대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윤동주는 계속 송몽규에게 열패감을 느끼는 존재로, 그래서 더 시속으로 파고드는 이런 느낌이 들고. 송몽규는 단호하고 외향적이고 그래서 운동들을 해내가는 게 그런 부분에 대해 윤동주가 열패감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돼있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사실 송몽규가 기대고 있는 게 윤동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윤동주가 기대고 있던 것은 시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겉으로 볼 때는 거꾸로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관계는 이렇게 돼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두 사람 관계가 담쟁이넝쿨 같기도 하고 앙코르와트들의 나무 같기도 해요. 왕코르와트의 나무들이 사원을 부수는 것 같지만 무너지지 않게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런 게 아닌가 싶었어요. 상처를 내지만 그 상처가 서로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장면인데 조선말로 시집 제목을 얘기 해주잖아요. 그 순간에 시집 제목을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단순한 제목이고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던 제목이잖아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게. 그런데 또박또박 한 음절씩 “하늘과, 바람과, 별과”하는데 문소리가 끽 나서 시선이 빠졌다가 다시 돌아와서 “시” 라고 발음하는데 그 한 음절이 되게 크게 울리는 거예요.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까 윤동주가 항상 하는 말 있잖아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라는 부끄러움의 윤리를 상징하는 하늘과 시대적인 흐름을 상징하는 바람과 시인으로서 이상, 젊은이로서 청년의 이상을 상징하는 것 같은 별, 이런 것들을 자신의 시 속에 응축시키려고 했던 노력들을 표현하기 위해 잠깐 끊어줬던 거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 그 한 음절에 담긴 게 영화 전체를 표현한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재형 : 그 읽기와 연동해서 그 두 사람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동주와 몽규는 안과 밖이다.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실패했다는 거거든요. 사실 둘 다 독립 운동가들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독립운동사로만 식민지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됐다는 걸 이 영화가 지적하는 것 같아요. <암살>등의 영화가 이 영화와 대척점에 있는 거죠. 전기 영화, 독립운동영화가 마치 그 시대의 삶이 독립운동가의 삶인 것처럼 그리는 것은 사실 왜곡된 시선이죠.

이준익 감독은 독립운동을 하려다 실패한 평범한 지식인 몽규, 그리고 몽규의 그림자밖에 하지 못한다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인 아닌 시인 윤동주를 그린 거거든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동주는 시인이 아니지만 항상 몽규에게 시인으로 인정을 받았던 거죠. 동주는 공식적으로 데뷔를 못하고 몽규는 신춘문예 데뷔를 했고. 그런 평범한 지식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이고 그게 바로 조선 민중의 그 당시 모습이라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싶고요.

은유적으로 얘기하면 동주가 정신이라면 몽규는 몸을 대변했다고 봐요. 그 당시 조선민중을 표현했다고 보는데, 결국은 실패했죠. 몽규는 정신이었던 동주에게 기댈 수밖에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거죠. 몽규는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극단으로 몸의 문학을 주장했던 거거든요. 그러나 항상 정신의 결핍을 동주로부터 찾고 싶어 했죠. 이렇게 항상 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자신이 피곤할 때 동주를 항상 그리워했던 거거든요. 그래서 이게 한 몸이라는 걸 표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서명하는 장면인 것 같아요. 둘 다 사실 같은 이유거든요. 실패했기 때문에 한 사람은 서명을 했고 실패했기 때문에 한 사람은 서명을 못했다는 거예요. 결국 팩트는 실패했다는 거거든요. 열패감에 젖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 나약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민중의 모습이죠. 성공했던 김구선생, 윤봉길 선생도 아니고, 빛나는 투쟁의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니거든요. 누구도 사실은 지금까지 윤동주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영화가 그런 시각을 줬다는 것은 시대를 잘 읽은 윤동주 평전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대연 : 저는 개인적인 부분인데 눈물이 핑 도는 장면이 있었어요. 윤동주와 송몽규가 둘이 창고로 달려가서 낄낄거리고 있는데 송몽규가 신춘문예 당선됐다고 누군가 와서 알리는데, 그 순간 송몽규를 바라보는 윤동주의 표정이 정말 절망적이라는 ... 근데 그게 뭔지 알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 순간부터 눈물이 핑 도는데 완전 이입 되서 봤어요.

 

송아름 : 제가 사실 윤동주라는 인물에 대해서 아무리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뭔가 가지고 있었겠죠. 그래서 강하늘이라는 배우가 윤동주를 한다고 했을 때 어? 싶었거든요. 그런데 연기도 그렇지만 목소리가 신의 한수였던 것 같아요. 마지막 크레딧 올라갈 때 노래 소리가 울리는데 좋았어요. 아까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런 장면이 몇 군데 있어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송몽규가 윤동주에게 ‘나 갈 데 있어, 너 여기 있어’라고 말할 때 윤동주가 송몽규한테 ‘너는 왜 나한테 같이 가자고 안하냐’고 하는데 그 말이 너무 아픈 거예요. 이 젊은 사람이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 그걸 당장 할 수는 없고 내가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념적인 이것보다 더 좋아하는 순수하다고 믿고 있는 시가 있고. 이런 것들이 자기 안에서 부딪히고 있는데 왠지 거기서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그래서 그 대사가 크게 오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윤동주가 집을 떠야겠다고 생각하고 시를 정리하고 있는데 송몽규가 경찰한테 잡혀서 오잖아요. 건물사이에 윤동주가 창가에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고 송몽규가 빨리 가자고 건물 밑에서 재촉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정말 그림 같았어요. 나는 내일 가겠다고 얘기하는 그 장면과 그 거리감 송몽규가 보여주는 절망감과 이런 여러 가지 것들, 그 사람을 두고 간다라는 애절함 등과 겹치면서 참 좋았습니다.

후반부에 가면 윤동주가 제목을 적으려고 하는 장면과 송몽규가 사람들과 모여 일을 도모하고 경찰들이 와서 습격당하는 장면이 계속 교차가 되거든요. 그렇게 보면 송몽규가 하는 이 일도 분명히 중요한 거고 윤동주가 시를 쓰는 이 일도 분명히 등치로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젊은이한테는 그게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윤동주라는 과거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청년을 독립 운동가만으로는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 것 같아요.

영화는 그런데 이걸 소비하고 있는 담론의 방식이 저는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에서는 그게 아닌데 지금 이 영화를 청년들이 많이 보고 있고 그런데 그거에 대한 카피로는 시대를 아파했던 청년처럼 너희도 가야한다는 식의 강요들이 덧붙여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데 그거는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본질을 오독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등치로 놓기에는 위험한 기사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습니다.

 

이수향 : 저도 약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제가 이 영화에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템포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감정이나 두 사람의 갈등사항을 표면적으로 폭발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관객이 보면 느낄 수 있도록 차분하게 한 단계 한 단계씩 이들의 갈등, 작은 계기들을 제시하면서도 이들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를 알게 하는 거죠. 몽규가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칭찬을 받고 동주는 축하해주면서도 속이 상해서 그냥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평소 좋아하던 백석의 시집 『사슴』을 필사합니다. 몽규는 그런 동주의 마음을 아니까 등단이 별 거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동주는 오히려 더 화가 나죠. 반대로 등단을 했으면서도 오히려 몽규는 문학보다는 시국에 관해 당당히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등 이런 장면들을 굉장히 세심하게 배치를 해요. 그래서 양 인물을 골고루 끌고 가면서 장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뒷부분으로 가서도 아까 말씀하신 교차 편집된 그 장면에서도 송몽규의 태도는 굉장히 세고 빠르게 처리되어 위기일발의 상황처럼 제시되지만, 반대로 윤동주는 굉장히 차분하게 느릿느릿 시집의 장정을 매만지고 있거든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들을 번갈아 제시하는 가운데서도 사이사이에 밤하늘을 담은 화면이나 시 내레이션 같은 것들이 아름답게 삽입되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죠. 그런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도 유지되던 적절한 긴장감이 마지막 장면으로 가면 감정적으로 매우 결렬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송아름선생님이 우려하시는 그런 상황이 나오는 것 같은데, 이 영화를 ‘항일’과 ‘시대를 아파하는 젊은이’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소비하려는 시각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요새 이런 영화 안보고, 그렇고 그런 영화들만 많이 보는데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하는 영화는 이런 영화야’라고 소 규정하는 것이 폭넓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 영화의 장점을 굉장히 왜소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어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다 봐야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꼭 봐야 합니다’ 이런 것은 결국 ‘노오오력!’하지 않는 청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이 영화가 지향할 바는 아니죠. 아마 윤동주 시인도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대연 : 무슨 말씀하시는지 아는데 그게 잘못되면 또 역으로 되버릴수도 있는 것 같아요. 미묘한 문제에요. 두 가지 다 중요하죠. 아까 계속 나왔던 얘기처럼 평범한 청년들이 어떻게 살아갔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이 시대하고 무관하지 않잖아요. 윤동주라고 해서 시 속으로, 관념 속으로만 파고들어갔던 것도 아니고요. 윤동주한테 중요했던 문제는 조선말로 시를 쓴다는 건데, 아마 윤동주한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 창씨개명 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조선말을 사랑하고 그것으로 시를 써야한다는 조선말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빼앗겼을 때. 저는 가슴 아팠던 장면이 그거거든요. 교실에 있는데 경찰이 들어오면서 ‘히라누 마’ 부르잖아요. 그 순간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사실 무관하진 않은데 지나치게 한쪽을 강조하면 저기가 되고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도 아니고 그러긴 하죠. 한 가지 또 생각을 해봐야 할 건 이게 45년까지 이야기잖아요. 45년에 해방이 되잖아요. 정재형 선생님은 이들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는데, 실패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의 삶이 실패한 거였을까?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재형 : 저는 다른 측면에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 게, 이 각본을 신연식 감독이 썼는데 <러시안 소설>이라는 영화가 한국영화에서 남다른 평가를 받았잖아요. 문학적인 서술이 영화적으로 어떻게 돼야하나 하나의 방식을 보여줬다면, 사실 같은 방식이거든요. 이수향씨가 말했듯이 자막이 올라가는 유치한 방법이 아니라 내레이션을 많이 썼는데 저는 그런 영화가 나름대로 상업영화로서 성공했던 나름의 방식을 잘 보여준 영화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더니즘적인 방식일 수도 있고요, 이런 상업적인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건데, 그래서인지 시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가 활자로만 읽었던 윤동주의 시를 영화를 보고 나면 사실은 허구지만 그 시가 쓰일 당시 그런 에피소드 때문에 쓰인 건 아니지만 아주 주관적으로 이렇게 배치를 하고 그 내레이션을 하면서 시가 다시 살아난다고 할까요, 문학과 영화가 공존할 수 있는 어떤 모범답안 같은 그런 서술방식, 그런 점에서 저는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시도 많이 팔린 것 같고. 시라는 거에 대한 배경스토리를 제공해줬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건 대단히 허구적인 것이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시를, 문학, 활자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는 점에서 문학과 문자와 영상이 같이 만났을 수 있다는 지점을 제시한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수향 : 방금 신연식 감독이 각본을 쓴 것을 회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원래 신연식 감독의 <러시안 소설>에서는 반대로 영화의 화면 안에 글자가 소설 써지듯 탁탁 써지잖아요. 그러니까 <러시안 소설>은 영화인데 활자와 활자가 써지는 시간적 지연 즉 소설적인 방식을 넣은 거고, 이 영화는 이건 시인데도 활자로 가져온 게 아니라 도리어 영화적인 방식으로 살리려고 노력을 한 것이죠. 그런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으로 배우들 얘기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박정민 배우는 <파수꾼>에서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후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다가 이 영화에서 간만에 봤는데 역시 캐릭터 이해가 좋고 또렷하게 잘 살리는 연기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하늘 배우도 전반적으로 연기가 좋았던 것 같고 외모나 목소리에서 주는 안정감이 그 시대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 말씀드렸듯이 감정적으로 너무 둘을 폭발시키면서 약간 미학적으로 손해 본 부분이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우연찮게 두 명의 연기가 약간 조금 과잉인 부분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이 이준익 감독이 <사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있어서 아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에서 마지막 엔딩크레딧 올라갈 때 두 사람의 연보를 나란히 배치하고 강하늘 배우가 <자화상>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목소리도 너무 좋고 감성도 좋고 노래도 잘해서 슬펐습니다.

 

박태식 : 배우들의 연기도 아주 좋았고 마지막에 터트리는 부분도 좋고요, 아무튼 좋은 부분도 있고 나쁜 부분도 있겠지만 영화가 너무 잔잔히 흘러가니까 마지막에 가서, 특히 암시하는 부분들이 많아요. 아까 말했던 이층에서 바라보고 밑에서 이야기하고 옆에 기대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시 이런 것도 굉장히 차분하고 생각할 걸 주는데 막판에 저들에게 진짜로 안에 있는 얘기를 폭발적으로 듣고 싶은 생각도 난 있었어요. 그 둘이 그런 얘기를 했지요. 너희 일본 사람들은 모를 거다 우리가 왜 이렇게 하는지, 자기들이 했던 일 자체의 가치가 중요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보다 그것 자체가 중요한 거 아닌가,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이 내뱉었던 대사들이 두 사람의 가슴 속 이야기를 들어주게 했다는 게 관객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영화를 쭉 보면서 두 명의 여성들이 나와요. 이 두 명의 여성들이 뭐라 그래야 하나, 병풍처럼 서있어요. 병풍처럼 서있어서 존재감이 상당히 있는 역할이고 존재감 있는 어휘들도 많이 쓰는데 기억이 잘 안나요. 그런 건 좀 아쉬운 점인 것 같아요.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주변에 나오는 여성들이 있고 가족들이 있는데 충분하게 백업을 못해준 것 같아요. 그런 게 아쉬운 점이에요. 내가 생각하기에 윤동주와 잘 맞았던 건 일본여자인데 그 여성을 좀 부각시켰으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너무 그림자처럼 뒤에 있다 사라져서 아쉬웠어요.

아까 몽규가 ‘넌 있어’라고 할 때 동주를 무시했을 수도 있겠지만 보호하는 차원일 수 있어요. 어려운 일은 형이 할게, 넌 시나 쓰고 지킬거나 지켜. 복잡하고 이런 문제는 네가 상관할게 아니야. 그런데 윤동주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쁜 거죠. 실제로 그랬다면 윤동주한테 그런 시가 나왔을 법하지 않아요? 너무 슬프잖아요. 어디 따라가려면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요.

 

이수향 : 저도 이 둘의 관계가 이 영화에서 제일 재미있는 점 같은데 약간의 열등의식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온 친동기간이나 마찬가지인 사촌관계고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같이 가잖아요. 전 이 영화를 윤동주의 전기적인 영화로 만들면 재미없겠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방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교차하는 식으로 같은 시기 두 청춘의 다른 방식의 선택이 있었지만 어떤 선택도 잘못된 건 없었던 거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간 거니까. 마지막 서명을 강요받던 신에서 둘이 다시 나뉘는 데요. 강력한 행동주의자였던 몽규는 결국 울면서 싸인을 하면서 당신들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나약하고 유약해 보이고 시대의 흐름에 부끄러움으로 멀찌감치 서있는 것처럼 보였던 동주는 결국 싸인을 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둘 다 죽지만. 그런 걸 봤을 때 이 영화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시대의 불합리, 어려움 속에서도 어떤 가치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고 누구 하나를 높게 세우거나 하는 게 아니라 그 태도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순결성을 지키고자 했던 동주가 어쨌거나 조금 더 구원받는 측면이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는 적극적 행동주의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창씨개명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자신의 문학적 여정, 예술적 세계를 결국 지키고 죽은 것이죠.

 

박태식 : 대체로 사람들을 바라보면 스스로 고민하지 않는 운동가보다는 약간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운동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 사람은 굉장한데 알고 보니 시까지 써요. 감독도 역시 예술가인지라 예술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한테 정이 가는 게 아니겠어요?

 

정재형 : 제가 이 영화에서 좋게 본 가능성은 아까 말씀 드린대로 문자와 영상이 서로 틈입을 하면서 이야기를 말하는 방식을 얻는 거죠. 그런 방식을 구사했다는 점을 좋게 보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영화가 모던하게 가지는 않았어요. 정서적으로 갔고 역시 많은 부분에 환영(幻影)을 만들어냈죠. 감독이 뭘 주장했느냐 파악하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 된 거죠. 이 영화는 영화가 말하는 방식의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것 보다는 어찌 보면 일반 영화적인 관객동일시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된 거죠. 단적인 부분이 마지막 서명하는 장면이죠. 팩트는 한사람은 서명을 했고, 한 사람은 하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는 거죠.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거짓말이죠. 그건 감독이 만든 얘기인데 감독은 뭘 강조하고 싶었는가, 제가 볼 때는 문명국이라고 하는 일본을 규탄하는 시각을 강조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한 사람은 서명을 했고 한사람은 안 했다는 것으로 풀어나갔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 허구를 통해서,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욕망은 지금의 한일 관계도 그렇고 지금의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한국의 자존심 같은 것을 분명하게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그쪽에 가있다고 보고요.

영화라는 것 자체가 허구잖아요. 역사나 팩트가 아니고.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윤동주나 송몽규를 너무나 우상화한다는 것은 전 경계해야 한다고 봐요. 제가 이 영화를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고 감동적으로 보는 것은 문자가 영상을 통해서 살아남으로써 우리 후손들이 윤동주 시를 읽을 때 그 시대를 상정하면서 볼 수 있다는 시각을 이 영화가 분명하게 줬다는 점이죠. 여태까지 윤동주를 이렇게 다룬 영화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시를 다시 읽게끔 충동질하는 좋은 텍스트가 이 영화였습니다. 그 점을 제외하고 나는 많은 우상화의 함정이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모더니즘 쪽으로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울컥하는 감정을 부추기거든요. 그런 허구를 통해서 마치 명백한 역사적 진술인 것처럼 오해하면 안 된다, 그런 부분을 경계합니다. 뒤로 갈수록 울컥하게 만드는데 송몽규의 연기 같은 경우 결정타를 날리죠. 상당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게 송몽규의 지사적인 품격인데 마치 단채 신채호 선생을 연상하게 합니다. 전 오히려 이 영화를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어찌 보면 그 당시 지식인들이 한번쯤 꿈꿔봤을 로망 같은, 지사적 삶을 살아보려 했던 사람들의 실패담일수 있는고 봅니다. 이 시대에 시사해 주는 게 그게 아닐까요. 그 당시에 조선 민중들이 이렇게 한계를 갖고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게 바로 숨은 역사적 사실 아니었을까. 실제로는 얼마나 활약한지 알 수 없는 거죠. 그러나 영화는 활약담처럼 그려져 있고 그건 윤동주도 마찬가지에요. 이건 좀 위험한 발언일 수 있는데 윤동주가 실제로, 우리가 실제를 알 수는 없지만, 영화보다 더 비겁하거나 움츠려 있거나 시만 쓰는, 송몽규를 부러워하는 정도도 아니고 부끄러워하면서 소심하게 살다가 그냥 어떻게 연루되어 송몽규와 같이 병원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깜짝 놀라겠죠. 우상파괴적인 시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고.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정 반대적인 시각이잖아요. 굉장히 두 분을 우상화해놓은 것도 사실이에요. 그 부분은 우리가 영화니까 로망으로 읽을 수 있는데, 난 그 부분 보다는 이 영화의 핵심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규탄하고 우리가 부끄러울 게 없는 민족인데 우리가 왜 이렇게 비극이 있을 수밖에 없었나 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 진술서 부분에서 그게 잘 드러나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송아름 :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전 약간 생각이 다른데 두 사람이 진술서를 앞에 두고 서명을 한다는 것 자체의 격한 감정을 보여주는 건 맞는 거 같은데요, 한편으로 이 두 사람의 지사적인 면모랄지 그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라고 하면 저는 그 형무소에서 윤동주가 겪는 그 일들을 훨씬 더 핍진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요. 후반부에 나는 생체실험 하기 싫다고 달려 나온 사람을 때리는 장면에서 윤동주가 돌아보니까 뒤에 있던 사람이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서 저거 바닷물 주사 맞는거라더라 라는 한마디를 하고 지나가잖아요. 만약 그 사람들의 고통을 더 극대화해서 이렇게까지 힘들게 죽어갔다고 얘기할 거라면 전 그 부분을 더 강조했을 것 같고요. 그리고 또 마지막 고향에서 아버지랑 왔을 때 송몽규한테 ‘우리 동주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을 때 죽었다고 바로 이야기할 때 저는 깜짝 놀랬거든요. 그런 장면을 보여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미 죽었고 이미 그렇게 고민을 하던 사람은 갔고 볼 수 있는 건 시체인 거죠. 저는 그런 마지막 장면들이 오히려 두 사람을 그리는데 절제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정도를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지사적인 면모를 그래서 조금 상기시키고 이 사람들을 식민지 시기를 살아가던 그냥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까 신부님이 그런 얘기 했었는데 여배우들의 역할이 애매하다는 게, 저도 요새 그런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동주>가 관객들도 많이 들고 있고 고평을 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여태까지 영화들이 너무 셌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이 영화가 오롯이 딱 올라와있는 느낌이거든요. 작년 <테랑>부터 시작해서 <내부자들>까지 너무 세고 현실에서 있음직한, 현실을 반영한 듯한 이야기를 그릴 때마다 그게 정치나 이런 얘기를 많이 하다 보니까 많이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요정에서 여자들이 헐벗고 앉아있는 장면들 있잖아요.

 

이수향 : 제가 젤 싫어하는 장면들이에요.

 

송아름 : 그런 장면 너무 많이 나오잖아요. <내부자들>같은 데에서 그걸 극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제가 그 장면을 걱정한다기보다 그게 영화랑 연결되면서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이 영화들이 여기서 보여주는 상황들이 현실에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라는 걸 믿게끔 만들잖아요. 비리랄지 뭐랄지. 아마도 저럴 거야,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인데 그 안에서 여자배우들을 헐벗겨 앉혀둔다는 거죠. 이 사람들은 연기를 하거나 인물로서 뭔가를 받을 수 기회를 하나도 얻지 못하고 그냥 거기 앉아있는 여자들인 거잖아요. 그런 식으로 소비되는 여배우들의 모습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절대 인물이 되지 못하고 그냥 그런 사람으로 스쳐지나가는. 그렇게 센 영화들이 많다 보니까 여배우들이 한편으로는 소비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박태식 : 송아름 선생님하고 비슷한 얘기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이 윤동주한테 아이디어를 주고 영감을 준 여성들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영감을 준 것에 대해서 1분이라도 더 투자를 해줬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에서 만족하는 건 여기 나오는 두 여성들은 품위가 있어요. 최소한 <내부자들>이나 허접한 영화들에서 보여주는 그런 여성비하적인 시각 같은 건 안보이잖아요. 이런 점에서는 참 좋아요. 요즘 나오는 영화들에서 보이는 왜곡된 시각은 없어서 좋은데 이 두 사람이 상당한 영향을 줬을 텐데 그 영향을 드러내게 보여줘야 하는데 영화를 만들다보니까 한쪽을 너무 분산시키면 안 되니까 그랬을 수 있었겠죠.

또 하나, 마지막 장면이 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잖아요. 그 표현하는 것 자체에 사실적으로 그랬다고 하는 건 의미는 없어요. 어차피 역사는 해석이라고. 그러니까 그 때 윤동주가 이랬다는 아주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 시 이것만 갖고 감독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거 아니겠어요? 그 삶을 살아본 건 아니니까. 역사에 대한 해석이니까 어쨌든 윤동주에 대해서 첫 번째 시도라는 것도 좋았고 좋은 작품 만들었다는 것도 그렇고. 여기에는 감독의 윤동주에 대한 해석이 들어가 있고 그 해석이 소중한 거지 실제 역사적인 사실을 얼마나 그대로 반영하는가는 처음부터 감독의 목표는 아니지 않았겠느냐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면에서는 윤동주가 실제로는 비겁했을 수도 있지요

 

정재형 :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아니고 그래서 감독의 시각이 뭐냐는 것인데 그것이 윤동주를 너무 우상화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감독이 너무 우상화시켰다고 볼 수 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난 그 면보다는 감독이 강조하는 바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것과 조선의 열등의식, 특히 일본에 대한 경고들을 얘기하고자 했던 건데 혹시 두 사람의 격정적인 부분들에 동일시가 된다라는 걸 경계하고 싶다는 거구요. 좀 더 모더니즘적으로 쿨하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성에 대한 문제도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의 여자 같은 경우 나중에 죽지만 잘 그려졌다고 봐요. 나중에 왜 죽었는가 하는 것들이 밝혀지면서 안타깝게 죽었구나 생각하게 되죠. 반면에 그 영화에는 병풍처럼 나오는 여자들처럼 의미 없이 나오는 여자들이 있었죠. 최근 합평회 때 말했는데 저는 <오빠생각>의 여자와 <동주>의 두 여자가 수위가 같다고 생각해요. 남자 시각으로 만들다 보니까 여성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한 거예요. 저는 그걸 기대 했어요.사랑이란 게 윤동주에게 중요했는데, 전개가 안 되고 밑그림만 깔고 갑자기 사라져 버려요. 이여진이 갑자기 사라지고 일본 여자가 등장하는데 출판을 도와주고 애틋한 관계 정도로만 나오고 내면이 안 그려져 있어요. 여자가 윤동주의 어떤 면을 좋아하고 어떤 대화를 했을까 하는 허구를 만들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표면적인 얘기만 하는 거예요. 너무 뻔한 대사만 한 거죠. 윤동주와 여인들과의 관계가 왜 중요한지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거죠.

제가 기대한건 윤동주가 살과 피를 갖고 있는 시인이라는 걸 보여줬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윤동주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그 여자를 보는 눈들이 클로즈업으로 많이 보이거든요. 저는 그걸 좋게 봤어요. 처음에도 몽규가 신춘문예 당선됐고 너스레를 떠니까 ‘너는 그게 쉽냐’고 질투하는 대사가 나오죠. 또 방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훔쳐보는 윤동주의 시선이라든가 이런 것을 저는 좋은 표현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그게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깊이 묘사가 안 되고 어느 순간 끝나서 아쉬웠습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 좀 더 배려를 했으면 윤동주의 다른 면이 부각되면서 이 영화가 우리가 보지 못한 다른 얘기들을 좀 더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 부분이 지워져버렸고 오로지 송몽규와 윤동주의 관계로만 너무 집중된 바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두 여자는 뭐지? 생각했을 때 둘의 관계를 보완해주는 보조물로밖에 안됐다고 얘기해도 심하지 않다는 거죠. 물론 신부님 말씀대로 최악은 아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죠.

 

송아름 : 아까 했던 얘기에 조금 덧붙이면 당연히 <동주>에서 얘기하는 여성들과 <내부자들>의 여성들은 완전 다르죠. 그런데, 여성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좀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현재 영화판에서 여성 배우들 혹은 인물들이 자기 서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영화가 없는 것 같아요. 어쨌든 센 영화들이 많이 나오다 보니까 그런 영화들이 관객이 많이 들고 그러면 더 그런 것들이 나오고. 최근에 비리나 혹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베이스에 불신이 깔려 있잖아요.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 혹은 그것이 사회를 그리는 방식이라는 영화들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오고 그러다보니까 그걸 잡고 가는 게 대부분 남성 인물들이고 그러다보니 여성인물들이 없고 배우로서 들어가 있는 것들이 약간 아쉽다는 거였는데 <동주>에서는 확실히 동주의 감정 혹은 세심함이라는 걸 극대화시키고 표현해주기 위해서 여성 인물들과 붙는 씬, 같이 대사를 하거나 이런 것들이 저는 감각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수향 :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최근에 화면에 정물처럼 서서 성적으로 소비되는 여성 캐릭터만 나올 수밖에 없는 게 영화들이 세고 사회적으로 핍진한 권력, 힘, 논리, 경제, 정치 이런 세계를 다루다보니까 이 자리에 여자가 낄 수가 없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사실 그런 영화들이 지향하는 하드코어한 남성의 세계에서 여자는 성적인 도구로만 소모되는 경향이 많았는데 <동주>라는 영화에서의 여성 캐릭터의 문제는 그것과는 매우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이것저것 다 빼고 보면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을 전면적으로 드러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미학적 한계로 생각한다고 말씀드렸었죠. 제국주의, 문명국으로 치부하지만 그들이 후진국만도 못하게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다 보면 이 영화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기능을 하느냐를 묻는 데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일본인 여성 쿠미가 이렇게까지여럿의 도움을 받아 힘들게 시집을 만들고 자기 시간과 노력을 쏟았잖아요. 식민지 하위 남성에게. 둘 사이에 로맨스가 생겨날 여지가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잡혀서 죽어버린 거예요. 자기 시집 출간도 못보고. 인연이나 관계가 더 진행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여진이도 마찬가지죠. 그 나이의 청춘에 맞는 어떤 감정적 흐름들이 가능했었는데 갑자기 차단되어 버리죠. 그럼 왜, 누구 때문이냐는 거죠. 연애의 서사가 중단되었다면 중단의 지점의 이유를 찾아야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제국 일본이 다시 호명되는 것입니다.

 

정재형 : 나는 이 영화를 두 여성의 시선을 남성 중심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차단됐다고 봐요. 왜냐면 마지막에 쿠미가 원고를 넘겨주고 그렇게 끝났는데 왜 여성의 시선은 안 보여주냐고요. 여성이 생각하는 동주의 모습을 안보여주잖아요 계속 동주와 몽규로만 가잖아요. 그게 단적인 예에요. 처음에 만났던 여진이도 마찬가지구요. 그 여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없어요. 헤어졌는데 동주나 몽규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나오질 않아요. 항상 몽규가 동주를 생각하거나 동주가 몽규를 생각하거나 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하는 남자의 시선은 장면화되어 있는데 비해서 여자들의 시선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든 간에 분명히 없어요. 그건 이 영화를 만드려는 의도가 분명한 거예요. ‘여자는 미안하지만 좀 빠져주세요’ 라는 얘기를 간접적으로 하는 거라고 전 보거든요. 영화서사에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자는 필요 없는가 하는 건 두고두고 논란이 될 수 있어요.

제 주장은 뭐냐면 왜 똑같이 핍박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 남자만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되냐는 거죠. 여자가 그 옆에 있었다면 그 여자의 시각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사건을 수행하는 남자의 보조인물로밖에 각본이 가고 있지 않은 거거든요. 이게 심각한 경우를 예로 들어보죠. 서구에서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비판하는 것 중에 하나가 흑인이 잘 등장하지 않는 점이거든요. 흑인이 단 한명도 등장하지 않는 영화가 <오인된 사나이 The Wrong Man>죠. 이건 정말 반사회적이고 반역사적인 영화인데, 뉴욕을 무대로 하고 있으면서 흑인이 한 명도 등장하질 않아요. 의도적으로 흑인을 완벽하게 배제 했어요. 뉴욕은 사실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흑인이 많죠. 흑인뿐이 아니라 오히려 백인이 적을 수도 있는 지역이거든요. 그러한 영화적 전통이 한국에까지 왔다고 봐요. 비단 히치콕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보편적으로 서구의 영화 문법이 한국의 현재 영화제작에 은연중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종문제보다는 성에 대한 묘사, 남성 여성에 대한 묘사라고 봤을 때 직도 그런 부분에 철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특정 페미니즘 영화평론을 거드는 건 아니에요. 보편적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왜 남녀시각을 똑같이 그리지 못하나. 왜 주인공을 하나만 가야하나. 원 맨 히어로, 왜 한 사람의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렇게 가야하냐는 근본적인 서구서사관습의 문제를 제기하는 거죠.

 

이수향 : 비슷한 맥락에서 무슨 생각이 드냐면, 이 영화가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희가영평상도 줄 때 사실 좀 애매한 게 남우주연상이나 남우신인상은 굉장히 후보군이 많아요. 남성서사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가 많고 그러다보니 좋은 작품도 많이 나오고 두드러진 연기를 할 수 있는 인물도 많이 나오는데 여성신인상은 거의 비슷해요. 성적으로 학대를 당하거나 노출을 세게 하면서도 연기를 좀 했다든가, 폭력적인 상황아래 신음하는 여자라든가. 이게 영평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고 이름을 알리고 싶으면 그 정도 영화를 해서 과감하게 돌입하지 않고는 그냥 소비되고 마는 거예요. 여자가 주연인 영화도 많지 않고 그런 시도하는 영화가 없다는 거예요.

 

정재형 : 저는 이런 얘기를 공론화 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영화의 제작관행, 산업의 관행, 또 스크린 안에서의 재현의 관행이 분명히 잘못된 전통이 있거든요. 실제로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남녀의 비중, 받는 급료의 차이, 노동의 강도가 다 다르거든요. 오늘 우리는 재현에 대한 문제를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재현에서도 충무로 영화가 절대 건강한 재현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서구 영화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는 올해 아카데미상에 스파이크 리나 이런 흑인 감독들이 굉장히 반발했잖아요. 백인 중심적으로 가잖아요. 충무로 영화계도 독 같아요. 수상제도도 점검해야하고 다 점검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 재현의 문제가 나왔는데 여성재현은 저는 문제가 많다고 당당하게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준익 감독님같이 관대한 감독조차도 두 여성이 나오는 이 영화를 양성평등적 관점에서는 실패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더 평등하게 다뤄줬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대연 : 저는 이준익 감독이 여성재현에 가장 실패한 부분은 혜경궁 홍씨의 늙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그와 동시에 윤동주를 우상화 하는 장면은 다리위에서 코트입고 걸어가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너무 분위기 잡고 그러고 걸어서..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여진이라는 인물은 없어도 무방한 인물이거든요.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넣기 위해 ...

 

정재형 : 분명히 이유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기대를 했는데 발전을 안 시켰다는 점에 대해 실망을 한 거죠. 왜냐면 동주가 그 여성에 대해서 성적 욕망을 갖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것으로서 충분히 동기가 있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그걸 계속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걸 아쉬워하는 거죠. 등장하지 않은 것과는 분명히 달라요. 심화시키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거죠.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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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성진수

등록일2016-03-12

조회수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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