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호모 사케르, 전이되는 죽음의 기운 - 맹수진

맹수진(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영화평론가) 

한때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중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세계 공장의 굴뚝이자 자본주의 성장의 엔진으로 변모했다. 아직도 그 사회의 상층 엘리트 계급, 당관료들은 자신들의 체제를 사회주의라 강변할지 몰라도 그것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적어도, 소수의 당 관료들과 테크노그라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 인민들의 삶에서 사회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공산당이란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고려해볼 수 있는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중국 인민들은 어떤 생각과 욕망을 품고 살아갈까?
올해 린싱 감독의 다큐멘터리 <동창생들 Classmate>를 우연히 보았는데, 그 때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대한민국 시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고민과 욕망을 갖고 있는 중국 인민들. 어떻게 그들이 불과 십여 년 전까지 사회주의 맹주로서 동서 냉전의 한축을 담당했던 주체였다고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소위 ‘역사의 종말’이라 일컬어지는, 동유럽 사회주의의 일방적 항복으로 현실이 되어버린 자본주의의 ‘최종적 승리’ 이후에, 소비에트와 함께 사회주의의 쌍두마차였던 중국의 자본주의로의 화려한 변신은 가히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장츠위 감독의 <아내와 배나무 Pear>는 변화하는 중국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망과 가치의 실체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다. 짐작하겠지만 영화는 그러한 욕망의 궁극적 종착역이 ‘죽음’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 창백한 죽음의 과정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젊은 부부에게는 꿈이 있다. 동네 한가운데에 번듯한 이층집을 지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는 것. 그러나 이제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집에 들어갈 건축비가 부족한 부부는 행복한 미래를 위해 당분간 현재를 희생하기로 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아내는 도시에서 매춘 일을 하고 있다. 남편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를 따서 아내가 일하는 곳으로 가져간다. 영화는 바로 이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오프닝에 연달아 등장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사물의 이미지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땅에 뿌리내린 배나무와 하늘을 향해 솟은 이층집. 이 두 사물은 젊은 부부의 과거와 미래의 행복을 상징하는 기호다. 영화에 의하면 아내는 그 나무에서 자라는 배를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여기에 없다. 그러니 배를 먹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들의 행복한 과거와 미래에 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들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유예시킨 현재에 대해 말할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면, 지금 아내는 여기에 없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배를 따는 남편의 행동은 미래를 위해 유예된 현재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맛보이기 위한 행동이다. 그러나 그가 아내가 일하는 곳에 들어서는 순간, 앞으로 그곳에서 보고 경험할 일들은 그를 좌절시킬 것이다. 그들의 꿈은 애초부터 잘못 놓여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꿈은 처음부터 금지된 것이었다. 불가능한 것을 욕망했기에, 초대받지 않은 파티를 기웃거린 죄로 그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여기 화려한 파티가 벌어지는 장소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그들의 욕망이 도착한 자리가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아내의 매춘업소에 남편이 나타난 첫날밤에 아내가 등장하던 방식을 떠올려 보자. 남편이 아내의 업소를 찾은 시간은 밤이다. 남편은 가게에 들어가 마스크팩을 하던 여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관객은 이 여자가 남자의 아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에 우리는 남자가 “아내는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을 듣는다. 그녀는 아내가 아니다. 고정된 카메라가 가게 안을 우두커니 지켜보는 동안 업소 사장이 가게로 들어오고 손님이 방에서 나온다. 이 공간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 주인과 손님과 남편이 모두 등장한 뒤에야 비로소 아내는 화면 저 안쪽에서 기이할 정도로 느린 속도로 걸어 나와 프레임과 카메라 사이의 오프 스크린 공간으로 사라져간다. 작위적이라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아내의 느린 움직임은 차라리 죽음의 몸짓에 가깝다. 존재감의 상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먼저 등장하는 법이 없으며 그녀의 움직임은 유령의 그것과 유사하다. 여기는 그녀의 집이 아니다.

죽음에 사로잡힌 듯한 그녀의 이미지는 우연일까? 혹은 단지 일회적인 것일까? 아니다. 그녀의 생기를 한없이 축소하고 동결시키는 것은 연출자의 명백한 의도라는 것이 이후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후반부 낙태 장면을 상기해 보라. 아내가 낙태를 위해 병원에 간 장면에서 영화는 아내의 임신에 대해 어떠한 사전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각 장면들이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기보다는 느슨하게 결합하면서 전체적으로 죽음의 정서를 쌓아갈 무렵, 영화가 시작된지 정확히 47분경에 흰 벽으로 칠해진 병원 건물 앞에 임신을 한 여자가 앉아있다. 아내의 동료다(혹은 여사장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사장과 이 여성의 관계를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에 때로 동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여사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히 관객은 임신한 그녀가 검진을 기다리는 중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관객의 예상과 달리 정작 병원 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것은 남자의 아내다. 임신한 동료는 이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아내의 몸을 부축해준다. 이렇듯 영화는 계속해서 아내의 등장을 지연시키고 그녀의 존재감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화면을 짜나간다. 관객의 오인, 내지는 오해를 유발하면서 그녀의 등장을 늦추고 그녀의 의미를 강제로 덜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는 이 무대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그것은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조르쥬 아감벤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를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으로 정의한다. 한편 슬라보예 지젝은 관타나모 수용소의 수감자들이 우리 시대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라 단언하는데, 사실 ‘호모 사케르’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호모 사케르로 분류되어온 역사적 집단을 나열하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조르쥬 아감벤은 로마시대에 “희생제물로 삼을 수 없었던” 어떤 부류, 중세의 늑대인간, 홉스 시대의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어떤 유형의 범죄자들, 국제법 탄생 초기의 문제적 존재들이었던 해적들, 근대 생명정치 출현 이후의 모든 ‘국민’ (나치 수용소의 수감자들은 이들의 지위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다)이 호모 사케르이며, 특히 불법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대에 발생한 새로운 유형의 호모 사케르라 말한다. 호모 사케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에 ‘예외’로 취급받던 이러한 존재들이 오늘날에는 보편이 되고 규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감벤에 의하면 현대는 사회 전체가 수용소 속의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린 시대이며, 근대적 인간이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이다. 자본주의는 일련의 기술들을 통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순종하는 신체 corps dociles’(스스로 욕망하는 몸)를 산출하고 이로써 자신의 발전과 승리를 성취했다. 그것은 현재 중국에서도 예외없이 진행되고 있다.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이 부부의 삶을 보여주는 씬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들은 호스트도, 초대된 손님도 아니다. 영화에는 식사하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지만 두 사람을 위한 밥상은 단 한 번도 차려지지 않는다. 식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언제나 대야를 들고 화면 안쪽에서 등장하면서 매춘행위를 암시한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이곳에 도착하던 날부터 남편은 ‘밥 먹었냐’는 여주인의 물음에 먹었다고 거짓 대답을 한다. 이후에도 그는 주인 내외가 식사할 때 가게 앞에서 빵을 뜯거나 라면을 먹는다.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는 사장 내외를 중심으로 주인공 부부는 화면의 배경과 전경을 종적으로 오간다. 이곳에 그들의 고정된 자리는 없다. 손님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그녀는 교체가능한 부품일 뿐이다. 그녀의 옆을 스쳐가는 다른 매춘 여성들은 그녀의 고유성을 부정하면서 그녀의 대체가능성을 수시로 환기시킨다.

그녀는 남편이 가져온 배를 먹으며 현재를 버틴다(이 배가 과거의 행복을 상징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그러나 이 무기력하고 활기없는 삶이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는 벌거벗은 생명들의 삶에 스며있는 죽음의 기운을 세밀히 묘사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낙태라는 사건은 이러한 무의미한 죽음의 극단적 발현태일 것이다. 이야기꺼리조차 되지 못하는 무가치한 생명의 제거과정은 그 생명의 무의미만큼이나 조용히, 신속하게 처리된다. 만연한 죽음.

죽음의 기운은 남편에게도 전이된다. 아내의 매춘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면서 남자는 점점 더 많이, 자주 담배를 피운다. 아내가 호텔로 출장을 나간 날, 어두운 침대 위에서 담배를 태우는 남편의 주위에는 실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다. 폐부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이는 호흡에 맞춰 어둠 속에 잠겼다 다시금 어둠을 뚫고 나오기를 반복하는 담배의 새빨간 불빛은 칠흑 같은 그의 삶에 들러붙은 왜상 혹은 얼룩처럼 보인다.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생사의 기이한 출몰 현상. 두 사람의 죽음이 자리를 바꿔가며 계속된다는 느낌은 부부가 동일한 상황을 반복 연기하는 이중 구성 속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아내와 남편은 동일한 구도에서 각각 한 번씩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상대방을 주시한다. 일종의 역할놀이처럼 어둠 속에서 위치만 바뀐 채 반복되는 그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죽음 같은 삶을 보여주는 차가운 퍼포먼스다.

물론 영화는 영화 전반에 무겁게 가라 앉아있는 죽음의 침묵과 부동성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한편 그러한 죽음의 기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보여준다. 그것은 주로 프레임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화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정물화처럼 박제된 프레임을 뚫고 디제시스 공간이 확장되는 순간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업소에서 우적우적 배를 베어 물던 남편이 갑자기 카메라가 있는 전경을 향해 배를 집어던지는 순간이 그런 때이다. 프레임의 틀을 훌쩍 뛰어넘어 카메라 앞 어딘가로 날아갔을 배의 움직임처럼, 영화는 전경과 후경, 프레임 안팎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들의 움직임을 통해 부단히 화면을 확장시키는 노력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지극히 양식화된 정물화적 구도의 틈새에서 일정하게 영화에 현실적 감각을 불어넣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부질없게 느껴진다. 영화의 전반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생기와 활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파열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종반부에 터널을 빠져나온 뒤에 다시 어두운 터널 속에서 멈춰선 카메라처럼 영화의 비전은 시종일관 지극히 암울하다. 어떠한 탈출구도 봉쇄된 삶. 영화는 죽음을 향해가는 엔트로피 법칙을 수용하면서 그것이 오늘날 호모 사케르들의 운명이라고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8

조회수3,385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