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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연] 세 개의 졸업작품, 혹은 미로 그리기 ― <졸업반>(2016, 홍덕표)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포스터 위쪽 접착면이 떨어졌다. 내내 아래로 접혀 있다가 바람에 의지해 살짝 고개를 들며 호기심을 끈다. 손가락으로 펼쳐보면 알 수 없는 조형물 사진과 함께 ‘졸업작품전시회’라고 적혀 있다. 이제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는데 ‘졸업’이라니, 문득 낯설고 생소하다. 한참 앞서 도착한 전령 같다. 설렘과 아쉬움 같은 오래된 감정들을 누르며 어떤 영화가 떠오른다. 예전 같으면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1967, 마이크 니콜스)나 임예진이 열연한 <여고졸업반>(1975, 김응천) 같은 영화가 먼저 떠올랐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경제 호황기에, 혹은 한국의 산업 성장기에 누릴 법한 낭만적 상상이 지금 우리에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의심해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홍덕표 감독의 <졸업반>이 떠오른다. 포스터 속 기하학적인 조형물 사진 위로 세 개의 이미지가 겹친다. 

 

첫번째는 하얀 표면에 성의 없이 물감을 뿌린 ‘카오스 PART.1’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두 번째는 꿈과 희망에 찬 당당한 청년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미지는 이렇다. 사각의 캔버스 안에 커다란 동그라미가 있다. 동그라미는 미로다. 위쪽과 아래쪽에 각기 동그라미 안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 그 사이를 열리고 닫힌 길들이 어지럽게 가득하다. <졸업반>의 세 인물, 동화와 정우, 주희가 그린 그림들이다.

  

<졸업반>은 <돼지의 왕>과 <사이비>의 연상호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발광하는 현대사>의 홍덕표 감독이 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연상호 감독의 전작이 거친 그림체와 파격적인 전개로 한국사회의 단면을 해부하듯 드러내보였다면, 홍덕표감독은 성을 매개로 개개인의 욕망이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파열음을 들려준다. 매끄럽지만 다소 키치적인 그림체와 경쾌한 터치로 무거운 주제를 향해 다가가는 솜씨가 개성적이다. <블루시걸>(1994, 오중일) 이후로 한국에서는 자취를 감춰버린 성인 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졸업반>은 연상호의 직설적인 어법과 홍덕표의 섬세하면서도 키치적인 스타일이 어떻게 공명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고급 술집에 나가는 여대생이라는 소재는 불편하지만 새롭지는 않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순정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여성을 구원하는 남성이라는 편향된 시선이 지워졌을 때 상투적 소재는 사각의 틀에 갇힌 동그란 미로들에 관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동시에 세상이라는 캔버스 안에서 목표를 위해, 혹은 사랑을 위해 각자 자신만의 미로를 헤매며 헉헉대는 청춘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동그라미와 삼각형으로 표상되는 마음 맞추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풍자이기도 하다. 무엇이 됐든 간에 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무척 힘겹다. 작품이 저급해서가 아니다. 각본은 탄력 있고 균형잡혔다. 연출의 시선은 깊고 작화는 매끄럽다. 다만 ‘졸업반’이 우리 내면의 어떤 취약한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실력 덕분에 모든 학생과 교수의 선망의 대상이지만 밤에는 유학비용을 벌기 위해 룸살롱에 나가는 주희에 대해 영화는 곧바로 비난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는다. 대신 목표지향적인 그녀의 태도를 지적한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얘기하며 주희는 미로의 닫힌 길들을 찾아 연필로 검게 칠한다. 검은 길들이 늘어나고 종국에는 하나의 길만 남는다. 그녀가 출구를 찾는 방법이며, 목표를 향해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건 비난이라기보다는 관객을 향한 하나의 질문이기도 하다. 삶의 비루함과 도덕적 당위 사이의 간극이 너무 넓어 짧은 다리로는 건널 수 없을 때, 그 미로를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혹은 미로가 그려진 캔버스로서의 사회는 제대로 작동하고 잇는가 하는 질문들이다.

 

  

그런가 하면 정우는 자신이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동화와 다르다고 믿는다. 그는 주희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둘만의 비밀이 깨지고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사랑은 쉽게 분노로 바뀌고, 순수함은 그녀의 사진을 보며 자위하는 미숙한 욕망으로 표출된다. 질투는 단지 화장을 지우는 비누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순수함이 지워지자 욕망이 드러나고, 선량함이 걷히자 위선이 나타난다. 의지는 부도덕하고 배려는 거래에 불과하다. 사랑은 은폐된 욕망이고 믿음은 배신의 다른 이름이다. 

  

 

 

  

세 인물의 졸업작품은 그들 각자가 설정한 세상과 자신이 관계를 보여준다. 미로를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희와, 내면의 어두운 욕망을 알아채지 못하고 순수함으로 가장하는 정우, 이름과는 달리 입구도 출구도 없는 혼돈 속에서 쾌락을 좇는 동화. 그러나 이들은 세인물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상황에 따라 바꿔스는 세 개의 가면들일 것이다. 그게 우리의 민낯이다. 모두가 각자의 막힌 길들을 지워나갈 뿐이다. ‘졸업반’은 그렇게 선과 악, 도덕과 부도덕이라는 이분법의 선 바깥으로 공을 던져 버린다.

그리스 신화의 다이달로스는 괴수 미노타우루스를 가두기 위해 미로를 만들지만 자신이 갇히고, 이카루스는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미로를 탈출하지만 태양에 너무 가까이 올라간 탓에 밀랍이 녹아 추락하고 만다. 아리아드네는 괴수를 물리치러 가는 테세우스를 위해 실타레를 준비해 주지만 배신당한다. 미로를 둘러싸고 있던 누구도 온전한 출구를 찾지 못한다. 삶이 미로가 되는 순간, 단지 생존을 위한 ‘베틀 로얄’이 시작될 뿐이다. 연상호 감독의 절망적 세계관과 성을 매개로 관계의 맥락을 탐색해온 홍덕표 감독의 풍자가 만들어낸 미로는 얼음처럼 차갑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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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곡숙

등록일2018-05-05

조회수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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