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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의 시네마 크리티크] 대통령의 시간 - 영화 ‘링컨’

 
 

유사 이래 걸출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행적은 그가 생존했던 시대의 연대기와는 별도로, 일종의 신화화 작업이 동반되어 '전기'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승된다. 역사를 크게 정의하자면 인류사회가 이룩한 진보의 과정 혹은 이러한 진보를 가로막은 후퇴에 관한 기록일 것인데, 그렇다면 특정 인물의 '전기'를 하나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우리가 어떠한 인물을 '영웅' 혹은 '위인'이라 칭하는 것은, 그가 역사의 진보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걸 다수가 인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세월이 흘러 그 인물의 삶이 일련의 '신화화' 작업으로 윤색된 경우 개인의 행적 즉 '전기'가 그가 살았던 '역사'를 압도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서기 1세기 경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우리는 '예수의 시대'로 인식하며, 남북전쟁이 발발했던 19세기 미국의 역사는 링컨이라는 아이콘으로 통칭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듯 '아이콘화'된 인물의 행적을 역사의 맥락과 별도로 분리하여 사고하게 되는 순간에서 비롯될 것이다. 한 개인이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은 궤변에 가까운 거짓이다. 비범한 인간의 존재 또한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빗대어 생각해보자면 아주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른바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 또한 역사의 맥락 가운데서 사유하고 판단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근대 이후 등장한 영웅 가운데 링컨이라는 인물만큼 신화적인 아우라에 둘러싸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도 드물 것이다. 링컨의 삶 자체가 미국이라는 국가의 건국신화에서 큰 축을 점하고 있으며 이는 그리피스, 존 포드를 비롯하여 미국의 기원을 사유한 숱한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매혹적인 숙제로 다가왔으리라. 스필버그가 오래 전부터 숙원사업으로 여겼던 <링컨>의 영화화 작업 또한 기본적으로 이 걸출한 영웅에 대한 매혹에서 시작되었을 터, 때문에 그가 단순한 매혹과 경외로 점철된 결과물을 내놓았더라면 시중에서 숱하게 접할 수 있는 위인전기 이상의 감흥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링컨에 대한 스필버그의 태도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한 링컨의 첫 등장 시퀀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남북전쟁의 막바지에 링컨은 전쟁터를 방문하여 사병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 그 가운데 한명의 흑인병사는 꽤나 당돌한 태도로 대통령 앞에서 흑인들의 사회적 처우를 토로한다. 지금은 자신들이 군내에서 백인사병들보다 낮은 봉급을 받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 장차 흑인 장성들도 생길 것이며 먼 훗날에는 흑인들의 투표권까지 보장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말이다. 

  
 
물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이 흑인병사의 희망이 그의 예상보다 일찍 현실화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종문제가 현 미국 내에서 야기하는 사회적 갈등의 비중이 여전히 무시 못 할 수준이라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소시킬 방안을 법제화시킨 최초의 입헌자가 링컨이라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링컨은 이 장면에서 흑인병사에게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 이 첫 장면에서 그가 자신의 입을 통해 흑인인권의 개선을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개진했더라면 이 영화는 링컨을 이상주의자이자 성자로서 상찬하는 뻔한 전기영화의 수순을 밟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병들은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남긴 유명한 연설을 대통령 앞에서 차례로 암송하며, '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을 그 흑인병사의 입을 통해 링컨에게 되돌려준다. 기나긴 내전과 필연적 연관을 지닌 인종문제와, 그에 대한 링컨의 해답이라 할 수 있는 게티스버그 연설문은 이 중요한 시퀀스에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그러나 정작 이 장면에 등장하는 링컨의 모습은 역사적이고 권위적인 걸출한 지도자라기보다 자식들의 말을 흥미롭게 경청하고 때로는 시시한 농담으로 응수하는 친근한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 

링컨은 흑인병사가 설파하는, 아마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이었을 아프리칸-아메리칸의 사회적 처우의 개선에 대해 뚜렷한 호불호를 표명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링컨은 이상주의자가 아닌,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가 이루고자 하였던 노예 폐지론 또한 종국엔 '연방주의자'로서 지니고 있는 그의 신념 내에 종속된 부차적 개념이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는 미 연방의 완성과 노예제 폐지 모두 내전으로 갈라진 국가의 결합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위해 필연적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을 뿐, 이를 기반으로 한 인종문제의 개선은 자신이 아닌 흑인병사로 대변되는 후대의 몫이라 여겼으리라.

  
 
성인(聖人)과 속인(俗人) 사이에 놓인 링컨의 운명은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몽환적인 꿈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그가 타고 있는 배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엄청난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이 순간 느꼈다는 강렬한 고독감은 전시의 지도자로서 익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어딘가로 이끄는 배의 엄청난 속도에 일말의 공포를 느낀다. 최초의 현대전으로 기록된 남북전쟁 이후 미국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변혁의 흐름에 내몰리며, 종전 직후 비극적인 암살로 임기를 마친 링컨은 이후 현대미국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게 된다. 

그가 예상하지도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었던 자신과 국가의 운명. 그 운명에 몸을 실은 링컨은 그 속도가 실상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아내에게 은밀히 토로한다. 그 자신의 기질이 느긋한 속도를 지향하는 속인에 걸맞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남북전쟁의 종전을 넘어, 남부와 북부의 진정한 통합을 지향했던 링컨에게 있어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수정헌법 13조는 정치인으로서 그의 의지를 넘어선 일종의 운명이었다. 그의 아내는 이러한 강렬한 의지가 종국엔 남편의 파국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염려한다.

연방의 완성은 링컨에게 있어 일종의 소명의식과도 같은 강렬한 행동기제로 작용한다. 이 영화에서 링컨을 굳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만큼의 독실한 종교인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현실정치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이 소명의식이 종교적 신앙에 근접하거나 혹은 이를 초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종교에 귀의한 신앙인의 경우 신의 '정언명령'에 근거한 행동양식은 속인의 이해를 벗어난 맹목성을 띄기 마련이다. 수정헌법을 관철시키기 위해 링컨이 자행하는 마키아벨리즘적 행태 또한 이러한 맹목성 내에서 설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표를 얻기 위해 야당정치인을 매수하고 협박하는 등의 협잡행위는 민주주의 수호자로서의 링컨의 신화성에 흠집을 가할 수도 있는 모습이다.

  
 
존 포드 또한 <젊은 날의 링컨>에서 마을 줄다리기 대회 시퀀스를 통해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반칙까지 서슴지 않는 - 자기 편이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줄을 마차에다 묶어버리는 행위 - 링컨의 모습을 교묘히 그려내기도 하였지만, 스필버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링컨의 신화적 업적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쟁취한 것이었음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링컨의 신화성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지는 않으며, 스필버그의 의도 또한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애초 속인의 지위에 머물던 한 인간이 어떠한 소명의식에 이끌려 숭고한 가치를 현실 속에 구현하고자 애쓰다가 종국엔 '순교'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예수의 신화만큼이나 세인들에게 감동을 준다. 

문제는 그러한 이야기가 일련의 윤색작업을 거쳐, 필연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시대성이 희석된 채 생명력 없는 성화로써 후대인들에게 전승되는 메커니즘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통해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가감 없이 그려내려는 시도를 하였지만, 신성을 모독했다는 강렬한 저항에 부딪혀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 자체가 예수라는 영웅의 업적 자체를 부정하고 전복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예수의 세속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속인에서 성인으로 이행한 그의 힘겨운 여정이 일련의 시대성을 동반함과 아울러 깊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 링컨이라는 미국의 아이콘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의도가 없었던 스필버그는, 영화 말미 링컨을 그러낸 극적인 쇼트 - 집무실 창문 커튼 뒤에서 수정헌법이 관철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표정을 알 수 없는 링컨의 실루엣 - 를 통해 그의 신화성을 제자리에 되돌려놓는다.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때로는 '더러운 손'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던 현실정치인 링컨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의) 범접할 수 없는 성인으로 변모한 순간이다. (포드 극장에서의 암살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것은, 남북전쟁의 종결과 남부의 흡수로 과업을 완수한 링컨이 이미 속인으로서의 지위를 초월하였음을 암시하며, 그의 암살은 이러한 신화를 매듭짓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필자는 소위 성인과 영웅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서두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영웅설화를 지탱하는 적확한 시대성의 묘사 여부다. 스필버그의 <링컨>이 전기영화로서 후대에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될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당대의 걸출한 인물을 영웅으로서 상찬하려는 평범한 도식에서 벗어나 그를 동시대인들과 호흡하며 투쟁한 한명의 인간으로 그려내고자 한 시도는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글·문성훈
영화평론가. 201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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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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