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약간 포함
영화 도입부의 규칙적인 동전 소리는 두 가지를 넌지시 말한다. 국가부도의 피해자는 제3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국가부도는 ‘관료’라는 장애물의 메타포를 거치면서 회피와 은폐가 난무할 것이라는 것. 최초의 그 암시는 동전소리로 그렇게 증폭된다. 거기에 더해 동전소리로 함축되는 국가부도 사태의 전조는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나는 구제금융을 요청할 당시의 IMF가 제시한 사항이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매우 굴욕적이었다는 식의 보도기사처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그 굴욕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고통의 모든 출발점은 거기에서부터 시작 되었다는 식의 영화가 바라보는 관점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가 바라본 국민들에게 찾아온 국가부도사태는 초기 암처럼 진행된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의 부도사태를 일종의 외과 수술이 필요했던 초기 암의 환부로 상정함으로써 치료가 아주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말하려 한다. 특히 영화는 OECD 가입국가라는 선진국의 상징적 지표가 주는 판타지가 한국사회의 치부를 숨기느라 초래한 모든 민낯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당시 구제금융 신청이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분명 그 제기 속에는 결국 모든 피해를 고스란히 입게 되는 국민들과 서구의 시스템이 절대적인 가치인양 추종하며 굴복하는 관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마침내 구제금융을 위한 밀실협상은 가장 고통스럽게 내 가족의 목줄을 옭아맬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 영화는 폭로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시현(김혜수)은 한국경제의 마지막 남은 불씨를 살려내길 간절히 원하는 인물이고, 재정국차관(조우진)은 IMF를 통해 또 다른 자본주의적 욕망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다. 그 와중에 윤정학(유아인)은 한시현과 재정국차관의 관점을 모두 섭렵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첨예하게 대립되는 두 관점을 모두 지닌 인물임에도 윤정학은 역사적 사실을 조망하기 위해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것으로 만족하는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유도 정황도 없이 그저 1990년대 말 한국 경제를 메시아처럼 예측하는 전지전능한 인물로 변색되어 영화를 힘 있게 견인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게다가 영화는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 파편적인 이야기를 한데 엮으려 노력하지만, 이야기의 정교함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압도되어버리는 바람에 여러 배우들의 호연을 무색케 하고 만다. 이 영화는 진정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한 때 우리 경제가 부실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위기를 겪었음에도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주는 것인데, 결국 거기서 영화는 자신의 단점을 드러낸다. 바로 그 경고의 메시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왜 영화가 역사를 다루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데에는 충실하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국가부도사태를 정치적 판단과 정서적 판단 그리고 도덕적 판단 등 여러 관점으로 접근해 볼 수는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적 재미는 제쳐두고서 그러한 여러 판단으로 하나의 사태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갖는다고 볼 때 이 영화는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충분히 제 가치를 발휘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를 통해서 국가부도사태의 진실을 각자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또 다시 우리에게 같은 위기가 찾아올 것이지만 이를 되풀이해서 실패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경고의 메시지를 보다 확고히 한다. 그렇다면 잠시 제쳐두었던 영화적 재미는 어떠한가?
대체로 한국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실패하는 이유는 늘 과한 힘주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한국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와 영화가 제시하는 상상력과의 관계에서 보면 늘 상상력이 지고 말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실패의 지점은 한국영화의 고질병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역시 분명한 사회적 메시지에 치중한 만큼 그 만큼의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상상력의 한계. 어쩌면 이 한국영화의 고질병 역시 실패의 또 다른 반복일지 모른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사회를 향해 “실패를 반복하지 말자”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 자신은 상상력의 한계라는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 정작 영화 <국가부도의 날> 자신은 고질적 실패를 스스로 반복하고 있으면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고의 메시지를 이 사회에 던지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반복된 실패라는 것은 운명적으로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국가부도의 날> 스스로가 자신의 실패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인가?
무엇이 되었건, 다시 말해 영화건 사회건 극복하지 못한 실패를 반복한다는 것. 그것은 한국경제나 한국영화나 마찬가지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두 개의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날을 그렇게 나에게 선사했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