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살면서 살아있는 과거를 즐겁게, 안쓰럽게, 느긋하게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가 동인을 제공한 산골, 할배할매영화는 <워낭소리>(2008)의 빅 히트로 한국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신드롬을 탄 <님아, 그 강을 넘지마소>(2014)가 독립영화계에서 예상치를 넘는 관객동원과 호응을 얻자 이 장르의 영화 제작은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할배할매영화는 오지를 배경으로 한 금슬 좋은 초고령의 부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다. 노부부의 훈훈한 정과 가식 없는 일상의 대화는 때로는 투박하게, 때로는 살갑게 관객들에게 코미디 이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인생의 교훈을 실천하는 솔직한 언행은 느림의 미학에 담겨 짙은 감동을 준다. 프롤로그는 할머니의 사후, 도회지의 자식들 집에서 기거하다가 봄이 되어 산골 집으로의 귀가이다.
양철 지붕을 인 산골 집에 빨래가 널리고 홀로 된 할배를 위해 딸은 분주히 집안을 청소한다. 애기가 된 듯 노인은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지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천식기가 도는 노인의 기침, 등을 두드려 주는 딸, 할머니의 모습이 투영된다. 백발을 두른 노인의 머리카락이 인상을 남기는 가운데 가늘게 낮게 깔리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이 노부부의 아름다운 시절로 이끈다.
할배가 호박잎에 앉은 호랑나비를 보고 있는 모습에서 착안한 제목 <나부야 나부야>는 하동군 화개면 단천에서 78년을 함께한 이종수 할배, 열일곱에 중매로 만난 김순규 할매 두 노인이 주인공이다. 환생의 상징 ‘나부’는 ‘나비’의 방언이다. 감독은 지리산 해발 600m에 위치한 노부부의 집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수려한 경관에 버금가는 노부부의 삶을 사계절에 담아낸다.
<나부야 나부야>에서 풍광도 주인공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눈 내리는 겨울 신이다. 꽃들은 눈을 받아들인다. 그해의 첫눈이다. 추위가 감도는 듯한 방안 분위기, “영감, 허리 아픈데 좀 누우.”, “내 원이 오래 안 아프고, 한 이틀 아프다가 죽는 게야.”, “죽을 복은 잘 타야..”등의 세상을 달관한 자들의 대화가 이어진다. 상황설정으로 빨랫줄에 걸린 명태, 시골 부엌 등 일상이 포착된다.
<나부야 나부야>로 데뷔한 최정우 감독은 경남권을 중심으로 노인 소재 휴먼 다큐를 외주제작해온 독립 PD이다. 2005년부터 방송일을 해온 그는 2014년부터 창원 KBS에서 방영 중인 「우문현답」을 4년째 제작하고 있다. 이 시리즈물은 다양한 삶의 체험에서 지혜와 연륜을 쌓은 노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시대의 현자들인 노인들이 주는 깨우침과 가르침은 150여 편에 이른다.
<나부야 나부야>는 2011년 11월 처음 만나 2012년 1월 방송된 KBS 1TV 「세상사는 이야기」(48화, 오래된 연인 편)의 주인공 노부부를 7년간 관찰한 기록이다. 2011년 11월부터 2016년 3월까지의 촬영, 2017년 12월에 후반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사이에 주인공 두 분은 모두 고인이 된다. 2015년 8월에 할매가 혼자 마당에 나갔다가 쓰려져 돌아가셨고, 1년 8개월 뒤 할배도 노환으로 타계했다.
주름진 할매의 “이승에서도 그랬으니까, 저승에 가서도 잘 살면 되지.”하는 애정과 감사의 말이 부부로서 행복한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할매의 애교와 할배의 헌신으로 짠 작품에서 할배는 거동이 불편한 할매 대신 요강을 비우고 씻는 일, 계란 수집과 동태찌개와 같은 요리, 커피타서 마시기와 설거지, 빨래까지 하는 노년의 삶을 보여준다. 할배가 설거지를 하면서 “할멈이 어찌나 추위를 타는지…그래서 내가 많이 해줘… 그게 내외간 정 아닌가.”하고 할매는 “나는 앉아 밥이나 먹고..”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한다.
영화는 산골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골읍내 모습도 등장한다. 할배는 아흔이 넘은 할매를 위해 내복과 버선을 사고, 붕어빵을 사는 등 동선을 확대한다. 설경 등 다양한 인서트가 영화의 느림을 달래준다. 할배는 낮에는 할매를 위해 작은 눈사람도 만들고, 밤에는 TV를 같이 보며 붕어빵을 먹으면서 부부의 정을 과시한다. 겨울밤은 깊어가고 부부는 다정한 모습으로 잠 든다.
감독은 사진 전공자답게 사진 같은 영상을 많이 삽입한다. 꽃피는 봄이 오자 툇마루에 앉아 하늘거리는 보리밭, 마을을 내려다보며 노부부는 봄을 만끽한다. 계절의 선호를 묻자 “몸을 함부로 하면 수명이 줄어.” 동문서답이 들려온다. 청력이 쇠퇴했음이다. 피아노 선율이 여리게 따라붙는다. 여름이 오자, 꼬부랑 할매는 호박밭에 들어가기도 하고, 졸음에 겨운 할배는 툇마루에서 잠 든다. 느긋하게 지켜보는 할매, 느린 개미가 지나간다. 은행나무와 단풍이 가을을 묘사한다. 하늘엔 먹구름이 핀다. 다시 노부부의 한해가 겨울로 진입하는 조짐이 보인다.
다시 부엌에 불을 지피는 할배, 영화 속 아궁이는 부부를 상징한다. 감독은 장작을 할매, 부채를 할배로 인식한다. 할매는 ‘미소 천사’, 할매를 웃게 만드는 건 할배이다. 불을 붙였는데 부채질이 없다면 장작이 탈 수 없다는 감독, 그래서 영화 속에는 아궁이 신이 많다. 감독은 블로킹을 특정하지 않고, 가급적 연출개입을 삼간다. 봄을 청춘, 겨울을 노년이라고 설정한 영화 속에 겨울 신이 많이 투입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TV시청, 사탕을 먹거나 일기쓰기는 변화의 일부분이다.
기상과 더불어 요강을 비우며 일상을 시작하는 할배는 손수 깎은 나무 비녀를 할매에게 선물한다. 미소가 일품인 할매도 “영감하자는 데로 할께.”하며 남편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삼강오륜을 읽어가는 밤, 세월을 소비하는 방법이다. 명태처럼 몸은 노쇠해지고, 하나 남은 감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암시한다. 2014년 12월 31일, 노을을 바라보며 양력 섣달그믐날에 대한 할배할매의 새해를 맞는 이야기는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노련한 자세를 보여준다.
감독은 얼어붙은 고무통의 물을 보여주며 할배의 소한과 대한에 얽힌 절기 이야기, 먼저 간 가족이야기로 후반부를 시작한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다시 시작하는 겨울에 바람 소리는 요란하고, 대나무가 심하게 흔들린다. 방안에는 밥통의 밥과 된장찌개가 등장한다. 할매는 “영감이 최고”라고 치켜 새운다. 할배의 검정모자와 할매의 노란 목도리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산이 인서트로 잡힌다. 다시 오는 봄은 빠르게 진행된다. 할매를 빗질하는 할배, 파스를 붙여주는 할매, 할매의 발톱을 깍아주는 할배, 할매는 고마움을 달고 산다. 할매와 구름이 오버랩 된다. 영원한 이별이다.
방의 이곳저곳이 치워진 느낌, 심각한 표정의 할배가 앉아있다. 봉당에 놓인 한 켤레 신발, “약 한개 못 마시고, 하동 장례식장에서 삼일 만에 나왔어, 이제 저승가면 만날까?..” “인간이 제일 미련해. 짐승은 다 알아.” 먹구름에 빗방울이 다른 계절을 알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음악은 가볍게 깔린다. 부감으로 잡힌 하동, 단풍진 하동, 눈 내리는 모습, 산열매, 눈 덮인 마을, 눈에 덮인 장독대와 요강, 다시 부감의 벚꽃, 선진 강변의 물소리가 노부부가 같이 했던 것임을 알린다.
이런 장르 영화들은 현란한 영상적 수사와 사운드를 자제하고, 살아온 이야기에 중점을 둔다. 밥통의 밥으로 혼자 식사하는 할배는 “할멈이 죽고 난 뒤로 밥이 적게 먹히네.”하면서 독백을 한다. 밖을 내다보는 할배, “영감 믿고 살지, 이승에서도 그랬으니, 저승에서도 만나면 되지. 오래 오래 사세.”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마당과 호박잎에 앉은 나비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나비를 바라보는 할배가 할매를 맞이하는 것 같다. 그 모습에서 영화는 종료된다.
진리는 간단명료하다. 깊은 통찰력으로 사유하는 현자들의 삶도 비교적 단순하다. 평범한 삶에서 추출해낸 진리는 달관에서 나온다. 감독이 구사하는 영상・사운드・몽타주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부야 나부야>는 최정우 감독 자신의 영화 감각으로 철학적 가치를 소지한 작품이다. 한정된 틀에서 미니멀한 구성은 영화의 새로운 묘미를 보여주었다.
글: 장석용
영화・무용평론가,시인,중앙대・동국대 대학원에서 영화전공,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한국영상작가협회 회장,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르몽드 영화평론상・PAF 영화평론상・한국문화예술상 수상, 서경대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출강, 이태리 황금금배상・다카영화제, 네팔 인권영화제・부산국제영화제・대종상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