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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정과 추억에 대한 어설픈 예의 - <나의 마지막 수트>

[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정과 추억에 대한 어설픈 예의 - <나의 마지막 수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아르헨티나판 희비극 그리고 로드무비

문학의 전통에 희비극(喜悲劇: tragicomedy)이라는 게 있다. 희극과 비극이라는 양분법을 지양하며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를 혼합하여 극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보통 희비극은 전개 과정에서 관객에게 감상적인 눈물을 요구하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때론, 희극적인 요소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지만, 비극적인 결실을 보기도 한다.

 

<나의 마지막 수트 El último traje>(2017)는 이런 희비극의 전통을 차용한 작품이다. 내러티브의 처음부터 희극적인 요소와 비극적인 요소를 혼재시킨다. 그런데 그 비극적인 요소가 홀로코스트(holocaust)다. 70년을 넘은 유대인의 비극이 아직도 유용하며 슬픔의 힘을 지닌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혼자 살아온 여든여덟 살의 전직 재단사 아브라함 부르스타인. 그는 리어왕을 흉내 내 딸들에게 효도 맹세 경쟁을 시킨 후, 자신의 집과 재산을 딸들에게 나눠주었다. 셰익스피어의 코델리아에 해당하는 막내딸 클라우디아는 그 우스꽝스러운 의식을 거부하고 쫓겨났다. 파블로 솔라르스(Pablo Solarz: 1969~ ) 감독이 온전히 셰익스피어를 추종했다면, 아브라함을 포함한 전 가족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비극의 장르를 선택하는 대신, 희비극에 로드무비 전통을 보탰다. 도보와 택시, 비행기, 기차, 자동차, 휠체어 등 모든 교통수단이 동원되는 이 로드무비는 아르헨티나판이지만 할리우드의 전통을 답습한다. 여행의 중간 중간에 장애물이 있고, 주인공은 그 장애물을 “놀라운 방법”으로 극복해 나간다.


2. 아직은 아름다운 세상, 그러나 너무 아름다운 세상

아르헨티나는 19세기부터 미국 다음으로 많은 유럽이민을 받아들인 거대한 유럽이민 수용지였다. 무한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본과 노동력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는 부족한 노동력을 이민자들로 충당했다. 때마침, 기아와 정치적 재난 등을 피해 많은 유럽인이 아르헨티나로 이주함으로써 서로의 이해가 충족되었다. 삶의 터전을 벗어나 타향에 뿌리내리는 이들에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법. 아마도 아브라함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온 다른 이주민들처럼 아르헨티나에 정착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 노인이 된 그는 고향과 옛 친구가 그립다. 하지만 혼자의 힘만으로 계획을 이룰 수 없게 된 그는 또다시 타인의 도움을 받는다.

 

<나의 마지막 수트>가 감동을 주는 작품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관객을 감동으로 인도하는 길이 개연성으로 포장돼 있지는 않다. 그가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친절과 관용이 존재한다. 일면식도 없던 옛 친구의 손녀와 마드리드 공항 경찰, 호스텔 여주인, 레오, 파리 동역(東驛)의 이름 없는 여인, 잉그리드, 그리고 고시아. 관객은 이들의 지나친 친절에 눈살을 찌푸릴 순 없지만, 고개를 갸웃거릴 수는 있다. 더욱이 초면에 이들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고약하고,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를 연상시킬 만큼 얄팍했다. 그는 한밤중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대인 공동체를 찾아가, 옛 친구에 대한 추억에 호소하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한다. 그는 목적을 이루지만, 그가 타인에게 요구하는 예의를 자기 스스로는 지키지 않았다. 호스텔 여주인 마리아에게는 숙박비 몇 푼을 할인받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잉그리드에게는 지속적으로 냉담했다. 그러나 세상은 믿을 수 없는 만큼 그를 따뜻하게 포용한다. 마드리드의 숙소에서 그의 전 재산을 훔쳐 간 도둑은 이야기로 존재할 뿐 카메라 앵글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나의 마지막 수트>의 세상에는 악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모두가 아브라함을 돕기 위해 개심(改心)한다. 마리아는 퉁명스럽고 사무적인 여인이었다. 레오는 예의 없고 무뚝뚝한 젊은이였다. 잉그리드는 주제넘게 이시디어를 사용하는 건방진(?)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노정을 위한 맞춤형 인간으로 변신한다. 그래서 <나의 마지막 수트>의 세계는 완벽하게 아름답고 관대한 동화의 세계가 된다. 세상은 은혜로 충만하다. 더욱이 폴란드 간호사인 고시아의 경우, 스페인어 실력만큼이나 그녀의 헌신은 감탄스럽다. 난생처음 본 할아버지를 위해 그녀는 자신의 자동차로 140km에 가까운 길을 운전해 갔다. 그리고 도시에 도착해서는 휠체어를 밀어 그를 안내하고, 해피엔딩을 목격한 뒤에는 호젓이 길을 떠났다.

 

반면 이 작품의 코델리아인 클라우디아는 어떤가. 그녀는 아버지의 과거를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공감하는 듯하다. 그녀의 팔뚝에 새겨진 아버지의 수인번호가 그 모든 것 이상을 웅변한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친구를 만나러 폴란드에 돌아가는 것을 의아해했다. 마치 그 친구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이 지점은 부녀(父女) 사이의 거리를 넘어서, 작품이 지니는 균열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 딸은 그를 배웅하지도 않았다. 그 만남이 마지막일 것이 거의 확실한 데도 말이다.


3. 추억과 친구에 대한 예의 또는 두려움의 회피

사실 아브라함은 피오트레크에게 수트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편지하겠다고 했어. 어떻게 내 삶이 변했는지 직접 와서 들려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유는 몰라. 난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

그저 그는 혼자서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자신이 재단한 양복을 그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정장인 이유는 그가 재단사이기도 하지만, 정장은 격식과 예의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친구,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친구에 대한 또 하나의 예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듯 아브라함은 대외적으로도 예의를 강조했다. 택시 운전수가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흡연을 양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레오에게는 “내 나이의 사람이 반갑다고 인사하면 잡지 따위 내려놓고 인사하는 게 예의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호스텔 여인에게 호칭 문제로 지적을 당하고, 잉그리드를 대하는 태도에는 그 예의가 없다. 초면의 고시아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건 교양 있는 태도일까? 그는 교양과 예절을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의 행동은 그렇지 못했다. 영화의 첫 부분에 나오는 미카엘라와의 에피소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위트나 재치 또는 영리함을 교양과 예절보다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나의 마지막 수트>가 필라델피아 유대인 영화제를 비롯한 몇 군데 영화제에서 수상하게 된 것은 홀로코스트를 토대로 한 우정이라는 피상적 내러티브가 주는 감동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에도 견고히 기억되는 우정과 보은(報恩)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의 마음에 울림을 줄 준비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아브라함이 뒤늦게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 것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할 수 있다.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조국 폴란드조차도 금기어일 정도로 그의 트라우마는 깊다.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수인번호는 현재의 삶에 드리워진 그의 과거를 드러낸다. 그런데 그를 이해 못 하는 딸들은 그를 또 다른 수용소(요양원)에 보내려 한다. 이는 노년의 문제와 젊은이들의 몰이해라는 또 다른 주제를 끌어들일 수도 있지만, 일단은 아브라함의 상처에 집중하자. 나치 수용소에서 다친 다리는 또 다른 수용소의 입소를 앞두고 절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 더욱이 그 다리는 그가 이름까지 붙여줄 정도로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 신체 일부이다. 모든 상황은 그를 악몽 같은 1940년대로 인도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에게 요양원에서의 여생은 끔찍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한 여행이 가능하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또다시 구원을 향한 것이었다. 구원의 길목에 천사들이 존재했고, 결국 그는 신에게 다가갔다. 작품의 마지막에 애매하지만 중요한 대화가 있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기 직전, 아브라함은 그가 없을까 봐 혹은 그가 있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고시아의 생각을 묻는다.

아브라함: “그쪽 생각은 어때?”
고시아: “제 생각요? 신은 하나예요. 이름만 다르게 부를 뿐 결국 하나의 신만 있죠. 다 그분의 의지예요.”
아브라함: “신 말고 피오트레크 얘기를 한 거야. 거기 있을까, 없을까?”
고시아: “어르신 생각처럼 다르지 않아요.”

탈무드에 의하면, 혹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명대사에 의하면, 한 사람을 구하는 건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피오트레크는 세상을 두 번 구원했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나의 마지막 수트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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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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