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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온전한 사랑의 진실 앞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설명하는 존 추 감독의 인터뷰에는 ‘인종’과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물론 “인종을 넘어선 보편적 이야기”라는 표현에서 두 단어만 떼어 놓고 보는 것은 의미를 왜곡시키는 것일 수 있겠지만, 언뜻 보기에도 앞의 단어 ‘인종’은 왠지 더 부적절하게 선택된 단어로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백인이니 흑인이니 하며 인종적 ‘규정’을 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바람직한 태도로 볼 수 없는 것 아니었던가. 그래서일까?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레이첼(콘스탄스 우)과 닉(헨리 골딩)을 동양인이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이야기는 ‘동양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때 이 이야기에 남는 것은 인종에 대한 평가와 편견뿐이다.

 

그런데 펙 린 고(아콰피나)의 입에서 농담처럼 ‘바나나’로 언급되는(겉은 황인 속은 백인) 검은 머리 미국인의 개념은 인종의 문제란 피부색만으로 규정될만한 사안이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이 영화가 제시하는 장면만 놓고 생각해 볼 때도 레이첼과 닉은 인종차별적 경계를 스스로 넘어선 존재로서 그들이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는 오로지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 영(양자경)과 레이첼의 관계이다. 그러니까, 동양인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결혼에 반대하는 어머니를 설득해야한다는 것, 그 뿐이다.
이 관계에서 누가 더 힘들까를 생각한다면 레이첼이라고들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한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결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의 같은 곤란과 이해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위 우리나라 아침드라마 속 막장이야기처럼 관계들을 단선적으로 그려내지도 않는다. 서로의 사랑을 감당하지 못해 결혼을 기대하는 남녀의 관계가 소위 '미친 부'(Crazy Rich)라는 건널 수 없는 만리장성 때문에 갈등의 전주곡이 되고 두 집안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은 결코 채워지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란 뜻이다. 더욱이 이 영화는 첨예한 인종의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문화, 유리천장, 대나무천장, 편견 등 극복의 문제를 주요 안건으로 넣어 놓지도 않았다.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거기에 다른 규정과 조건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크레이지 리치 아메리칸>이 아니라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인 이유는 미국의 백인 부자들의 사랑이야기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것이라면 미국의 동양인들의 사랑이야기에도 어떤 잣대를 들이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두 번째 단어 즉 ‘보편적 이야기’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인종’은 편견의 문제이지만 ‘보편적 이야기’는 ‘공정’(公正)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이 정해준 인종의 문제로 항상 편견에 맞서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 슬픔, 이별, 시기, 질투, 배신은 언제든지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보편적 이야기가 공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인종과는 상관없이 이 의미, 즉 사랑, 슬픔, 이별, 시기, 질투, 배신의 깊이를 이야기 해달라고 누구에게나 요청할 수 있다.

 

당연히 이 요청에는 누구나 답해줄 수 있다. 개별적인 인간을 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인간을 향한 보편적인 사랑. 그러니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누구의 사랑이냐고 물어보되 누구를 어떠한 잣대로도 규정지으려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종의 문제, 특히 동양인의 사랑이라는 규정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동양인(피부색으로서의 동양인)의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양인(레이첼)의 사랑을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쯤 되면 사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한에서 누구의 사랑(레이첼의 사랑)이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규정(동양인의 사랑)은 헛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니 조금 더 나아가자면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때, 그리고 그 판단을 위해서 어떤 기준에 맹목적으로 의지할 때(동양인, 흑인은 이러저러하다라는 규정) 그 기준에 기댈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는 것 역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 사랑의 조건 역시 개별적이기에 정확히 동일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이해의 시도, 그것을 일깨워 주는 게 사랑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종의 편견적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이런 의미를 지닌 채 보편적이면서 개별적 사랑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어느 한 쪽의 시각(백인)으로 다른 한 쪽의 사랑(동양인)을 평가, 규정하려는 시도를 걷어내 주는 사랑. 그런 의미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사랑 이야기는 인종을 떠나 인간 그 자체의 개별적 사랑이 중요하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훌륭한 사랑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개별적 사랑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탓에 사랑은 아주 복잡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보편성을 띠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모순어법인 탓에 한 낱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 폄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그런 말장난과 같은 사랑의 가치를 폄하대신 직접 확인시켜주는데 성공한데다가 외적 조건마저 변화시키는데 어느 정도 일조한다. 어쩌면 훌륭한 사랑을 표현하는 영화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개별적인 보편성’이라는 역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보여줄 수 있어서는 아닐까. 모르긴 해도 영화는 그래서 사랑과 만날 때면 늘 이렇게 작은 기적을 일으키나보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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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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