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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죽여주는 여자>

[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켜켜이 존재를 옭아매는 겹겹의 사슬고리, 그 중심을 스칠 때 울리는 소리의 연쇄는 공명과 반향을 거치며 나와 너의 경계 너머로까지 충만히 뻗어나간다” - <죽여주는 여자>

 


 

“화음과 으뜸음, 또 장력과 울림”

대부분의 화음엔 으뜸음이란 게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여겨볼만한 사실은, 물론 으뜸이란 말의 언표가 지시하는 만큼이나 그것이 가진 중요성을 부인할 순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의미를 곧장 지배소적인 영향력 따위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 역시 그리 적절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치는 일이라고 할 테다. 도리어 그건 주변에 함께 머무르는 동료 음들이 자칫 제 위치를 잃어버린 채 흔들리거나 표류하지 않도록 바싹 당겨 견인해주는 역할을 담당한다. 더불어 그 낱낱의 음들이 제 나름의 색깔을 충분히 발산할 수 있도록 북돋아주는 작업을 감당하기도 한다고 할 터이다. 달리 번역해보자면 으뜸음이란 튼실한 굄돌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제 허리를 딛고 선 모든 것들에 리듬과 생동감을 공급해주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으뜸음에 공을 들이고 신경을 기울여 집중해보는 건 비단 특정 개별단위가 가진 무게감만을 따져보는 게 아니라, 분명 화음 전체가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한층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파악하는 데에도 충분한 도움을 준다고 할 것이다.

이 으뜸음과 같은 건 음악만의 전매요소가 아니다. 모든 예술적 형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구성상의 그리고 언어표현상의 한 속성이라고 정돈해두는 편이 차라리 옳을 테다. 물론 영화도 예외일 순 없다. 특별히 복수적 가치체계들을 호명하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 으뜸음의 필요를 요청하고 있을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테다. 본 영화 텍스트에서 여성주의의 측면이 잠정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역할처럼 말이다. 기질적 장애, 트랜스섹슈얼리티, 인종적-민족적 타자에게 가해진 물리적-인식론적 폭력의 문제 등속의 각양 미시서사들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구태여 소영(미숙)이라는 한 여성의 비극적인 삶에 집중해보는 게 중요한 까닭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라고 하겠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이러한 ‘윗점 찍기’는 단지 그것만이 (더)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마치 거미줄마냥 저와 함께 촘촘하게 얽힌 지형 전체를 풍성히 살찌우는 일종의 자양분으로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테다. 과연, 어떻게 말인가? 그건 그녀의 삶-모습을 탐사하고 조명하는 여정을 통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될 터이다. 반면에 잠시잠깐 허공에 맴돌다가 흩어질 뿐인 관념적인 말들을 억지로 비적비적 끌고 들어와 설명해보려 한다고 한들 그다지 신뢰롭게 와 닿지 않게 될 것임은 물론이라고 하겠다. 그런 건 달변가의 화술일 따름이지 영화의 문법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담 영화는, 아니 영화의 언어를 발화하는 입술인 카메라는, 그녀의 삶을 달리 어떻게 추적하여 미덥게 형상화해내고 있는가?

 

마스터쇼트에서 카메라의 눈은 이끼어린 돌무지 틈바귀에 홀로 핀 한 떨기 꽃을 ―물론 이 꽃이 지시하는 건 소영이고 그래서 ‘여전히’ 문제적이지만― 집중된 시선으로 붙들어내고 있다. 이는 백미니 군계일학이니, 혹은 자연세계가 머금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이라든지, 내지는 필연적인 미적욕망의 태도 따윌 말하고자 하는 게 전혀 아니다. 도리어 강조되고 있는 건 어색함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차라리 이물감 내지는 이질감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고 할 테다. 상술해보건대 이런 느낌이랄까? 전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다고 여겨지기에, 하여 사방주위의 공기만으로도 단단히 ‘제 목을 죄어오듯 숨이 막히게 답답한’ 그런 감각이라고 본다면 아마도 옳을 것이다. 아울러서 귓전을 파고드는 음악의 간여는 이러한 거북스러움의 실체를 한층 더 명확하게 드러내어준다. 도무지 내화면 사운드라고도 외화면 사운드라고도 말할 수 없는, 외계(이야기바깥세계)로부터 틈입한 것임에 분명한 이 소리의 특이하고 기묘한 음악적 질감과 그 효과는 꽃이 당면한 처지와 적절하게 버무려지면서 좀체 무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불쾌감을 극도로 배증시킨다.

 

이처럼 부정적인 낯섦의 감각은 시각적 유비의 자리 옮김을 통해 계속적으로 탈바꿈된다. 가령 빌딩으로 그득한 대도시의 분주한 도심과 탑골공원처럼 느슨한 공간을 교차해서 대비시키는 카메라의 시선 역시, 단지 그 각각의 경우에서 시간의 흐름과 속도가 서로 달리 맺어진다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간의 인지는 공간형식에 따라 주관적이라는― 미학적 성찰만을 제시하기 위함은 결코 아닐 터이다. 주류세계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외곽 곧 변방의 주변부 세계는 단지 시간이 ‘흐느적대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언제 소멸에 가닿게 될지를 몰라 도래할 죽음을 기다리며 ‘허우적대는’ 존재자들의 집단적인 피난처이기도 하다는 것이 곧 카메라의 심중에 품고 있는 발화되지 않은 언표일 테다. 어쩌면 피난처보단 되레 집단수용소라는 말이 더 나을는지도 모르겠다. 암만해도 순전히 자의적 판단이나 자율적 선택의 원리를 따른 위치설정이라고 말하기란 좀 까다로운 것일 터이니 말이다. 대개는 이리 치이고 또 저리 치이다보니, 그 끝에 별 수 없어 여기에 가닿게 된 것이라고 본다면 옳을 성싶다.

허나 여기서 또 한 가지 종요로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만 할 필요가 있다. 그 특이점이란 건, 심지어 풍전등화의 멸절수용소에서까지도 서로 간에 더 낫고 덜 못함을 저울질하려는 인간본연의 생리가 작용하듯, 이곳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밑바닥의 밑바닥 층에 거하는 극한의 타자가 이를테면 소영과 같은 ㅡ박카스 할머니의ㅡ 존재라고 할 테다. 참으로 볼품없는 이들의 노욕에 기대지 않고선 달리 생을 유지할 길이 없기에, 이를 악다물고 아득바득 ㅡ죽여주는 여자라는 서글픈 수사를 제 별호로 취하게 될 만큼이나ㅡ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런 류의 인간 말이다.

 

“켜켜이 쌓인 고통의 능선들을 곱아 돌매”

소영이 단박에 여기까지 흘러오게 되었으리라고 볼 순 없을 테다. 아무렴 이 지경까지 내몰리게 된 데엔 평생의 갖은 사연들이 겹겹이 간여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터이다. 처음엔 한 올 또 한 올 삶에 덧씌워져 오던 얇은 실선과 같던 것들이 아주 켜켜이 엮인 실타래마냥 삶을 튼실하게 포박하고 에워싼 끝에, 이젠 차마 벗어던질 수 없는 구속복과 같이 돼버린 형국이라 본다면 아마도 옳을 게다. 고도로 가부장적인 사회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포화 속에서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자 북새틈에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던 전쟁고아로서, 미군부대 앞 클럽의 댄서로서, 가정폭력을 소일거리 삼던 미군의 아내로 끝내는 핏덩이를 입양 보낼 도리밖엔 없었던 어미로서, 그러고도 모자라 휘모는 세월의 광풍에 계속해서 간단없이 떠밀리다 보니 어느덧 쇠잔해져 거추장스러운 몸을 가진 노파가 되어, 마침내 핸드백에 숨긴 박카스를 눈치 보며 남몰래 늙은이들에게 건네는 이 자리에 이르게 됐다고나 할까.

이렇게 정돈해볼 수도 있겠다. 한 터럭씩 맨살에 가해져오는 압력이 그 무게를 더해갈 때마다 머리카락이 조금씩 밀려나가는 전설 속 초인마냥 뭔가가 속아지로부터 슬슬 빠져나가는 것 같더니만, 어느새 한 인간 존재로서 마땅히 취함직한 최소한의 위엄과 권리마저도 완전히 박탈당한 하위주체의 신세로 몰락하게 돼버렸다고 말이다. 심지어 그 억압의 기세는 여전히 잦아들 줄을 모른다. 혹여나 즈음해서라도 그만두어준다면 퍽이나 좋으련만, 이젠 아예 바닥으로 내려앉은 그녀의 그림자마저 아주 삼켜버릴 심산에선지 오늘도 보이지 않는 흉악의 실패로부터 옅고 진한 실들이 차갑게 풀려나오고 있다. 그렇잖아도 위태로운 그녀의 삶을 한층 더 복잡한 위기상황 가운데로 내어 몰기 위해서 말이다.

민호의 ㅡ여하간 민호 역시 근일 소영에게 얹어진 짐임을, 또 과거 그녀에게 새겨진 쓰라린 상처가 그 짐을 떠맡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을 테다ㅡ 손을 부여잡고 셋방으로 걸어오는 좁은 골목길. 카메라는 의식적으로 눈을 돌려 그네들의 머리 위 풍경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등 굽은 전신주에 매달려 이리저리 난삽하게 교잡하고 있는 허다한 전깃줄들이, 사실상 폭삭 늙은 그녀를 칭칭 동여 옭아맨 갖은 삶의 문제들과 억압의 상관인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번역해본다 한들 큰 문제는 없을 터이다. 아래의 두 사람을 향해 더디게만 움직이는 굼뜬 패닝쇼트는 촘촘히 얽힌 사슬들의 무게를 체감토록 만드는 카메라의 정동적 시선일 게다. 그 낱낱의 굴레들이 남긴 무게감은 확실히 텍스트 속에 효과적으로 가시화된 채 드러나고 있고, 이를 추적해보는 건 영화를 읽어나가는 미더운 길이 될 것이란 점도 분명하다고 하겠다.

 

“낱낱의 사슬고리들을 해체해보다”

그 무게감이 가장 감각적으로 현시되는 건, 일차적으론 그녀가 손님으로 맞은 남성들과의 관계에서부터라고 하겠다. 억지로 진행된 구강성교 끝에 흡족한 듯 끈적끈적한 신음을 표하는 한 남성, 그리고 입과 그 주변은 물론이거니와 전존재를 뒤덮어오는 비릿함과 치욕을 차마 견뎌내지 못해 욕실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불쾌감을 덜어내고 있는 소영을, 카메라는 공간을 분리하는 섬세한 작업을 통해 대비적 시선으로 표현해낸다. 크게 벌린 괴물의 입과 같은 열린 문 안팎으로, 모텔 방 내부의 남성과 실내에 딸린 화장실 속의 소영이 확연히 나뉘어 구별된다. ㅡ붉은 기색에 대립되어ㅡ 습하고 차가운 느낌의 화장실 안은 마치 모든 것을 주저 없이 집어삼키는 괴물의 냉랭한 식도를 연상시킨다. 더하여 삼키는 자와 삼켜진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힘의 차이를 가늠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이다.

 

뿐만은 아니다. 야산에서 관계를 종용당한 경험 역시 그녀가 단지 욕구해소를 위한 인간이하의 도구, 다시 말해 유기물로 된 영혼 없는 인형(sex doll) 그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했음을 선연히 드러내준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어떤 심보라면 사람을 이렇게까지 대할 수 있는 걸까. 그녀를 철저히 제 아래에 두는 위력을 행사함으로써 이젠 볼품없어져버린 자기 모습을 은폐하고, 나아가 잠시나마 ㅡ옛 영광을 떠올리며 자위하는ㅡ 기만적 힘에 취해보고 싶었던 것일까? 마스터쇼트에서 등장한 바로 ‘그 꽃’이, 알고 보니 오래 주린 짐승마냥 제 위에서 맹목적으로 헐떡이는 데 여념 없는 남성을 태운 채 공허한 눈으로 야산에 뉘인 그녀의 머리맡에 피어있는 지금의 ‘이 꽃’과 동일물의 오브제라는 건 분명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자취를 좇아 지면을 찬찬히 훑어 오르는 카메라의 사뭇 진지한 시선이 구태여 불필요한 장난질과 연결될 리 없다는 점을 곰곰이 곱씹어본다면 말이다.

 
 

소영을 편리한 도구취급한 건 단지 그녀의 비윤리적 ―여기서 윤리라고 함은 평균적인 도덕률이나 법제적 타당성보다는, 개별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어느 쪽 한편으로든 크게 기울어지거나 어그러뜨려지지 않고서 준수돼야만 할 평등과 자유라는 맥락에 기초한다― 고객들만이 아니다. 대표적으론 집요하리만치 그녀의 뒤를 밟고 있는 청년다큐감독 역시 그녀를 옭아매는 비가시적인, 그러나 너무나도 견고한 억압의 흔적을 실답게 보여주는 장치로 여실히 복무하고 있음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테다. 어째서 그는 그녀의 동의를 구하기도 전에 카메라부터 설치해 둘 수 있었을까? 우선은 자기 말부터 들어보라며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또 스스로 의로운 일을 한다고 자처하면서 무턱대고 타인의 협조를 요구하는 ―사실상 종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자신부터가, 어쩌면 가까스로 눌러둔 누군가의 쓰라리고 뼈아픈 기억을 바짝 달군 쇠꼬챙이로 뒤적이며 유린하는 불의를 자행하고 있다는 걸 혹 알지 못하는 걸까. 그렇담 그건 당최 누구를 위한 의로움인가?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만일 그녀가 박카스 할머니가 아니었을진대 이처럼 가볍고 안이한 태도로 스스럼없이 다가오기란 좀 힘들었으리란 점이다.

 

불시에 모텔에 들이닥친 공권력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 역시도 크게는 매한가지다. 달아날 낌새를 놓치지 않게 활짝 열어젖힌 문 앞을 다시 ㅡ안쪽에서 닫아걸기보다는 굳이ㅡ 인력으로 틀어막은 채 진행되는 이른바 ‘단속현장’의 무시무시함은,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중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인지, 혹 그 본령이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질서 그 자체를 최종적인 심급으로 추대하기 위함인지조차 좀처럼 식별하기가 어렵도록 만든다. 적어도 문이라도 닫아걸고 수사를 진행하는 편이 보다 인간적이지/효율적이지 않았을까? 법률의 수호자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중의 수호자로서 썩 적절한 행동은 아니라고 할 테다. 심지어 그 두려운 현장의 목소리를 큰 손실 없이 들려주고자, 카메라는 일부러 스스로의 시선을 고이 거두어들이는 전략을 취해보기도 한다. 이는 시각 활동에 쏟아내는 기력이나 집중력을 온전히 청각본위로 되돌리기 위해서일 게다. 외화면 사운드로 처리된 경찰의 목소리에선 마치 눈을 감고 듣듯 그이의 권위적인 태도와 말의 고압적인 뉘앙스가 선연하게 스미어 나온다. 보통의 노인이라고 생각했더라면 분명히 이렇게 대할 순 없었으리라. 만일 소영이 민호의 덕을 입지 않았다면 그녀 역시도 살벌한 폭력의 현장에서 무사히 몸을 뺄 수 없었을 것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테다.

 

어찌된 일인지 (이주) 여성과 아동들을 보호하기 위한 시민단체마저도 그녀에겐 냉랭하다. 이즈음이면 세계가 그녀를 향해 등을 돌렸다는 허언조차도 일견 타당해보일 정도라고 하겠다. 위기에서 민호를 건져내어 돌본 것이 유괴행위라며 ―법리적 해석판단과 실정적인 의미 사이의 간극을 다른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으름장을 놓는 시민단체 직원 앞에서 바짝 얼어 말문이 막힌 소영 대신, 몇 마디나마 어렵사리 대꾸하는 건 도훈이다. 어쩌면 남자를 대동해야만 기가 죽지 않을 것이라던 그녀의 우려가 현실화된 셈일는지도 ―텍스트 속에서 이따금 카메라는 부지중에 도훈과 소영의 눈높이 차이를 은근슬쩍 위계적 느낌을 자아내는 앵글을 통해 잡아내기도 한다― 모를 일이며, 더불어 이러한 압력이 변변치 않는 하층민 노파에게 가해지는 ―민호의 신병인도를 위해 사전 연락을 몇 차례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의 대략적인 신상정보를 알게 되었을 터이다― 무람없지만 ‘자연스러운’ 폭력이란 사실만은 아무렴 확실할 터이다.

 

“가장 존귀한 것의 맡김, 혹은 가장 불편한 것의 떠밂”

허나 가장 문제적인 건 한때는 그녀의 벗이었던 ㅡ적어도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믿었던ㅡ 이들이 소영에게 가한 가없는 폭력이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주저함 없이 ‘죽여주는 여자를 정말로 죽여주는 여자로 만들었다고’ 술회하는 바로 그 부분 말이다. 여기서 많은 이들은 기중에서도 그녀를 ‘범법자로 전락시킨’ 부분을 특별히 떼어내어 따져 물을만한 지점으로 진단해 내겠지만, 사실 그런 건 문제의 극히 표면적인 층위일 뿐이다. 좀 더 근본적인 맥락에서 면밀하게 따져보아야만 할 것은, 그들이 그녀에게 제 ‘생명’을 ‘맡겼다’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생을 맡기다니? 물론, 자칫하면 오해하기 쉽다는 점 역시도 짚고 넘어가야만 할 테다.

확실히 생명은 가장 존귀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걸 좀 달리 번역해본다면 다른 무엇들보다도 무거운 것, 내지는 다루기 곤란하고 까다로운 것 등의 이름이 된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서 스스로는 차마 어찌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생명을 누군가의 손에다 미룬다는 것, 곧 어마무지하게 무거운 것을 제 눈앞에서 대신 파괴해달라며 누군가의 손아귀에 칼을 떠밀어 쥐어주는 행위란, 실제 부수어지는 영혼이 겪을 고통 그 이상의 처참한 일그러짐을 집도하는 자의 영혼에 안겨다준다. 소영이 정말로 극단적인 쓰라림에 몸부림치며 구역질을 참아내기 어려워했던 지점을 꼽는다면, 그건 비릿하고 불쾌한 남성의 체액이 입이며 목구멍으로 비집고 들이닥쳤던 때가 아니라, 도리어 병실에 누인 그녀의 지인을 제 손으로 영면에 들게 하여야만 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분명한 건, 과연 어떤 존재에게라면 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안전하게 떠넘길 수 있겠느냐는 화두의 해답이다. 정말로 자신에게 가까운 그리고 소중한 존재에게 대단히 고통스런 일을 떠맡기는 법이란 거의 없다고 하겠다. 그런 일이 쉽게 가능했더라면 차라리 자신의 자녀나 남은 가족을 택하지 않았겠는가? 혹시라도 그이가 자기를 망실해버리고 폐인이 될까 두려워서라도 결코 과도한 짐을 얹어다 줄 순 없을 것이다. 반면, 혹여 그이에게 상처를 주고 떠나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부담이 남지 않을, 환언하자면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을 ㅡ고작 돈 몇 푼 쥐어주는 것만으로도 남은 부담의 정서를 완전히 훌훌 털어 버리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만큼의ㅡ 정도로 내게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존재라고 한다면, 이 일을 맡기는 데에 달리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거북한 짐을 비로소 무리 없이 떠안길 수 있으리란 뜻이다. 극히 편한 맘으로.

달리 번역해보자면 실상 그녀의 벗들은 생명이란 고귀한 것의 처우권한을 마치 선물이라도 되는 양 지극히 신뢰하는 소영의 손에 건네어 주려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되레 그건 그녀를 신발깔개마냥 발밑에다 두고서 마구 짓밟은 것과도 꼭 같다고 할 터이다. 실제로 그녀는 정신적인 무너져 내림과 더불어 물리적인 파멸을 고스란히 안아 들이게 된다. 법봉의 숙연한 울림과 함께 차디찬 사멸의 길로 접어들게 돼버리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혐의점은 분명하다. 그녀에게 멍에를 씌운 이들이 정녕히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은밀한 곳 의식기저에선 아무렴 박카스 할머니 하나 정돈 없어져도, 이 세계엔 솜털만큼의 변화 따위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노잣돈도 얹어 주었으니 전연 거리낌이란 없었을 테다.

 

“박탈된 것을 응시하는 행위의 의미”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카메라는 두어 번에 걸친 시간의 왜곡작업을 감행한다. 먼저는 소영이 청주 감옥소에서 보낸 물리적 시간을 극단적으로 압축시켜버리는 과정이다. 그녀가 몸으로 살아낸 ‘만만치 않은 고역의 시간’을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히 잘라내’ 버리려는 태도랄까. 반대로 그녀가 이미 죽은 이후의 어느 한 시점, 그래서 사실 이젠 ‘덧없고 의미 없는 그 순간’을 마치 시간이 아주 정지되어버린 것만 같은 속도로 ‘무한히 증식시켜’ 버리는 작업도 있다. 이 현저한 대비만으로도 세계에 속박당한 채 머물다간 그녀의 실존이 머금은 한 줌 되지 않는 ‘존재감’이 날 것으로 충분하게 확인된다고 하겠으나, 더불어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양미숙’ 그리고 ‘무연고’라고 적힌 그녀의 납골함을 오래도록 붙들어 맨다. 늘 들이키던 산소마냥 그녀 주위를 쉬지 않고 맴돌던 소영이란 이름은 거부감 가득한 미숙이라는 이름으로 갈음되었다. 더하여 비록 좁은 장소나마 더위와 추위를 피해 몸을 뉘이던 그녀의 살 냄새 그득 밴 셋방의 존재는 지워져버리고, 무연고라는 가상의 공간이 그녀에게 족쇄 채워졌다. 심지어 생을 마감한 이후에까지도 제 고유성을 박탈당한 채 외부의 힘에 의해 상징화 된 의미로서 기록되고야 만 것이다.

 

혹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대관절 소영에게,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에 집중할 필요가 무엇이냐고 되물을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적 경험을 일구어가는 과정에서, 아마도 그렇게 하느라 인상을 잔뜩 찡그리게 되고, 때론 구역질과 욕설을 목뒤로 되삼키는 불쾌의 경험을 고스란히 감수하면서까지, 구태여 무리해야만 할 필요가 있느냐는 뜻일 게다. 여러 가지로 답해볼 수가 있겠다지만, 한 가지 확실한 응답은 ‘아마도 여전히 이렇게 되묻는 물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일 테다. 물론, 아무렴 틀에 박힌 대답을 던지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말을 재빨리 덧붙여두고자 한다. 여기까지만 듣고 성급한 오해에 가닿는 건 좀 이르단 뜻이다. 가령, ‘우리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유의 소외된 인간 군상들이 있다?’ 혹시라도 이렇게 답이 훤히 정해진 단순 도덕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자 굳이 영화를 찍는 작가는 없을 테다. 그렇담 적어도 영화의 해석 역시 그에 걸맞은 최소한의 수준을 갖추는 편이 합당하다고 할 터이다.

졸고의 서두에서 그녀의 삶이 영화 텍스트 속 (화음의) 으뜸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노라고 밝힌 바 있다. 여전히 문제는 여기로부터 발원하고 또 종결된다. 그녀의 삶에 새겨진 굴곡의 리듬마저 적실히 읽어내지 못한다면 거미줄처럼 함께 얽어진 여럿 존재자들의 삶을 실답게 파악해내는 건 암만해도 어려운 일이 되리라는 점이다. 어떤 식으로든 그녀와 다른 이들이, 조금 무리해보자면 ‘그녀와 내’가 촘촘한 관계망으로 얽어져 있다는 것. 설령 그것이 부정적인 측면이 됐든 혹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든, 나와 그녀가 불가분의 필연성으로 아울러 연결 접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건 대단히 종요로운 일이다.

반복 강조하자면 한계까지 내몰린 자의 처지를 살펴 헤아리고 있지 못하단 사실보다 더욱 문제시 되는 건, 설령 그 묶임의 강도는 어떠하다 한들 내가 그이와 함께 엮이고 연루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불가피한 진실에 ‘무지하단’ 점이라고 하겠다. 이는 누군가가 병이나 정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내가 그이에 비해선 을 즈음이 될 것이라는 둥의 수학적으로 편리하게 정식화 가능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닐뿐더러, 얼마간의 차이를 인지하고서 공존하는 삶을 새로이 모색하자는 유의 당위선언을 내세우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 모든 접근들에 한 발 앞선 인식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미-항상(already-always), 그러니까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굉장히 촘촘한 망상(reticular)의 관계지형 위의 한 축으로 엮어진 채 이미 너와 그리고 다른 누구와 어우러져 공존하고 있다는 인식 말이다.

 

“영화의 기여, 방향타 재조정에의 요청”

그렇담 마주한 쟁점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 될 테다. 공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나도 모르게 공존하고 있는 삶의 모델을 어떤 식으로 ‘재조정할’ 것이냐 하는 과제 말이다. 하지만 재조정의 방향타를 조작하는 건 타자의 삶 형태를 편견 없는 눈으로 대면하는 다분히 번거로운 노정을 거치지 않고서라면 그 이정표를 수립하기조차도 어려운 일이 될 테다. 그렇기에 우리는 점점이 그 생의 불꽃이 사그라져 가는 소영의 삶을 면밀히 추적해 들어가는 동안 텍스트가 안겨다주는 비릿하고 불쾌한 정동에 익숙해져야만 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안아 들이면서 격렬히 부대껴야만 했다. 영화의 호소 앞에서 구태여 굳은 영혼으로 일관하겠다면, 달리 만류할 당위는 없겠지만, 언젠가 자신과 꼭 같은 모습을 영화 속 어느 누군가에게서 발견하는 일도 아마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게 될 것임을 넌지시 일러두고자 하는 바이다.

실은 이건 정적인 호소나 도의적 요청이 아니다. 이미 불가피한 복수적 관계망의 파이프들은 양방향으로 매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예외는 아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복잡하게 매설된 파이프를 타고 오가는 물질들이 미치는 영향력의 밀도가 켜켜이 쌓여갈수록 그건 분명 혹자의 삶을 ㅡ어떤 쪽이 되었건ㅡ 유의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졸고의 결론이란 게 처음 마음먹은 바에 비해 ‘다분히 온건한 그리고 수정주의적인’ 방향으로 진행해 나아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방향을 틀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란 분명하다― 타자의 실존과 나의 실존이 이미 상호교차하고 있음을 헤아리는 건 최우선의 과제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본 영화텍스트가 선사하는 최소/본질적인 기여다.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타자 존재를 망그러뜨리는 데 일조한다거나 혹 그이의 실존이 뭉개진 채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방기하는 데에 꽤나 ㅡ어쩜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만ㅡ 공헌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역시도 중요하겠지만, 이건 확실히 차후의 문제다. 그보다 중요한 건 뫼비우스의 곡면을 통해 접붙여진 것 마냥 모두가 공통의 운명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인류의 궁극적 이상으로서 ‘평등자유’의 움직임을 향해 한 발짝 옮겨놓길 꾀하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출발은, 내 겨드랑이에 난 눈에 띠지 않지만 실재하는 허다한 파이프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자리에서부터다. 단지 이 작은 실마리만이라도 감각하고 또 발견해낼 수 있다면 영화의 미덕에 어느 정도까진 가닿았노라고 말하는 데에 아마 큰 문제는 없을성싶다.

 

글: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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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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