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센터

customer center

070.8868.6303

한국 영화비평의 역사와 영평상 30주년의 회고와 반성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비평 세미나 : 주제발표 1

 

한국 영화비평의 역사와 영평상 30주년의 회고와 반성

 

김  종 원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가)

 


들어가는 말

   처음에「한국영화비평 50년의 회고와 반성」이라는 제목의 원고청탁을 받고, ‘한국 영화비평 50년’이라는 대목이 걸렸다. ‘한국영화비평 50년’이라면, 이는 1960년 창설되었다가 해체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이하 영평으로 지칭)의 탄생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영평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도 영화평론가들이 존재했고, 그 길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과 같이 좋은 환경과 여건 아래서 학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정도였다. 그렇다고 척박한 문화풍토 아래서 노력하며 일군 그들의 성과마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영화비평만이 아니라 음악, 연극, 무용 등 방계 공연예술 분야의 비평에도 해당된다. 어느 분야든 개척기에는 서툴고 어색하게 마련이다. 구전에서 시작된 한국의 신소설, 연쇄극에서 탄생한 한국영화, 연희에서 비롯된 연극이 다 처음에는 미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존재가 부인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은 곧 발전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전제로 필자는 ‘영평의 50년’에 국한 시키지 않고 우리나라 영화비평의  맥락 속에서 영평의 50년을 논하고, 영평상 30주년을 회고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런 과정에서 아쉬움과 반성해야 할 점은 없었는지도 돌아보려 한다. 다만 논제의 상당 부분이 영평의 창립 배경과 영평상 등 필자와 직접 관련된 일이 많다 보니,
개인적인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후대의 기록이므로 출발점에 섰던 당사자들의 증언은 충실을 요한다. 비록 사사로운 이면사라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정사(正史)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창기 영화평론가의 등장과 활동

   우리나라에 미숙하나마 영화평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5년 이구영(李龜永)이 매일신보(1925.1.1)에「조선영화의 인상」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여기에는 <춘향전>(1923, 동아문화협회 작품)을 비롯한 <장화홍련전>(1924, 단성사 촬영부 작품), <해(海)의 비곡(秘曲)>(1924, 조선키네마 작품), <비련의 곡>(1924, 동아문화협회 작품) 등 네 편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춘향전>은 1923년 조선총독부가 저축을 장려할 목적으로 만든 계몽영화 <월하의 맹서>에 이어 민간인이 최초로 제작한 흥행영화이다.
   <장화홍련전>(박정현 감독)은 앞의 <춘향전>(하야가와 고슈 감독)이나 뒤에 나온 <해의 비곡>(왕필렬 감독), <비련의 곡>(하야가와 고슈 감독)이 모두 일본인들의 주도 아래 만든 것과는 달리 국내의 자본과 기술로 완성된 순수 조선영화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네 작품이 모두 한국영화 초창기에 나온 일련번호 1번부터 4번까지 해당하는 역사적인 비중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중에서 <장화홍련전>에 대한 몇 대목만 골라 당시 영화평이 어떻게 쓰였는지 잠시 살펴보자.

 

영화화한 <장화홍련전>이 성공이었느냐면 성공이랄 수는 없어도 우리 첫 작품으로는 기분간(幾分間)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카메라맨 노력은 전편에 창일(漲溢)하였었고, 더블 엑스포츄어 영화기교는 열졸(劣拙)하였다할지라도 클로즈업, 순간 촬영 같은 것은 종합예술인 영화극의 본령을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랴 하였음에는 당연한 노력일 것이요. 그러나 감독자가 있었느냐 하리만큼 기연상(技演上) 불통일할 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의상에 대한 부주의는 말하기도 어려웁다. 의상은 여름 것에 침구는 겨울 것이란 말할 수도 없고 좌우간 전편에 넘치는 센테멘탈의 정조기분(情調氣分)은 본영화의 특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 생략)

-이구영,「조선영화의 인상」매일신보, 1925, 1, 1-

 

   카메라와 영화기교, 의상까지 고루 언급하고 있다. 다만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열졸(실은 졸렬), 기연상(연기상) 등의 어색한 표기가 눈에 띈다. 이는 상호간을 호상 간으로 쓰는 경우와 같다.
이 글이 나온 지 사흘 뒤에 윤갑용(尹甲容)의 영화소평「<운영전>을 보고」가 동아일보(1925,1,4)에 게재된다. <운영전>은 실제로 <비련의 곡>에 이어 다섯 번째 나온 흥행작이다. 국내 영화에 대해 ‘영화소평’이라는 이름으로 평가한 최초의 예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게 되면 이구영의「조선영화의 인상」은 필자가 일찍이「한국영화 비평사 시론」(『영화평론』창간호, 1989) 에서 언급한 그의「조선영화계의 과거ㆍ현재ㆍ장래」(조선일보 1925,11,23~12,7)의 발표 시기보다 11개월이나 앞서게 된다. 10여회에 걸쳐 쓴 장문의「조선영화계의 과거ㆍ현재ㆍ장래」가 영화의 도래시기, 제작, 흥행 등 영화계의 현황을 개괄적으로 정리했다면, 네 편을 동시에 다룬「조선영화의 인상」은 저널리즘비평을 지향한 글이었다.
   이구영(1901~1973)은 <아리랑>(1926)이 개봉될 당시 단성사의 선전부장을 지냈다. 이후 이필우와 함께 고려영화제작소를 세우고 통속극 <쌍옥루>(1925)를 감독했으며, <낙화유수>(1927)와 <아리랑 2편>(1930)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이구영이「조선영화의 인상」과「조선영화의 과거ㆍ현재ㆍ장래」를 발표한 이래 문학, 영화, 언론 분야에 종사하던 심훈, 임화, 안석영 등 12명 안팎의 인사들이 영화평단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영화비평의 연륜은 어느새 85년을 헤아린다. 다음은 1920년대부터 해방 전까지 활약한 영화비평가들의 면모이다.

 

역대 영화평론가

(초창기~ 해방 전후)   

 

 

이 름

주 요 평 론

지 면

발표 연월일

별 칭

1

이구영

최근 조선영화계

민중오락과 영화극

조선일보

신 민

1926, 8,27~31

192610월호

李紅園

2

심 훈

영화비평에 대하여

문예작품의 영화화 문제

별건곤

문예공론

19282월호

19295월호

 

3

윤기정

조선영화는 발전하는가 <사나이>

영화이론과 비평의 근본적 의의

조선지광

조선지광

1928,11,12 합병

19311월호

尹曉峰

4

서광제

조선영화의 실천적 이론

<철인도> 비판

중외일보

중외일보

1929, 10,25~26

1930, 4,26~5,1

 

5

박완식

발성영화의 국산문제

영화 교화 문제

동아일보조선일보

1929, 12,24~27 1930, 2,22~25

 

6

남궁옥

<아리랑 후편>을 보고

조선영화의 최고봉 <나그네>

중외일보

매일신보

1930, 2,19

1937, 4,22~25

 

7

임 화

서울키노영화<화륜>에 대한 비평

조선영화론

조선일보

춘 추

1931, 3,25~4,3

194111월호

林 華

8

김유영

<판도라의 상자>와 프로영화

영화예술운동의 신방향

조선일보

1930, 3,28~4,6

 

9

안석영

조선토키 <춘향전>을 보고

조선영화의 갈길- 영화와 신체제

조선일보

조 광

1935, 10,13

19411월호

安碩柱

10

주영섭

시나리오 문학과 시나리오

영화예술론

동아일보

동아일보

1938, 9,9~20

19394월호

 

11

김정혁

조선영화의 현실과 전망

조선영화인론 -감독 이병일론

조 광

영화시대

19404월호

19482월호

 

12

오영진

조선영화의 제문제

조선영화의 시상(時相)

조선일보

조 광

1939, 7,29

193912월호

 

 

이 가운데 소설「상록수」의 작가인 심훈(沈熏)은 1928년부터 31년 중반까지 『조선일보』기자로 재직하며「조선영화의 현재와 장래」(조선일보 1928,1,6), 영화예술의 순수성을 옹호한「우리의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옹호하는가」(조선중앙일보 1928,7,25) 등을 발표했고, 이에 맞서 윤기정(尹基鼎), 서광제(徐光霽), 박완식(朴完植), 김유영(金幽影), 임화(林和) 등은 영화를 대중교화의 수단으로 여기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편에서 이른바 ‘무기로서의 예술론’을 개진했다. 주영섭(朱永涉)은 연극평을 쓰면서도 시나리오, 음악 등 하위 장르까지 아우르는 열의를 보였고, 남궁옥(南宮玉)은 일반적인 시론보다 리뷰에 강했다. 신문사에 재직하며 소설의 삽화까지 그린 안석영(安夕影)은 저널리스트답게 대중지향적인 인물론과 영화계의 이슈를 즐겨 다룬 반면, 김정혁(金正革)은 영화역사, 비평, 동향 등 영화 전반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했고, 오영진(吳泳鎭)은 극작가라는 선입감을 무색하게 할 만큼 영화를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특히 서광제는 뒷날 조선총독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호응하여 친일 방첩 계몽영화 <군용열차>(1938)를 만들고 해방된 뒤에도 평필을 접지 않았다.
   지금은 쟁점이 있더라도 영화비평가들이 피해 가는 경향이 있지만, 그때만 해도 특정 작품을 둘러싼 논쟁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도 <아리랑 그후 이야기>(1930, 이구영 감독)를 둘러싼 공방이 가장 큰 화제였다.
   <아리랑>(1926)의 후편인 <아리랑 그후 이야기>는 여동생을 해치려드는 지주의 앞잡이를 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돼 옥중생활을 하던 영진이가 ‘정신상실증 환자’의 범죄란 이유로 석방된 뒤에 겪는 시련과 살인, 그리고 감옥행이 주된 내용이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각본과 주연은 나운규가 맡았으나, 메가폰은 이구영이 잡았다. 이 작품에 대해 논쟁의 물꼬를 튼 것은 남궁옥이었다.
 
<아리랑 후편>은 어떤 작품인가? 그것은 좋은 작품인가? 민중생활에 유익한 작품인가? 나는 이것을 단언하기에 적지 않은 곤란을 느낀다.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 사진은 촬영을 시작할 때에 검열을 생각하고 원작 각색대로 제작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나마 제작된 것이 도리어 당국의 검열을 받을 때 탄압을 받아서 무수히 가위질을 당하여 연관이 끊기고 앞뒤가 서로 모순되게 되었다는 까닭이다. (중략) 그런데 그가 어찌하여 <아리랑 후편>을 <아리랑> 전편의 단순한 연장으로 만들었을까? 그의 의도는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보이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 민중의 현실을 과장적으로 표현하려 함에 있다. (중략) 그가 보는 것은 언제든지 불의와 정의와 잔인과 관대의 갈등 투쟁의 암담한 인생이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 비참한 현실의 과장적 묘사와 민중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인가? <아리랑> 전후 편을  통하여 나타나는 주인공 최영진의 발광, 감옥, 절망의 절규는 이것을 말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아리랑 후편>에서 나운규 군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을 묘사하여 이것을 민중 앞에 보이려고 한 일면의 의도에는 반대하지 아니한다. 다만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도적 현실을 양기(揚棄)하고 새로운 생활의 창조에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아니하였음에 반대한다. (중략) <아리랑 후편>의 라스트 신에서 다시 발광한 영진이가 순사에게 붙들러 가면서 이미 자기보다 먼저 감옥으로 간 해신이와 한가지로 춤추며 뛰며 노래하는 착각을 일으키는
두 가지 장면을 연접(連接)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착각 중에 광명한 일면을 짜 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요컨대 내가 보는 한에서는 나운규군은 현실을 봄에 있어 몹시 주관적이다. (이하 생략)”

-남궁옥,「<아리랑 후편>을 보고」, 중외일보, 1930, 2,18~19- 

 

곧 이어 서광제도 비판의 대열에 합류한다.

 

그래 정신병으로 말미암아 16명이나 살해를 하고 감옥에 있다가 무사히 석방되어 나온 후의 영진이의 한 일이 무엇이냐? 자기 자신을 위함도 아니요, 부친과 영희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려함도 아니다. 언제나 나군 독특의 불근신한 맛은 어느 작품을 통하든지 빠질 때가 없다. (중략) <아리랑 후편>을 보러간 팬 대중에서 프롤레타리아 대중 중에서 포켓에서 나온 돈이 얼마나 되는가를 아는가! 그들의 노동의 일야(一夜)의 허무주의자와 숙명론을 주입하여 주는 것이 우리의 영화노동자의 임무인가.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들이 그러한 영화를 요구할 이치는 절대로 없다. 영진이는 의식 있는 노동자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니다. 일생을 부친과 영희를 찾기에 다시 광인이 되었다. 그러면 그러한 주인공을 프롤레타리아는 환영할 것인가? (중략) 나군이여, 영화를 촬영한다면 적어도 노동자 농민의 조그만 생활의 에피소드나마라도 박아라. (이하 생략)

- 서광제,「<아리랑 후편> 영화비평」, 조선일보, 1930, 2,20~22 -

 

    윤기정 역시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아리랑 후편> 때문에 오히려 <아리랑>의 명성을 더럽히고 말았다며 조선영화의 발전을 위해 슬퍼할 일(「조선영화의 제작 경향 -일반제작자에게 고함」, 중외일보, 1930, 5,7~9, 11)이라고 개탄하였다.
   유물사관(唯物史觀)적 관점으로 <아리랑 후편>을 비판한 서광제의 글에 대해 제삼자인 이필우(촬영기사)가 반박(「서광제씨의 <아리랑>평을 읽고」, 조선일보, 1930, 2,25~28) 하고 나서면서 이 영화는 완전히 쟁점화 된다.
이에 서광제는 “아리랑 고개를 어찌 넘었으며 왜 넘겨 보냈는지를 필자더러 아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것이 무슨 아이 소리냐. 제작자의 색안(色眼)을 떠난 일반 팬의 무색 렌즈를 통하여 보아라. 아리랑 고개를 영진이가 지주에게 내어 쫓겨 그 동리에 있을 수 없으니까 막연히 아리랑 고개를 넘어갔다. 그리고 동리 사람들이 그를 넘겨 보낸 것은 자기들은 소작인이라 아무 힘이 없어서 그냥 영진이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것만 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팬 대중에게 가르쳐 주었는가? 이 군아, 나에게 질문을 하지 말고 작자의 두뇌를 엑스광선으로 비추어 보아라 (하략)”(「신영화예술운동 및(及) <아리랑> 평의 비평에 답함」조선일보, 1930, 3,4~6). 이렇게 힐난하였다. 
   이 논쟁은 이필우가 “소위 자칭 영화인이라는 정체도 모를 인물들이 알지도 못할 붓장난을 하기 시작하여 독자 대중을 속이고 부정한 언사를 늘어놓아 조선영화의 진일보에 큰 해를 주고 있다”(「영화계를 논하는 망상 배들에게」중외일보, 1930, 3,23~24)고 재반박하고, 서광제가 “너희들이야말로 무가치한 허영과 부르주아의 광견‘(「1930년 조선영화계의 현단계」중외일보, 1930, 3,25~4,2)이라고 거칠게 나오면서 완전히 인신공격으로 변질된다. 하지만 중간에 안종화의, 원론적인 비평의 역할론과 윤기정의 <아리랑 후편>에 대한 실망감(영화배우, 감독)이 개진되고, 공격자에 대한 나운규의 장문의 반론이 나오면서 이 영화를  둘러싼 논쟁은 4개 여월 만에 끝난다. 흥미로운 것은 비판의 과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구영 감독이 뒤로 빠진 채 각본과 주연을 맡은 나운규에게 포화가 집중되었다는 사실이다.

 

각본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감독의 책임이 어디서부터인지도 구별할 수도 없으면서 영화평을 쓰겠다는 것은 너무도 대담한 일이다. 그러니 무지한 두뇌에서 내 놀 것은 없고 욕밖에 더 하겠느냐. 특히 서군에게 이 말 해둔다. 우리는 군의 평문 전체에서 아무 것도 취하지 못했다. 전부가 제로(Zero)다. 우리들을 보고 군 등은 사갈시(蛇蝎視) 한다고 말하고 쓸 데 없이 군들보다 먼저 일하고 있는 우리들을 적대시하지 말아라. 군 등의 적은 우리가 아니다. 군 등의 제작 사업을 방해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대회사의 자본력도 없고 영리를 위한 자기선전 잡지도 없다. 군 등의 적은 따로 있다. 군 등의 제작한 작품도 대중 앞에 나올 것이오, 우리들 것도 나오는 이상 작품으로 대중에게 호소하여라. 그것이 군 등이 취할 최선의 방법이다. 자금도 없어 남의 돈으로 이 사업을 해보겠다는 것은 군 등이나 우리나 똑 같은 사정이다. 

 -나운규「현실을 망각한 영화평자들에게 답함」, 중외일보, 1930, 5,13~16, 18, 19-

 

   이 논쟁의 특징은 작품을 둘러싼 공방이 영화평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고, 인신공격으로 비화했다는 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리랑 후편>을 비판하고 나선 사람들이 영화를 계급투쟁의 수단으로 여기는 카프 진영의 평론가들이고, 이들에 맞서 대항한 측은 공교롭게도 우파에 속하는 현역 영화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이에 앞서 이경손, 나운규, 심훈을 가리켜 ‘고린내 나는 신흥예술가’(조선중앙일보, 1928, 7)로 지칭한 만년설(萬年雪: 한설야의 필명)의 공격에 대해 심훈이 반격하고 나선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막시즘의 견지로써만 영화를 보고 이른바 유물사관적 변증법을 가지고 키네마를 척도하려 함은 예술의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 고루한 편견에 지나지 않다.”(「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조선일보, 1928, 7,25)고 대응하였다.
   이런 일들은 친 좌우 단체로 갈려 반목하면서도 특정 이슈나 작품을 둘러싼 지상 논쟁이 없는 오늘날과는 상반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평단의 형성과 영평의 탄생

   해방 후의 영화평단은 일제강점기에 활약했던 서광제, 안석영, 김정혁, 오영진 등이 주도하였다. 서광제의「저널리즘과 영화」(신문평론, 1947년 7월호) 김정혁의「영화계의 과제」(서울신문, 1946,12,17), 안석영의「해방 4년 문화사 -영화」(혁명, 1946년 1월호), 오영진의「영화의 당면과제」(평화일보, 1948) 등이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런 상황 아래서『자유신문』,『중외일보』,『경향신문』,『대동신문』,『조선중앙일보』등 주로 해방정국에서 난립하던 일간지들이 46년부터 47년 사이에 ‘영화평’ 난을 신설하고 <자유만세>(최인규 감독), <민족의 새벽>(이규환 감독), <새로운 맹서>(신경균 감독)와 같은 ‘국산영화’ 평을 게재했다. S생 등 약칭으로 표기한 기자들과 이태우 등 외부 인사들이 그 필진이었다.
   서울과 부산 등지의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영화 관련 글을 쓰던 인사들이 영화평론가협회라는 조직체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6ㆍ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였다. 모임은 서울에서 피란 온 오종식(회장)을 비롯한 오영진, 김소동, 허백년, 이진섭, 유두연, 황영빈 등과『국제신보』,『부산일보』,『민주신문』 등 현지의 지면에 영화평을 쓰던 이봉래, 박인환, 부산의 이청기, 장갑상 등 문화계 인사 11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환도 후 한 두 차례의 행사를 치룬 다음 해체된다.
   이런 가운데 유두연(「영화기법의 신경향 -네오리얼리즘에 관하여」조선일보, 1954,5,10)을 비롯한 허백년(「한국영화의 가능성」조선일보, 1955,12,18), 이청기(「<피아골>에 대한 소견 -주제는 고답적인 반공효과 노린 것」한국일보, 1955,9,1~2), 유한철(「57년 영화계 총평 - 영화제 해외진출과 합작영화의 등장」조선일보, 1957, 12,26) 등이 평필을 들고, 그들보다 젊은 20대 중반의 이영일(「영화에서 느끼는 문화의식」조선일보, 1958,4,28)과 20대 초반의 김종원(「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자유공론, 1959년 11월호) 등이 가세하여 충무로 영화계에 ‘영화평론의 존재’를 알린다.
   1950년대는 저널리즘비평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57년부터 일간지의 문화부 기자들이 고정 난을 두고 영화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화계와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는 영화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놓고 저널리즘비평 형성에도 이바지하는 계기가 된다. 수(樹), 웅(雄), 수(秀), 명(明), 호(湖), 진(振) 식(植), 헌(軒), 영(英) 등 이니셜을 가진 이들은 뒤에 연극계로 진출한 임영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이 된 임영(한국일보), 최일수(서울신문), 이명원(한국일보), 호현찬(동아일보), 김진찬(경향신문), 신우식(서울신문), 황운헌(대한일보), 정영일(조선일보) 등이다. 이들에 이어 60년대부터 안병섭(동아일보), 손기상(한국일보) 등이 그 대열에 합류한다.
   이 무렵 몇 안 되는 영화평론가들은 영화인들이 모이는 서울 명동의 나일구다방이나 양지다방에 드나들며 동아, 조선, 한국 등 일부 유력지와『연합신문』『평화신문』등 일간지,『영화세계』『국제영화』『시나리오문예』『영화예술』『시네마 팬』과 같은 영화 전문지에 연간 총평이며 감독론, 영화평, 시론 따위의 시사적인 글들을 발표하였다. 당시 영화평론은 분석과는 거리가 먼 인상비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그들의 활동마저도 1960년대에 이르면서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4,19 이후 사회에 일기 시작한 세대교체 바람에 편승하여 창립된 것이 한국영화평론가협회이다. 당시 평화신문 문화부장이던 이영일과 격월간『시나리오문예』에 영화비교론을 연재하던 동국대학교 4학년생 김종원이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비평 풍토의 조성과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고 모임을 갖기로 합의한다. 우선 조직의 명칭을 한국영화비평가협회와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두 안을 놓고 의논한 끝에 ‘평론’ 쪽이 보편적이라는 이유로 선택된다. 하지만 마땅한 회원을 끌어들이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평론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영화평론에 관심을 갖고 한 두 차례 글을 쓴 사람이 있긴 했으나  대부분 전공 분야가 따로 있었다.
   이때 문화예술인들은 영화인들의 아지트가 된 명동의 나일구 외에 6.25 때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되면서 명동공원으로 불리게 된 빈터(뒤에 제일백화점이 들어섬) 앞 엠프레스다방과, 그 아래 국립극장 방향의 금문다방(현 금강제화 맞은편, 당시 송옥양장점 2층), 그리고 유네스코 뒷길에 있는 갈채다방에 주로 모여 들었다. 나일구다방에는 전창근, 유두연, 허백년, 노경희와 같은 영화감독, 영화평론가, 영화배우들이들이, 엠프레스 다방에는 시나리오작가 최금동, 선우휘, 이어령과 같은 문인들과 박서보, 이일 등 화가, 미술평론가가, 금문다방에는 차범석, 김경옥, 김금지 등의 연극인들과 조동화 무용평론가, 신동문 시인 등이, 갈채다방에는 당대의 이름난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박재삼 등 문인들이 즐겨 나왔다. 이런 시절에 이영일 평론가와 필자는 주로 엠프레스 다방과 금문다방을 사랑방처럼 애용하였다. 자연히 이곳이 영화평론가협회의 산실이 되었다. 다음은 그 시절을 회고한 필자의「30년 영평의 발자취- 영화평단의 형성과 영화평론가협회의 결성 전후」(영화평론, 제7호, 1995년)를 인용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사랑의 함정』(1960, 강찬우 감독)의 시나리오를 쓴 해외 유학파 김정옥이 ‘영평’의 창립에 참여하게 된 것은 금문다방 위층에 있던 한국기원(이사장: 조남철)에 드나들면서 바둑을 좋아한 이영일 등과 친교를 맺은 것이 계기가 된다. 대한일보 연예담당 기자였던 시인 황운헌의 가담은 언론계에 종사하면서도 시를 쓰는 문인이라는 정서적 공감대가 크게 작용하였고, 한일약품 선전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빼앗긴 일요일」을 응모하여 당선한 정우영(본명: 정벽봉)의 경우는 평론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모임에 동참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1960년대에 개설된 한양대학교 영화과에서「한국영화사」를 강의한 노만을 제외하고는 이영일(시와 비평 주재), 김정옥(영도 동인ㆍ사상계 추천), 황운헌(문학예술ㆍ사상계 추천), 김종원(문학예술ㆍ사상계 추천) 등 네 명과 정우영(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이 모두 시를 쓴 공통점을 지녔다.

 

   이렇게 뜻을 모은 여섯 사람은 1960년 7월6일 서울 명동에 있는 대홍운(大鴻運)이라는 음식점에서 미리 정한 명칭대로 영화평론가협회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대표간사 이영일, 총무간사 김종원, 기획간사 김정옥으로 짜인 영평은 나래를 미처 펼쳐보기도 전에 이듬해 5,16 군사정변을 만나 다른 문화단체와 함께 해산되고 만다. 현재의 영화평론가협회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65년 11월10일 오후 일곱 시, 을지로 3가 안동장에서 네 사람이 보강된 10명의 발기로 이루어진 것이다.
   올바른 비평정신의 확립과 비평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는 60년 출발 때의 취지와 명칭을 그대로 계승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영일, 김정옥, 노만, 정우영, 황운헌, 김종원 외에 새로 최일수, 이진형, 변인식, 최성규(부산일보 서울지사 기자)와 지방의 허창(부산일보 문화부장) 등이 보강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대한일보(‘연예사롱’ 1965,11,11)는「영평 창총 회비 1천4백원」이라는 제목 아래 영화평론가협회의 모임을 흥미롭게 보도했다.

 

   10일 밤 1천4백원의 회비를 갖고 을지로 3가에 있는 안동장에서 창립 총회를 가졌는데, 총회가 끝나고 카운터에서 비용을 물었더니, 그대로 1천4백원정 회비의 갹출과 지출이 이처럼 맞아 떨어질 수가 없다고 회원들은 모두 싱글벙글…. 앞으로‘영평’에서는 세미나, 감상회, 영화상 등 사업을 벌이겠다고.  

   이날 창립총회에는 김정옥, 이진형과 부산의 허창(이상 위임)을 제외한 7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업과 회원 자격을 규정한 정관을 통과시키고 무기명 투표로 임원을 선출하게 된다. 그 결과 회장 이영일 5표(김정옥 2표), 총무간사 김종원 4표(노만 2표, 황운헌 1표), 기획간사 노만 5표(최일수 2표)로 나타났다. 기획간사의 경우는 노만, 최일수 각기 2표 동점으로 과반수에 미달함에 따라 2차 투표까지 가야 했다. 7명 남짓의 회원이 모여 치룬 미니 경선의 총회였다.
   당시 영화평단에 자극을 준 것은 영향력이 큰 월간 종합지『사상계』(1962년 5월호)가 전례 없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 꾸민 영화 특집이었다. 여기에 실린 오영진의「협궤를 달리는 영화산업」, 허백년의「메스 아트로서의 필름 아트」, 노만의「저항 속에 싹터온 한국영화」등은 잡지의 후광에 힘입어 더욱 주목을 끌었다.
   영평은 1965년 재출범 후 1979년까지 15년 동안 이영일-김종원 집행 체제로 운영되었다. 노만이 기획간사를 맡았지만 집안에서 운영(을지로 3가)하는 전자제품 가게 일로 손을 놓다시피 해 두 사람에게 위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이영일이 발행하는『영화예술』사무실이 노만의 가게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집행부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귀국한 하길종이 영평에 가입한지 1년 만인 1972년 기획간사 직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집행부가 먼저 추진한 것은 회원의 화장이었다.
   그동안 몇 차례 논의가 있었으나 유보됐던 일간지의 영화담당 기자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이자는 김종원 총무간사의 제의에 따라 이명원(한국일보), 정영일(조선일보), 김진찬(경향신문)이 영입되고 이영일 회장과 하길종 기획간사가 각기 추천한 한재수(한일연기학원 원장), 홍파(시나리오작가), 안세철(『영화예술』평론 데뷔)과 윤흥렬(치과의사) 등이 새로 합류하게 된다. 잇따라 부산 출신인 여수중(시나리오작가), 임창수(MBC 제작부장)가 입회(1974)하고, 이듬해 안병섭(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정용탁(한양대 교수) 등이 들어오면서 영평이 창립된 지 10년 만에 회원이 비로소 15명 선을 돌파하게 된다.
   그러나 하길종이 영화 <화분>(1972)과 <수절>(1973)의 촬영에 들어가면서 영평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한재수가 기획간사(1975) 직을 맡고, 78년 안병섭이 그 자리를 잇게 된다. 그 사이 회장과 총무간사는 계속 위임되었다. 이런 사이에「한국영화 이대로 좋은가」(1972)를 비롯한「한국영화의 방향을 찾는다」(1974),「세계를 겨냥한 한국영화」,「우수영화란 무엇인가」(1975),「세계 속의 한국영화」(1976)「한국영화는 개혁돼야 한다」(1978),「한국영화 60주년, 한국영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TV시대의 한국영화」(1979)등 심포지엄 12회. 74년부터 79년까지 <무녀도>(최하원 감독), <위대한 환상>(장 르누아르 감독, 1975년 상영) 외에 <인톨러런스>(1919, D.W. 그리피스 감독), <군중>(1929, 킹 비더 감독), <날개>(1929,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등 여섯 편의「미국 무성영화시대의 고전작품 감상회」(미국문화원 영사실, 1978년 개최) 그리고 <남모르는 한 오라기의 실>(1973), <모래성>(1974, 노무라 오시다로 감독) 등 일본영화 감상회(일본문화원 영사실, 1979년) 와 <무녀도>(최하원 감독, 1972년), <막차로 온 손님>(유현목 감독, 1979년) 등 초청영화 감상회 15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정일몽(1978년), 최백산(1979년)에 이어 조관희(1980년), 호현찬•임영ㆍ김진환•신우식ㆍ손기상ㆍ이봉운(1982년, 6명) 등 언론계 인사들이 영평에 대거 참여하게 된다. 

 


지원금 50만원으로 출발한 영평상

   오랫동안 회원과 임원에 큰 변동이 없던 영평은 영화감독 출신 정일몽이 제2대 회장에 선출되는 1980년을 전환점으로 1년 임기제가 정착되고 회원도 계속 증가하게 된다. 영화평론가협회상(이하 영평상)이 제정돼 첫 번째 시상식을 가진 것도 이때였다. ‘영평상’은 이미 79년도에 협회 사업의 일환으로 결정돼 영화진흥공사에 지원금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자체 부담금 20만원, 트로피貸 44만원(개당 4만원, 11개)을 포함한 50만원이 그 명세이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표현영역을 확대하고 그 독창적인 예술성을 추구하며 민족문화의 일익으로서 영화예술의 중흥과 정립을 추구하는 데 목적”을 둔 영평상(映評賞) 시상식은 이 해 12월5일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사실에서 열렸다.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으로 뽑힌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심사위원 특별상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정진우 감독), 남자연기상의 최불암(최후의 증인), 여자연기상의 장미희(느미), 촬영상의 정일성(사람의 아들), 기술상의 고해진(사람의 아들ㆍ조명), 신인상의 정한용(외인들ㆍ연기), 최우수 외국영화상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등 모두 11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방식은 현재까지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때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에는 예산 한도 내에서 작은 액수나마 상금을 주었다. 그러나 지원을 받는 처지에 어설픈 부상(副賞)은 오히려 어색하다는 회원들의 중론에 따라 이듬해 금메달로 바뀐 뒤 없어지게 된다. 주연과 조연을 분리하지 않고 남녀 연기상을 하나로 묶게 된 것은 예산의 부담 외에 배역의 비중에 상관없이 연기력을 평가하자는 의도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상에 버금하는 심사위원특별상과 외국영화작품상을 두기로 한 것은 차별화를 꾀한 전략이었다.   
  전체 회원 중 사정이 있어 빠진 두 사람을 제외한 여수중(총무간사), 최일수(기획간사), 안병섭, 정용탁 등 10명이 참석한 심사 결과(채점표)는 프로그램에 자세히 공개됐다. 나중에 이 결과를 알게 된 한 후보자가 협회에 불만을 토로할 만큼 채점 공개는 적잖은 관심을 끌었다. 또한 작품상을 놓친 한 수상자는 시상식에 불참하는가 하면, 석연치 않는 이유로 대리 수상자를 보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영평상의 초기에는 인식이 덜 된 탓인지 흔쾌치 못한 일들이 더러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연인 최불암(최후의 증인)이 주연배우들을 물리치고 남자연기상을 거머쥠으로써 화제를 모았다. 이 기록은 30년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다.
   길게 수직을 이룬 15개의 주물이 세 줄로 배치돼 마치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금도금의 영평상 트로피는 종합예술로서의 영화 특성과 한국영화의 발전을 상징한 것으로 친구인 장윤우 교수(당시 성신여자대학 공예과장, 시인)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제작한 것이다. 거기에 부착된 영평의 마크는 필자가 직접 도안했다.
   당시 필자는 15년 만에 총무간사 직을 물러났지만 행사 경험이 없는 2기 총무간사(여수중)의 몫까지 맡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트로피와 시상식장의 현수막 준비며 프로그램 제작, 현관과 식장 입구에 부착할 포스터까지 그리느라 밤을 새다시피 하였다. 그런가 하면, 시상식 후 가질 다과회(장소 - 영화진흥공사 현관)를 준비하느라 아내마저 동원해야 했다. 가난한 영평의 처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영평상 시상식은 남산 영화진흥공사 시대(1980~86)를 마감한 뒤 여러 군데에서  치렀다. 안병섭 9대 회장(1988) 이후, 11대 변인식 회장(1991~1992)까지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하다가 12대 이봉운 회장과 13대 손기상 회장에 이르면서 하얏트호텔(1993~94), 플라자호텔(1995~96)로 진출했다. 정중헌 14대 회장 때 연강홀(1997~98, 서울 종로5가)에서 두 차례 거행한 후 15대 김두호, 16대 정용탁 회장에 이르러 프레스센터(1999~2002)로 다시 옮겼으나 22회와 23회 시상식은 대학로 아트센터(17대 주진숙 회장, 2003~04)와 국회 의원회관(18대 양윤모 회장, 2005)에서 가졌다. 그 뒤 19대 장석용 회장(2007~2008) 임기에 프레스센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상식장은 대개 회장의 취향이나 역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역대 영평상 수상자 가운데 최다 수상 기록을 세운 사람은 촬영의 정일성과 연기의 안성기이다. 이들은 똑 같이 여섯 차례나 상을 받았다. 정일성이 <사람의 아들>(1980, 이하 수상연도), <만다라>(1981), <개벽>(1992), <서편제>(1993), <춘향뎐>(2000), <취화선>(2002) 등으로 평가를 받은 반면, 안성기는 <오염된 자식들>(1982), <안개마을>(1983), <투캅스>(1994), <영원한 제국>(1995), <축제>(1996), <라디오 스타>(2006)로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최우수 작품상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꼬방동네 사람들>(1983),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의 배창호와 <티켓>(1987), <서편제>(1993), <축제>(1996)의 임권택, <초록물고기>(1997), <박하사탕>(2000), <오아시스>(2002)의 이창동으로, 각각 3회이다. 특히 배창호는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로 신인상을 건너 뛰어 감독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3년 내리 작품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창동은 첫 작품<초록물고기>로 작품상과 각본상, 그리고 신인 감독상을 동시에 받아 3관왕의 영예를 누렸다. 
   영평상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국민배우 안성기에 대한 고마움이다. 그는 1993년 제13회 이후 15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매년 거의 빠짐없이 시상식의 사회를 맡아 자리를 빛내주고 있다. 소중한 시간을 내서 이 일을 맡아주는, 영평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과 헌신적인 노고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영화평론』의 창간과 여성회원의 증가

    영평상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영평은 또다시 이승구(1986년)ㆍ 민병록? 최영철? 박평식, 김홍숙(1988년, 4명)과 김량삼ㆍ 김두호ㆍ 한옥희ㆍ 강한섭ㆍ 조희문ㆍ 유지나ㆍ 정성일, 박제균(1989년, 8명) 등을 새 가족으로 맞아들인다. 여기에서 특기해야 할 것은 김홍숙, 유지나, 한옥희 등의 입회로 여성 영화비평가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회장의 임기가 2년으로 연장된 1989년 영화진흥공사(사장 김동호)의 지원 아래 비로소 영평의 숙원이었던 회지『영화평론』이 창간된다. 10대 조관희 회장 때였다. 조관희 회장은 간행사(권두언)에서 “튼튼한 전통과 우의는 큰 자랑이지만 영평이 과연 얼마만큼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느냐에 관해서는 자성의 말도 있다”고 전제하고, ‘영화계의 오피니언 리더로서 영화정책 수립이나 영화발전 방향 모색에 직접간접으로 관여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추진력을 발동시키는 일도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A5판(국판) 362쪽 분량의 창간호에는 김종원의「한국영화비평사 시론(試論)」, 임영의「민주화시대의 한국영화」, 허창의「엔터테이너로서의 영화예술」, 김홍숙의「80년대 한국영화와 여성」, 호현찬의「영화산업의 미래 전개의 구도」, 이명원의「섹스영화와 정치」, 안병섭의「다양성과 실증성의 도전」, 이영일의「유현목론」, 김정옥의「영화와 영상, 그리고 인간」, 변인식의「임권택ㆍ이두용 영화의 주제분석 시론」, 민병록의「<프라하의 봄>의 상징적 표현기법의 분석」, 박평식의「안성기론」(이상 게재 순) 등이 수록되었다. 5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23명의 회원 중 5명을 제외한 18명이 필진으로 참여한 결과이다.
   영평은 1991년(회장 변인식) 제14회 심포지엄(「직배 이후 한국영화의 위상」, 발제자 안병섭, 강한섭, 김홍숙) 때부터 지방(온양관광호텔, 10월 31일)으로 나가는 여유마저 갖게 된다. 이에 앞서 정중헌ㆍ 김수남ㆍ 장석용ㆍ 서인숙ㆍ 신강호(1990년, 6명) 등이 신입 회원으로 들어오고, 주진숙ㆍ 전양준ㆍ 이효인ㆍ 정재형ㆍ 정성일, 양윤모ㆍ 조혜정ㆍ 김창유ㆍ 김경욱ㆍ 김은주(1992년, 10명) 등 신진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46명의 회원을 확보하게 된다.
   또한 1993년(회장 이봉운)에는 지난해「직배 이후 한국영화의 위상」(회장 변인식)에 이어 제15회 심포지엄「오늘의 우리영화 활로」(대전 유성 리베라호텔)가 모색되고, 94년(회장 손기상)엔 조희문, 유지나, 허창의 발제로「서울국제영화제 창설에 관한 공개 토론회」가 세종문화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다.
   이후 97년 정중헌 회장에 이르러「영화진흥법에 따른 시행령 개정방향」세미나와 함께 신인 평론을 공모하여 문학산(「대의 전복이 주는 파안대소, 신학적 의미 획득」), 민병선(「현실적 문제와 영화적 배설의 비교 -<나쁜 영화>」) 두 당선자를 배출하고 예고한 대로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 이 제도는 한동안 실시하지 않다가 2009년 제20대 신강호 회장이 12년 만에 부활함으로써 안승범(최우수작「가해와 피해의 미로에 갇힌 엄마들 - <마더>와 <밀양>에 대한 윤리적 기억」), 박우상(우수작「주술에 취한 탈 역사의 풍경 - <워낭소리>론」)을 수상자로 뽑고 역시 영평 가족으로 맞이한다. 이런 가운데 변재란(1996년) 등에 이어 98년부터 전찬일ㆍ정수완ㆍ김시무ㆍ고인배ㆍ김정룡 등 신예그룹이 참여하면서 영평에 새 바람이 일기 시작한다.
   김두호 회장 임기에 한차례(「한국영화의 분석과 전망」, 2000) 열린 후 효용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유보됐던 세미나는 장석용 회장이 전주국제영화제의 후원 아래「신정부 한국영화의 비전」(2008, 회장 장석용) 을 개최하고, 신강호 회장이 충무로국제영화제의 요청을 받아「최초의 무비 스타 배우 신성일」「한국고전 도시액션영화」(2009)라는 2개 포럼을 개최함에 따라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사이 영평은 이헌익, 황혜진ㆍ김경(2000년, 3명), 이용관ㆍ서정남(2001년 2명), 안정숙ㆍ김준덕(2002년ㆍ2명), 배장수ㆍ심영섭ㆍ이대현ㆍ주유신ㆍ김이경(2003년, 5명) 등을 새 회원으로 맞이하고, 2004년 주진숙 회장 임기 중에 30대 중반부터 40대에 이르는 의욕적인 신진 19명을 대폭 입회시킨다. 김영진ㆍ 남완섭ㆍ 곽영진ㆍ 황영미ㆍ 김선엽ㆍ 강성률ㆍ 이상용ㆍ 육정학ㆍ 문재철ㆍ 이지훈ㆍ 문일평ㆍ 이명인ㆍ 김의찬ㆍ 최광희ㆍ 정재우ㆍ 김윤아ㆍ 모은영ㆍ 류상욱ㆍ오영숙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로써 회원이 56명에 이른다. 이듬해에는 많은 회원이 들어온 전년도의 영향을 받아 전평국 1명의 추가로 그쳤으나, 다시 문호를 개방하여 강유정ㆍ 강익모ㆍ 연동원ㆍ 박유희(2007년, 4명) 서성희(2008년), 오동진, 염찬희ㆍ 정민아ㆍ 변성찬ㆍ 양성희ㆍ 박태식ㆍ 정지원ㆍ 이현경ㆍ 이승재 (2009년, 9명) 등을 영평의 일원으로 맞아들인다. 이로써 자칫 침체해지기 쉬운 모임에 세대교체의 효과와 함께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동안 초대 회장인 이영일을 비롯한 하길종, 정영일, 여수중, 최일수, 김진찬, 안병섭, 허창, 이명원, 황운헌 (이상 작고 순) 등 10여명이 작고하고 한재수, 최백산, 정일몽 등 원로와 김경 회원이 미국에, 이명인 회원이 베트남에 각기 자리 잡았다.
현재 영평 회원은 호현찬, 임영 등 80대 중반의 원로부터 30대 후반의 신진까지 고루 섞여 있다. 그동안 회원이 80명이 넘었으나 일부가 정비돼 지금은 영평 가족이 75명(2010년 9월말 현재)이 된다. 이중 여성 회원만 주진숙, 한옥희, 유지나, 조혜정, 심영섭 등 20여명을 헤아린다. 1965년 가을, 비평의 불모지에서 열 명 남짓으로 출범한 영평의 작은 씨앗이 크게 영글어 반세기 만에 여덟 배 가까운 큰 수확을  거둔 셈이다.
   이중에는 이름만 걸고 있다가 사라졌거나,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으나 적극성을 띤 회원들이 있는가 하면, 유명세를 타면서 멀어진 경우, 다른 유사 단체를 만들어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다. 그 중에도 특히 이채로웠던 존재는 1970년대 초 하길종의 추천으로 들어온 치과의사 윤흥렬(尹興烈)이었다. 그는 한두 번 모임에 참석했으나 얼마못가 본업으로 돌아간 후 영화계와 인연을 끊었다. 몇 년 전에 세계치과의사협회 회장을 지낸 것으로 기억된다. 유두연 감독에 이어 2대째 영화평론의 길을 걷고 있는 유지나(동국대 교수), 아들을 영화감독(임상수)과 평론가(허문영)로 배출한 임영과 허창 회원, 정성일-김경욱에 이은 남완섭-심영섭 커플도 빼어 놓을 수 없다.
   회원들의 출신분야, 종사職도 교수, 교사, 강사 등 교육계 인사와 일간신문, 주간지 등 언론계 인사와 저널리스트, 기타 전업평론가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이들 가운데는 호현찬(영화진흥공사 사장), 신우식(영상자료원 원장), 이효인(영상자료원 원장), 안정숙•강한섭•조희문(이상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민병록(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의 예처럼 정부 산하의 영화관련 기관장직을 맡거나 역임한 인사,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중책을 맡아 활약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영평 회원인 국내의 영화평론가들은 지면 부족과 정상적인 대우(원고료)를 기대할 수 없는 악조건 속에서도 꾸준히 비평의 밭을 일구어 왔다. 오늘의 한국 영화비평이 이만큼이나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부 비평가는 그 결과물을 영화평론집이나 이와 유사한 형태로 묶어 출간하였다. 다음은 지금까지 나온 그 결실(발행 순) 이다.

 

               영화평론 저서 출간 현황

변인식 『영화미의 반란』(1972, 태극출판사),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1996, 공간미디어)
하길종 『영상, 인간 구원의 메시지』(1981, 예조각) 영화론집
김종원 『영상시대의 우화』(1985, 제삼기획)
          『한국영화사와 비평의 접점』Ⅰ,Ⅱ 2권 (2007, 현대미학사)
안병섭 『영화적 현실, 상상적 현실 』(1989, 정음사)
이명원 『영화는 지금 혁명중』(1989, 영웅 ) 정치, 영화칼럼
이제하 『이제하의 시네마테크』(1992, 우리문학사)
강한섭 『강한섭의 영화 이야기』(1993, 범조사) 저널리즘영화비평과의 만남
김사겸 『영상적 사유, 영화적 인생』(1993,예견사)     
이세룡 『이세룡의 영화 산책』(1993, 일신미디어)
이효인 『우리 영화의 몽상과 오만』(1994, 민글)
조관희 『영화 속 사랑 읽기』(1995, 제삼기획)
김수남 『한국영화의 쟁점과 사유』(1997, 문예마당)
이용관 『한국영화를 위한 변명』(1998, 시각과 언어)
정중헌 『우리 영화 살리기』(1999, 늘봄)
장석용 『코리언 뉴웨이브의 증후를 찾아서』(2000, 현대미학사)
          『가슴으로 보는 영화 이야기』(2008, 종문문화사)
김시무 『영화예술의 옹호』(2001, 현대미학사)
심영섭 『영화, 내 영혼의 순례』(2001, 세상의 창)
김영욱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영화의 나르시시즘』(2002, 책세상)
조혜정 『그리고 영화는 계속된다』(2003, 행복한 집)
박유희 『서사의 숲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다』(2008, 다빈치)
전찬일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2008, 작가)
이상용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2008, 홍시)
강성률 『한국영화, 중독과 해독』(2009, 리토피아)
허문영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2010, 강)
정성일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바다출판사)
          『필사의 탐독』 

 

   이상의 목록에서 보듯이 지금까지 나온 영화평론집(또는 에세이집)은 확인된 것만 25인의 30권 가량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영화평론집은 1972년에 출간된 변인식의『영화미의 반란』이다. 뒤이어 하길종의『영상, 인간 구원의 메시지』(1981)와 김종원의『영상시대의 우화』(1985) 순으로 나왔다. 권수로는 김종원 3권, 변인식, 장석용, 정성일 각기 두 권이다.

 


나가는 말

   영평 회원이 20명 내외로 단출했을 때는 야유회를 가진 적이 많았다. 감독이나 신진배우 등 특별 손님까지 초대하여 멀리는 경기도 양평, 가까이는 송추나 수유리, 자하문 밖으로 나갔다. 어떤 때는 영화사의 야외 세트장에 초대받기도 하고, 노래방기기까지 동원하여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첫 야유회는 1967년 여름 인천 앞 바다 영종도에서 가졌다. 10명의 회원 중 이영일, 최성규, 김종원 등 4, 5명이 동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 탤런트를 잘 아는 어느 회원의 주선으로 그의 아버지가 있는 절의 숲을 찾아 갔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회원이 늘고 연령층이 30~40년 차이로 넓어지다 보니  이런 자리를 갖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일부 거동이 불편한 70대 이상의 회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공식 모임에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영평처럼 회원들 간의 소통과 화합이 잘 이루어지는 단체도 드물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협회 내부와 회원들 간에 작은 마찰이나 불미한 일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예민한 사회 격변기에도 어느 한쪽에 휩쓸리지 않고 오랫동안  모임의 순수성을 고수해 왔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영화비평이 위기에 빠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대체 어떤 위기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저널리즘비평과 이론비평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반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게 되고 신문, 잡지 등 ‘종이 지면’이 외부 평론가들에게 할애하던 리뷰를 거의 중단하면서 저널리즘비평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학계 인사들이 대거 평단에 참여하면서 분석비평조차 학술 논문처럼 각주가 붙는 연구지로 변질되고 있다. 그러니까 일간지에 글을 쓰는 평론가(reviewer)나, 지면의 여유를 갖고 월간지 등 정기 간행물에 분석적인 글을 써야 할 비평가(critic)의 행로에 모두 빨간 불이 켜진 셈이 된다. 
   외부 청탁에 의한 일간지의 영화평은 1980년대 초반 사고(社告)로까지 공시할 정도로 비중을 두고 문학, 음악, 연극평과 함께 지면을 배정했던 한국일보의 ‘문화비평’ 이후 1980년대 중후반을 피크로 2000년대 중반까지 명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한두 신문만 간헐적으로 지면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영화의 저널리즘비평은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그나마『씨네 21』과 같은 주간지가 그 일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나, 아직 미흡하다. 
   일선에서 활동한 평론가가 10명 안팎이던 1980년대에도 영화평을 고정 난으로 둔 일간신문이 많았다.『동아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를 비롯하여 조선, 서울의 스포츠레저신문까지도 영화담당 기자가 맡는 영화 소개와 별도로 외부 평론가에게 영화평을 쓸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데 평론가가 80여명을 헤아리는 오늘날에는 모든 여건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신문은 그렇다 치고 예전의『영화예술』이나『격월간 영화』처럼 영화비평을 게재하는 지면도 찾아볼 수 없다. 외부의 사정이 이렇다면 내부의 여건이라도 개선돼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앞으로『영화평론』지 만이라도 궤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 각주가 나오는 논문 같은 비평이 아니라, 부득이 인용을 하더라도 독창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비평지 본연의 기능을 살려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글을 쓰자. 7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영평이 400쪽에도 못 미치는 연간『영화평론』의 지면조차 감당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돌이켜 보면 영화비평의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50년 전에도 이와 같은 위기론이 나왔다. 당시 필자가 쓴「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자유공론, 1959년 11월호)라는 제목이 가리키듯이, 시대에 따라 위기의 상황과 성격이 달랐을 뿐, 영화비평의 위기는 적잖이 있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야 할 것은 영평상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영평상을 제정할 당시부터 논란이 됐었지만, 바로 잡지 못했다. 대종상이나, 청룡상에 비해 두드러진 특징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어느 상이나 예술성을 중시한다는 다소 애매한 기준 아래 뽑다보니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대종상이나 청룡상 등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영평 회원들이 영평상이라고 긴장하거나, 다른 기준에서 뽑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아니 아예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규정과 인식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영평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때가 되었다. 진취적인 내용과 새로운 형식미를 추구하는, 창의력과 실험성이 강한 작품에는 가산점을 주는 방식으로 차별화하자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영평상 제정에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아쉽게 생각한다. 공론화를 제안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는 영화평론가협회의 역사에 대해 확고히 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영평은 1965년을 창립 기준으로 삼아 1995년에 이미 30주년 행사를 가진바 있다. 이는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의해 다른 문화단체와 마찬가지로 해체된 1960년 영평의 존재를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동안 정부의 어용단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문총(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 예총으로 거듭나고 문학가협회가 문인협회(1961년 12월)로 바뀐 것과는 달리 오늘날의 영평은 그때의 명칭, 창립정신과 회원을 그대로 계승한 단체이다. 따라서 예총이나 문인협회, 영화인협회가 그 전신을 모태로 삼으면서도 이름이 바뀐 출발 지점으로 기원을 삼아온 그런 기준 아래 영평의 연륜을 잴 수는 없다. 1907년 7월 17일 개설된 단성사는 그 뒤 32년 만에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 해방 전까지 대륙극장(1939~1945)으로 간판이 바뀌는 곡절을 겪었지만 예전의 창립일을 고수해 왔다. 이에 비하면 영평의 본류는 분명하다. 이렇게 되면 영평의 역사는 올해 45년이 아니라, 50년이 된다. 일찍이 영평의 창립에 참여했던 발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점을 환기시키지 못한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 이제부터라도 대승적인 접근으로 영평의 뿌리를 확인하고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집필한 저작권자에게 있으며 복제 및 무단전재,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0

추천하기

0

반대하기

첨부파일 다운로드

등록자김종원

등록일2010-11-30

조회수106,802

  • 페이스북 공유
  • 트위터 공유
  • 밴드 공유
  • Google+ 공유
  • 인쇄하기
 
스팸방지코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