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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부활은 그 물질적·산업적 ‘조건’의 탐색과 함께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비평 세미나 : 제3-제4 주제 토론문

 

비평의 부활은 그 물질적•산업적 ‘조건’의 탐색과 함께

 

오  동 진 (영화평론가, 영화전문기자)

 


   심영섭, 정민아 두 평론가의 글을 읽는 것은 참혹하면서도 자기반성적이고 고찰적이며 한편으로는 모멸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느낌을 얻는 일이다. 역설적으로 오랜만에 글다운 글, 영화평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글을 읽은 셈이 되었다. 자괴적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일종의 비장미가 향후 어느 시대가 됐든 영화평론은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을 가능케까지 한다.

 

   영화평론이 위기에 처했다는 생각은 유독 요즘 들어 제기된 문제만은 아니다. 그와 관련된 글들은 심, 정 두 평론가가 언급하고 거론한 대로 지난 2~3년간 수많은 비평가들과 또 그들이 연관된 지면 매체를 통해 넘쳐났던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2008년 4월 14일자 프레시안에서도 관련기사를 찾을 수 있다. 프레시안은 우연찮게도 그 즈음에 미국의 이스트코스트와 웨스트코스트를 대표하는 두 신문, 곧 뉴욕타임즈와 LA타임즈가 같은 주제의, 장문의 기사를 실었음을 소개했다. 뉴욕타임즈는 <멸종위기의 種 : 신문잡지의 영화평론가들>이란 제목으로, LA타임즈는 <평론가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특이한 것은 두 신문 모두 ‘위기’라는 단어보다는 ‘멸종’ ‘종말’이라는 다소 센셰이셔널한 단어를 구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간 평론가들이 구사해 왔던 비평의 질과 수준, 이들이 대중과 접점을 이루는 매체 환경, 그에 대한 대응 등을 분석한 것이라기보다는 영화비평이라는, 미국내 독자적 시장이 붕괴했거나 궤멸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 기사가 가장 흥분한 것은 워싱턴포스트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회사인 뉴스위크의 오랜 평론가 데이빗 앤슨을 방출시켰다는 점이었다.

 

   심영섭, 정민아 두 평론가의 글은 두 신문의 호들갑스러운 글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히 심영섭 평론가가 언급한 이른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의 시대와 ‘대중비평’의 시대에 대한 비교와 고찰은 그동안 전문비평가로 노력하며 살아 온 비평가 본인의 심도 있는 연구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대중비평 이전의 시대에서 전문비평가들이 비평적 권력을 어떻게 공고히 구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무엇보다 평론의 현장에서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치열하게 활동하면서 느꼈던 자기반성적 태도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다.
   정민아 평론가의 글 역시 심영섭만큼 독설적이라고 느껴진다. 정 평론가가 언급한 외국평론가 데릭 엘리의 인터뷰 내용은 아마도 평론가들보다는 영화기자 혹은 영화저널리스트를 보다 더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또, 영화비평이 이제는 객적은 소리의 공해가 됐다는 지적은 매체 환경이 현재 어떻게 변화하고 있다 한들, 비평가들이 지켜야 할 영화적 순수성이 어디를, 어떻게 지향해야 하는가를 얘기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영화비평이 공룡의 시대상황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한탄하지 말고 어쩌면 공룡의 시대, 그 순혈주의적 정서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 순수의 시대를 복원하는 것이 실로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점이다. 물론 심영섭 평론가의 제안대로 전문성 면에서 집단지성을 뛰어넘는 특정 평론가의 1인 미디어를 양산한다든가 평론가들이 집단적으로 웹 사이트를 구축한다든지 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정민아 평론가의 얘기대로 시네마테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시네필 운동의 시작도 시급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과연 그 활동들이 가져갈 지속적 생명력이 과연 무엇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평론가들 모두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희생적 실천을 선언하고 약속한다 한들 기초적 자금과 조직, 시스템 등 물적 토대를 비교적 견고하게 갖추지 못하면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정민아 평론가의 지적대로 <계간 영화언어>와 <영화/비평/현실>이 주간도 아니고 월간도 아니며 계간이고 무크지임에도 불구하고 몇 년째 발간이 지연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강고하고 엄혹한 자본의 현실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저급한 얘기가 될 것 같지만, 이들 책을 한번 낼 때마다 들어가는 비용은 최소 50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인데 그 어떤 공공기관이나 늘 말로는 공적인 영역을 추구한다는 대학 조직, 또 이런 일에 앞장서야 할 개혁적 미디어, 혹은 영화계 내 메이저 조직들 그 어떤 한 곳도 투자든 지원이든, 기부든,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변명은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추상적인데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돈을 사용할 명분의 계정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영화대중비평 주간지들 가운데, 물론 이제 몇 되지도 않지만, 영화광고를 싣지 않는 매체를 본 적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제는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때라고 본다. 버젓이든, 울며겨자먹기든 영화저널들이 영화광고를 실으면서, 혹은 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서 정민아 평론가가 언급한 김영진의 얘기처럼 ‘취재원과 지근거리에 있는 기자들이 영화평을 쓸 때 전문성과 비판정신을 발휘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라는 지적에 실제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평론의 위기는 분명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영화평론이라는 독자적 자생체계를 처음부터 산업에 지나치게 기대게 했거나, 아니면 두 평론가도 인식하고 있듯이 아예 공생을 넘어 기생하게 한 데서 비롯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영화평론의 역할을 ‘대중의 관심을 끄는 화제작들에 대해 첨언하는 형태의 주류 부스러기로 머물게’ 한 주원인일 수 있다.
   온갖 미디어들이 전광석화로 변신하고 융합하는 시대에 평론가들이 평론이라는 사원에만 머물러야 하는가. 영화평론은 영화산업에 대해 얼마만큼 고민해야 하는가. 평론이 산업을 주도할 수는 없는가. 최소한 산업으로부터 독립된,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그들과 때론 싸우고 때론 그들이 승복할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미디어의 변방에 머무르는 한 평론은 위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훌륭한 글을 읽으면서도 갖게 되는 의문들이다. 두 평론가들의 활기찬 토론을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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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오동진

등록일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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