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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비평(Mass Criticism) 시대’의 등장, 그리고 비평가와 대중의 거리(距離)

부산국제영화제 영화비평 세미나 : 주제발표 3


‘대중비평(Mass Criticism) 시대’의 등장, 그리고 비평가와 대중의 거리(距離)

 

심영섭 (영화평론가, 한국영상응용연구소 대표)

 


1. 서론 : 대중, 대상에서 주체로 나서다

 

   최근 문화계에 등장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 대중의 비평적 위력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다. <소녀시대>나 박재범을 둘러싼 첨예한 팬덤 현상, 이나 <황우석 사건>에서 보여준 네티즌들의 놀라운 정보력. 또한 영화계의 경우 2007년에 벌어졌던 심영래 감독의 <디 워 The War>를 둘러싼 논란은 대중비평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지는 대표적 사례 일 것이다.

 

   2007년 8월 1일, 전국 689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디 워>는 개봉한 지 6일만에 331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개봉 첫 주 최다 관객 동원이라는 신기록을 세웠으며 최종 8,423,308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사건은 개봉 전 심형래 감독이 방송(‘무릎팍 도사’ 등)에 나와 영화계의 편견을 지적하고 네티즌의 호응을 얻은 것이 최초의 발단이었다. 이어 이송희일 감독 등이 개인 블로그에 <디 워>와 ‘<디 워>의 팬덤 과열 현상’에 대한 비판성 글을 올렸고, 이 사건은 <디 워>를 옹호하는 많은 대중들의 비등점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대중과 전문영화비평 집단 간의 전면전 및 대결양상으로 펼쳐진 이 논란은, 100분 토론에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나와 <디 워>를 정면 비판하며 정점을 이루었다. 진중권은 대중들이 <디 워>를 좋아하는 이유를 4가지 코드로 분류 하면서 대중들의 <디 워> 옹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가 주장한, 대중의 <디 워> 옹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주의. 한국 영화가 헐리웃으로 진출하여 1500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것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 둘째, 민족주의. 아리랑을 삽입하고 한국의 설화를 스토리에 차용하면서 한국적인 문화적 코드를 전면으로 내세운 것. 셋째, 시장주의. 외국 전유물이었던 CG를 국산화한 것에 대해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기대. 넷째, 인생극장. 심형래 자신이 그동안 충무로에게서 받았던 천대와, 6년이란 기간 동안 고생해 만들었다는 인생역전에 대한 대중적 공감 등. 즉, 작품성과 무관한 여러 가지 심리적•사회적 배경이 대중들에게 <디 워>를 지지하게 만들었다는 게 당시 진중권의 분석이었다(진중권, 2008).
   이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디 워>를 지지하는 팬들은 진중권씨의 주장을 논박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할리우드와 한국 영화를 언급하며 (예를 들면 영화 <한반도, 2006>도 국가주의를 건드리지 않았는가. 이전에 개봉한 SF 영화인 <수퍼맨 리턴즈, 2006>나 <쥬라기 공원 3 (Jurassic Park III, 2001)>도 플롯이 엉성하고 우연의 남발이다” 등), 진중권씨가 SF 영화장르에 대한 사전비판 경험이 없는 무지를 드러냈다는 비난성 댓글을 퍼부었다.
   2007년도에 벌어진 <디 워> 논란은 대중들이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체를 통해 전문가 집단의 비평을 공격하면서 직접 비평적 의견을 피력하고, 자신들의 비평적 권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비록 진중권씨 본인은 <영화, 비평, 대중>이란 논문에서 “엄밀히 말해서 <디 워> 사태는 대중비평과 전문비평의 충돌이 아니다. 왜냐면 비평가들을 향한 대중의 분노가 자신의 미적 취향이 무시당한 데서 비롯된 흥분이라기보다, 그 영화가 약속하는 장밋빛 환상의 집단적 꿈에 비평가들이 동참하기를 거부하고 그 환상을 무참히 깨버린 데에 대한 노여움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인터넷 문화의 급격한 확대가 대중에게 단순히 수용자, 소비자의 입장이 아니라 생산자 혹은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한공간을 제공하고 대중의 도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에는 별 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대중비평(mass criticism)의 도래는 비단 영화계의 일만은 아니다. 연극, 서적, 가요 등 문화계 전반에서 전문 비평의 영향력이 축소되어가고, 이른바 대중의 ‘입소문’과 그 입소문의 집단화•조직화가 문화 상품의 핵심 축을 이루고 있다. 대중은 인터넷 게시판, 블로그, UCC, 트윗 등 수 많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자신들의 자립적인 비평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기존의 전통적인 언론 매체와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일종의 비평적 유통망 혹은 배급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런 대중비평의 도래는 단순히 기존 언론 매체나 전문 비평가의 영향력 축소의 문제뿐 아니라 과연 대중이란 무엇인가, 대중비평은 무엇인가, 대중비평과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상관이 있는가 하는 거시적인 질문까지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대중비평에서 드러난 ‘대중’은 기존 평론가들이 제시하지 못한 참신하고 새로운 각도의 영화보기의 가능성에서부터 파워 블로거나 파워 트위터리안 같은 오피니언 리더들에 의해 쉽게 의견이 조작될 수 있는 획일성까지, 또한 특정 영화인이나 비평가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과 악플에서도 드러나듯이 별다른 성찰이 없는 파시즘적인 양상까지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제자는 대중비평의 도래와 언론 권력의 분할 현상 같은 ‘현대적 사건’에 깃든 시대적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에 따른 ‘대중’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변화를 다시 한번 고찰하려고 한다. 또한 ‘대중비평의 시대’에 직면하여 대중비평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메타비평적인 관심을 표명함으로써, 현재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문비평의 위기와 비평의 존재 의미, 더 나아가 우리의 문화계에서 대중비평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성찰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오늘 날 대중비평과 전문비평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협업하고 상생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과 그 현존의 자리를 가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보고 싶었다. 또한 이러한 고찰은 새로운 대중권력으로서의 대중비평에 어떤 문제점은 없는지 살펴보고, 전문 비평가의 입장에서 새로운 ‘비평의 시대’에 전문 비평가는 어떤 책무를 져야 하는지, 전문 비평의 새로운 활로는 있는지를 모색하는 계기를 찾아보려고 한다.

 


2. 본론 - 대중비평의 도래: 혁명인가, 침몰인가

 

1) 대중과 대중비평의 정의

 

   저자(author)와 권위(authority)라는 단어의 형태적 유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글쓰기란 전문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특히 17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가 도래하면서 비평가의 눈을 통해 수용자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길러주고 작품에 대한 견해를 언어로 정식화하고 해석하는 것을 도와주는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예술 문화에 새로이 ‘비평’이라는 장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술계의 드니 디드로 Denis Diderot, 1713년 10월 5일 ~ 1784년 7월 31일, 프랑스), 문학계의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Gotthold Ephraim Lessing 1729년 1월 22일 ~ 1781년 2월 15일, 독일)
   대중을 계도 및 교육하고 창작자를 향해서는 미래의 창작을 도와주는 유용한 피드백을 준다는 관점에서 계몽주의적 비평의 맥락은 19세기까지도 암암리에 존재해 왔다. 비평계는 오랫동안 대중비평을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으로 정의해 왔고, 이러한 대중비평이란 개념은 전문비평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이때의 대중비평(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이란 구체적으로는 신문, 방송, 주간지 및 월간지 같은 특정 매체에 실려서 대중에게 영화, 연극, 문학 등에 대한 정보와 미학적 평가를 전달하는 전문가의 비평적 행위를 통칭하였다.
   원용진 교수는 2007년도 <문학과 사회>에 실린 ‘대중비평의 형성과 과정’이라는 글에서 위와 같은 전통적인 정의의 대중비평은 비평자 생산 중심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생산자 중심의 정의법은 비평생산 주체를 한정하는 효과를 내고 비평은 비평가의 독점적인 몫임을 못 박아 기존 생산권력 독점을 연장시킨다는 것이다. 이 정의법은 대중의 지위를 수용에 한정하게 만든다고 그는 주장했다. (원용진, 2007)
   그러나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적으로 비평은 대중을 향한 비평이 아닌, “대중이 주체가 되어 비평하는” 새로운 개념의 비평 양태를 만들어 낸다. (편의상 대중을 향한 비평과 대중이 시행하는 비평을 구분하기 위해, 발제자는 앞으로 대중이 주체가 되어서 시행하는 후자의 비평을 ‘대중비평(mass criticism)’이라 통칭하겠고, 대중을 대상화하는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중비평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평’이라고 풀어서 쓰겠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고찰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과연 ‘대중’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중 인식과 그 정의의 문제이다. 정진수 교수는 <연극비평과 대중>이란 글에서 대중비평, 그중에서도 연극 비평이 가능한 대중이란 일단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은 청소년을 제외하고 어차피 제발로 연극 공연장에 오지도 않는 50대 이상의 노장층을 제외한,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갖춘 20대 이상부터 40대까지의 남녀’로 국한하겠다고 제안하고 있다(정진수, 2003). 이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대중에 관한 정의인 셈이다.
   반면 원용진 교수는 대중의 물리적 정의보다는 대중이 누구인가 하는 인식의 변화에 초점을 둔다. 그는 대중이 주체가 되는 반란과 반역은 기존 질서로부터의 일탈이므로 통제로써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다다가는 지적 접근을 ‘통제 인식론’(이 유파에는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가 있다)으로 명명했다. 반면 대중의 반란과 반역이 궁극적으로 대중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며, 대중이 정치과정에서 해방을 욕망하는 모습을 그린 사유 노선을 ‘해방 인식론’(이 유파의 대표적 철학자로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라이히-네그리 등이 있다) 으로 명명하였다. (원용진, 2007)
   만약 대중을 ‘통제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느냐 ‘해방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수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전문 비평가의 임무와 활로는 매우 다른 양상과 주장이 전개될 소지가 크다고 본다. 그러하여 발제자는 대중을 ‘통제 인식론’이냐 ‘해방 인식론’적인 관점에서 수용하기보다 두 관점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 관점으로 대중과 대중비평을 정의하려 한다. 이때의 대중은 19세기까지 인문학에서 빈번히 사용된 시민이나 인민과도 다르고, 일차 여론 집단에만 영향을 미치는 기존의 오피니언 리더와도 다른 개념이다.
   첫째, 대중비평 속 대중은 전문가집단과 대비하여, 개별적인 스타 평론가가 아니라 단순한 감상평에서부터 그 힘이 전방위적이고 비공식 및 공식적인 비평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개인들을 포함하는 ‘개인적 낙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집단지성(지성에 방점을 찍기보다 집합에 방점을 찍는...)’으로 정의하겠다. 둘째, 대중비평 속의 대중은 평균인(hombre medio)이지만 ‘오늘 날 사회의 모든 계급에서 볼 수 있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압도하는 종류의 인간’으로 '한없이 쪼개진 구심점의 덩어리들'로 보려 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 (Jose Ortega y Gasset, 1883년 ~ 1955년)가 <대중의 반역>에서 피력한 대로, 현대적 대중은 즉흥적이고 역사인식 없는 소수에 의해 쉽게 조작되는 나약함도 있지만, 기존의 인민이나 시민들과 달리 개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광범위한 소통 욕망을 지닌 살아 움직이는 실체,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체로서의 생기와 에너지가 함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가세트, 2005)

 

   물론 대중비평가 중에서도 스타비평가가 있을 수 있다. 대중비평은 대중을 이끄는 집단 혹은 사람들의 존재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비록 실명 혹은 가명을 한 몇몇 ‘지적 대중’이 비평을 시작했다 하더라도, 대중비평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끝이 반드시 댓글이나 트윗글로 화답하는 ‘집합적 성격’을 띤다. 또 다른 대중비평의 특징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대중비평 속에 깃든 대중들의 ‘소통 욕망’이다.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년 7월 21일 - 1980년 12월 31일, 캐나다)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기존 언론 매체가 인간 신체의 확장(옷은 피부의 확장, 라디오는 귀의 확장, 인쇄 매체는 눈의 확장)이라고 보았다면, 뉴 미디어 매체의 사회적 확장은 소통 관계의 유비쿼터스 파일 것이다. 대중비평의 대중은 일방적 독백이 아닌 다수와 소수의 대화, 소수와 소수의 유대, 즉 소통과 당파성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전규찬, 2007)

 

   필자는 이러한 정의를 통해, 대중비평의 대중을 형식적인 주체로만 올려놓거나 반대로 급진적인 해방의 관점에서 선동하는 양 극단의 논리를 경계하면서, 전문비평가와의 선을 명확히 긋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은 본 논의의 핵심을 사회적인 관점으로 끌어 올리고 실물 비평적인 관점, 즉 현재 벌어지는 비평 현상을 충분히 수긍하고 수용하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2) 대중비평 시대 이전의 전문비평의 권력 - 영화비평을 중심으로

 

   2000년대 들어 대중비평이 비평계의 관심을 끌기 이전,  문화비평 특히 영화비평 권력은 (편의상 여기서 전문 비평을 쓰는 영화전문가는 영화평론가와 영화연구자로 국한하겠다) 크게 세 가지의 관점에서 비평적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비평의 공간’과 연관된 권력. 기존 언론 매체는 유통과 공급에 있어서 대단히 독과점적이고, 대중의 접근이 쉽지 않은 체제적 구조를 지녔던 것. 신문, 방송, 잡지 같은 전통적인 언론매체는 매체의 속성상 자체 지면을 가지고, 특정한 생산자와 기획자만이 만들 수 있는 선별된 컨텐츠들로 지면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영화전문가가 등단을 하든 그렇지 않든 권위 있는 일간지나 잡지에 평론을 올렸다는 사실 자체는, 이미 글쓰기와 기사쓰기에 전문성이 있는 언론집단의 평가를 거쳤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비평적 공간의 폐쇄성은 특정한 지면을 공유하는 특정한 집단의 전문성을 담보하는 가장 튼튼한 지지 기반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비평의 시간(타이밍)’과 연관된 권력. 영화 시사는 보통 개봉 전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극장에서 열린다. 따라서 일단의 영화기자나 영화전문가 집단은 늘 일반인들보다 특정 영화를 영화 개봉 전에 볼 수 있으며, 더 빨리 자신의 의견을 발화하고 영화에 대한 개인적 평가를 피력할 수 있는 시간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설사 개인적으로 영화 관람 횟수가 많고 독자적으로 영화 및 인문학 공부를 수행하여 상당한 정도의 비평적 시각을 갖고 있는 일반인이 있을지라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발화하는 시간성이라는 면에서 늘 영화전문가 집단에 뒤쳐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본질적으로 내재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비평의 권력성에서 비평의 타이밍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비평의 타이밍은 뒤에 논의할 비평의 내용 및 비평의 질과 예민하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비평 시간의 타이트함과 개봉전 비평의 리뷰 수요는 개봉 영화를 둘러싼 산업과 비평계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이는 비평의 권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다소의 질적 저하가 있더라도, 개봉 영화의 줄거리 요약이나 영화에 관련된 지식 및 사실 전달, 간단한 감상평의 제시만으로도 기존의 영화평론가들은 대중으로 하여금 영화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셋째, ‘비평의 내용과 질’과 연관된 핵심적인 권력. 전문적인 비평에는 (만약 그것이 올바르게 그리고 적절하게 수행되었다면) 일반 대중들이 영화를 보았을 때 알아 챌 수 없는 영화에 관한 많은 통찰과 숨겨진 의미, 심도 깊은 재해석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진중권은 전문비평가의 역할로서 ‘비평가는 창작자를 향해서 미래의 창작을 조정하는 피드백 역할을 하며, 다른 수용자들을 향해서는 작품을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고 작품에 대한 견해를 언어로 정식화하는 것을 도와주는 교육적 기능을 한다’라고 정의했다. (진중권, 2008)

 

  좋은 비평문은 읽는 이에게 해석자의 역할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수잔 손탁이 이미 1966년도에 주장했듯이 그 글이 문체와 주장의 독특함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또 다른 미적 체험이나 인문학적 체험을 하도록 만든다. 수잔 손탁(Susan Sontag, 1933년 1월 16일 - 2004년 12월 28일, 미국)은 지식인 혹은 비평가의, 궁극적 비평의 목표를 ‘예술이란 컨텍스트를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성애학(erotics of Arts)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었는지’, 더 나아가서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지금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다.”
   이런 정도의 비평의 질을 담보하고 비평 자체가 하나의 인문학적 경지를 보여 줄 경우, 특정 비평가의 책은 저서로 출간되거나 그의 이름을 딴 팬클럽이 결성되어 그의 글과 말을 채록하거나, 그와 연관된 메타 비평이 수행되는 전문 영화평론가로서의 면밀한 평가, 존경, 비판, 지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영화전문가의, 학문의 영역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지식과 막대한 편수의 영화관람 경험 자체가 대중과 차별되는 권력으로 존속한다. (즉 ‘아는 것이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또는 '아는 만큼 보인다‘의 논리.)

 

3)  전문 비평의 위기 대두

 

   정보 자체가 지식인 시대 그리고 영화시사의 타이밍과 전문 평을 쓸 수 있는 매체의 확보가 권력의 기반이 되었던 시기를 지나, 2000년대가 들어오면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대중비평이란 말이 보편화되기 이전이었다) 영화계 내부에서는 영화비평의 위기와 영화비평계의 문제를 짚는 글들이 속속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또한 신문에서 평론가의 고정란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가속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2002년 1월 3일 새해 벽두부터, 주간지 <한겨레21>은 ‘비평의 파산’이란 제하의 글에서 한국 영화비평의 위기를 진단하기 시작한다. 취재를 맡았던 이성욱, 김은형 기자가 각계의 비평가들과 제작자들, 영화마케팅 실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주장한 한국비평계의 문제점은 다음과 요약된다.

 

   첫째, 대중이 평론을 외면하고, 비평이 영화흥행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자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2002년 당시) 50%가 넘는데 스타 비평가나 영향력 있는 저널이 없고, 영화제나 평론가의 별점을 많이 받으면 이 사실을 감춰야 한다는 이야기가 영화마케팅 담당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지금도 일부 그렇지만 당시 영화 마케팅에서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텔레비전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노출해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이성욱, 김은형, 2002)
   둘째, 영화비평가의 자질이 떨어지고 그 층이 좁으며 소신 있는 비평이 적다. 신문이나 주간, 월간지의 비평은 대부분 영화담당 기자나 기자를 겸하는 평론가들의 손에서 나온다. 2002년 당시 평론가와 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진은 다음과 같이 이러한 사태를 압축하여 진단하였다. “평론을 평론가가 하느냐,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지면의 권력을 쥔 건 기자들이다. 사람들이 평론가를 욕하는데, 평론가는 사실 힘이 없다”(김영진, 2002). 이에 대해 신문 쪽은 평론가가 정색하고 쓴 글을 딱딱하고 무겁게 여겨 대중이 외면하고, 또 지면을 주려고 해도 평론가 층이 워낙 얕아 필자 선정이 쉽지 않고, 신문 전체의 편집 방향에서 ‘믿고 맡길 만한’ 평론가가 없다는 것으로 화답하였다(이성욱, 김은형, 2002). 이러한 비평가의 자질 논란 뒤에는 자본과 매체의 결탁이 횡횡하면서, 비평가가 산업에 호의적으로 동반주의적 비평을 쓰거나 소신 있는 평을 쓰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셋째, 학술 비평과 체계적인 이론 비평이 매우 부족하고 공허하다. 이러한 예로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1930년 - )가 오히려 한국 임권택 감독의 연구를 더 길게 깊게 하고 있으며, 국내에 이렇다 할 영화연구서가 없거나 한국영화사에 대한 핵심 저작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당시 영화평론가였던 이상용은 “아카데미즘이 활성화되지 못하면 결국 저널비평도 죽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저널비평과 이론비평이 너무 닮아 버렸다. 비평가 1세대가 저널이면 저널, 학계면 학계에서 분명하게 나뉘어 서로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너무 여러 곳에 발을 걸치고 있다”(이상용, 2002)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위의 기사와 주장들은 비평가들이 비평의 공간과 비평의 타이밍이라는 측면에서 영화평론가의 영향을 영화기자들과 나누거나 뺏기고 있으며, 비평의 내용과 질이라는 측면에서도 영화 기자들의 리뷰와 별반차별화 되지 못하거나 비평의 깊이가 부재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 비평의 위기와 비평가들의 영향력 저하에 관한 글들에서 대중비평의 개념이나, 대중이 평론가와 어떤 거리와 경쟁을 벌이리라고 예견한 글은 극히 드물었다.

 

4) 대중비평 (Mass Criticism)의 도래

 

   2000년대 중반이후가 되자 매체 환경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그것은 비단 영화 비평과 연관된 매체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킨들이나 아이패드가 기존의 종이책을 대신하고 UCC, 블로그, 트윗의 등장은 ‘문화산업론’이나 ‘계몽의 변증법’ 류의 문화론을 뿌리로부터 전복시키고 있다. ‘뉴스는 살아남고, 종이는 죽었다’는 종이 매체의 죽음이 선언되기도 했다. 포털이 모든 뉴스를 취합함으로써 복합적인 메가 언론의 영향력을 가지고 새로운 매체 권력의 우세종이 되고 파워 블로거, 파워 트위터란 새로운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들은 소비 - 생산, 노동 - 휴식과 오락, 육체노동 - 정신노동, 대중 - 엘리트 및 지식인, 공장 또는 사무실 노동 - 집안에서의 사생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 생산력의 집단적 사용 등과 관련된 과거의 모든 분리와 한계선을 지워버리거나 흐리게 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인터넷으로부터 그 발원지를 두고 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User Created Contents라는 말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듯이) 프로슈머(Pro-Sumer)로, 즉 소비자이자 생산자로 그것도 펌글과 댓글이라는 형태의 단순 재생산으로부터 UCC라는 창조적인 생산으로 급격하게 진화중인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폰 4 영화제 개최가 상징하듯이, 스마트 폰의 도래는 이제 단순한 소통 도구를 넘어서 문화와 예술품의 생산의 경지까지 이를 전망이다(조형준).

 

   비평 분야에서도 과거 비평의 대상이던 쪽이 비평의 주체가 되고, 비평의 주체였던 자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난다. 평론가의 별점보다는 포털사이트의 네티즌들의 단평이 주말 극장개봉영화 선택의 기준이 되고, 영화 전단에는 자주 인터넷의 입소문과 단평들이 대문짝만하게 소개된다. 뿐만 아니라 블로그에는 전문 비평가 뺨치는 영화 분석글이 넘쳐 나고 있다.
   일단 리뷰와 단평의 경우를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네티즌이 최근의 화제작 <인셉션>을 요번 주말에 봐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고 치자. 그는 몇몇 매체에서 시행하는 별점 제도와 리뷰를 참고할 수도 있고, 스마트 폰을 활용해 트윗에 물어 보거나, 네이버 영화검색 게시판에 들어가서 탐색을 할 수도 있다. 과연 일반적인 네티즌은 어떤 방법을 선택할까?

 

   일단 대중비평은 양에 있어서 전문비평을 압도한다. 네이버 영화평란에 실린 영화 <인셉션>에 대한 리뷰가 2010년 9월28일 현재 총 3849개인데 그중에 찬성 리뷰가 2933명, 반대 리뷰가 166명에 달한다. 평점은 9.11이고, 40자 평도 18420 건 정도라 놀라 왔다. 이 놀라운 숫자만 살펴보아도, 일반 대중이 <인셉션>을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아이디 theluv2가 쓴 리뷰 <인센셥, 해외 포럼 완벽 분석 가이드>는 조회수 32만건, 이 글을 좋은 리뷰로 추천한 사람이 387건에 달하며, 이 리뷰에 대한 댓글은 680개가 달려 있다. 전문 비평가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가령 발제자의 팬들이 모여 10년전부터 다음(Daum) 까페에 운영하고 있는 ‘심영섭의 힐링 시네마’에 게재된 심영섭의 <인셉션 시사회를 마치고>라는 리뷰와 주간동아에 올린 <인셉션> 글의 조회수가 8791건이고, 댓글이 16개 달려 있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조회수이다.
   그렇다고 theluv2의 개인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theluv2가 그의 아이디로 쓴 리뷰는 <인셉션> 단 한 개뿐이고, 오히려 theluv2의 리뷰를 지지하고 추천해 준 것은 그의 인셉션 리뷰를 맨 위에 올리고 추천한 포털 기획자와 그것을 조회하고 지지한 대중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양은 질을 구축한다. 평론가 박유희는 이러한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이제 대중을 타자화 시킨다는 것은 자기 영역의 게토화를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이는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평론가들의 별점이나 입김은 관객이 주말에 볼 영화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티즌들의 생생한 20자평 혹은 40자평이다(박유희, 2007)”
   그렇다면 좀 더 전문비평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크리틱이나 메타비평의 영역은 어떠한가. 이 점을 고려해 보기 위해, 발제자는 어느 파워 블로거의 <인셉션>에 관련 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인터넷에서 블로그〈image or real〉을 운영하고 있는 아이디 용짱님의 <인셉션>에 대한 글의 일부이다.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롭게 바라 볼 부분은 인셉션 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즉 타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의식이라는 부분이다. 그렇지 않은가. 남의 무의식속에 들어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채, 의식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부분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포인트는 남의 무의식 속에서 의식 활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무의식 효과에 불과 하다는 점이다.
   극중 디카프리오는 아주 큰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 상처로 인한 죄책감은 자신의 내부를 엄격하게 구조화시켜 단계별로 억압시키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극중에서 나온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억압된 그것들은 끊임없이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의식은 무의식의 효과라는 명제는 결국 억압된 내용물들이 지속적으로 언어활동, 즉 은유와 환유의 과정을 통해 해석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솟아오름을 말하게 된다. 그리고 디카프리오의 내면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바로 설계자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중략)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 자체가 체계 안에서 생성되는 주체이고, 그 언어적 체계에 의해서 무의식적 체계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이것들은 분리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말해주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용짱, 2010)
   이 영화평은 필자가 라깡이나 프로이트, 융 같은 구조주의 철학자나 심리학자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인셉션>에 대해 새로운 시선과 해석을 부여하지 않은 한 쓰기 힘든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블로그의 글은 ‘왜 <인셉션>이란 영화가 꿈의 질감을 담지 않았는가, 영화의 플롯 구성이 담대하지만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부족하지 않는가’라는 전문 비평가들의 의문에 화답하는 비평적 재료들을 듬뿍 담고 있다.

 

   게다가 대중비평은 아주 거친 방식이지만 자신들의 비평, 즉 대중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까지도 담당하고 있는 중이다. (상대적으로 전문비평에 관한 메타비평은 <디 워>같은 특별한 사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중 자체가 이제 평론가의 글을 집중해서 읽고 메타비평을 쓰고자 하는 욕구 자체가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례로 네이버에 <인셉션 전공한 교수님들 보세요>라는 어느 네티즌은 다음과 같이, <인셉션>에 대한 네티즌 리뷰를 쓴 대중비평가들을 비난 (비판이라기 보다) 하고 있다.    “영화 리뷰를 둘러보니까 말 그대로 가관이었습니다. 영화가 너무 허술하다, 뻔한 스토리라인이다, 나라면 엘리베이터 대신 산소통을 쓰겠다 등등. ㅋㅋ, 뭐 자기생각을 말씀하시는 건 좋습니다. 근데 그건 하나의 '의견'이지 '정답'이 아닙니다. 모든 분들이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만, 몇몇 분들은 마치 자기가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수년간 전공하신 교수님처럼 말씀하시더군요. '인셉션은 이래서 병신이고 나라면 이렇게 했겠다' 식으로 모두들 놀런 감독 머리 위에 올라가 계시더라구요. 의견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네티즌 리뷰'이지 '네티즌 정답맞추기 게시판'이 아니라는 겁니다. (중략) ”

 

   결론적으로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 영화비평은 영화전문가들이나 영화기자의 전유물이었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전과 달라졌다. 이제 영화 정보를 검색하면 하나의 창에 전문가의 영화 평점과 일반인의 평점이 함께 뜬다. 인기 있는 블로그에는 꾸준히 드나드는 고정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오늘날 대중들은 어렵고 고루한 글을 쓰는 평론가보다 독특한 시각에서 쉽게 텍스트를 설명해주는 블로거를 선호한다. 진중권은 “비평가들의 엘리트주의는 과거에는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이제 그것은 권력을 잃은 자들의 자위행위로 여겨질 뿐”이라는 독설을 던진다. 전규찬 교수의  말대로 “양이 질을 압도하고, 무질서가 질서를 대체하며, 속도가 거리를 살해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5) 대중비평 시대가 도래한 이유

 

   그렇다면 왜 2000년대 들어 대중비평 시대가 동시 다발적으로 도래했을까? 그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영화비평은 대중비평 중 가장 활성화 되고 가장 광범위한 대중이 참여하는 것일까? 대중비평 시대의 도래의 이유에 앞서 일단 영화비평 매체에 대한 매체적 속성의 특징에 대해 알아 본 후, 대중비평을 가능케 했던 시대적 배경에 대해 논의하겠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년 7월 15일 ~ 1940년 9월 26일, 독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가 대중을 ‘산만한 검사자’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했다. 연극의 경우 배우의 인격적 카리스마에 대한 경외의 감정이 수반된다면, 후자는 모든 것을 세부까지 꼼꼼히 조사하는 검사관의 정신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영화는 사진이라는 복제 기술에 기초한 장르로서 ‘배역의 아우라’ (햄릿 같은 극중 인물이 뿜어내는 아우라)와 ‘배우의 아우라’(연기하는 배우의 인격적 현존이 뿜어내는 아우라)라는 두 가지의 아우라를 애초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연극의 관객과 달리 영화 관객들은 영화 매체에 능동적이면서 주체적인 수용 태도를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벤야민에 따르면 복제 기술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대중의 보수적 태도를 채플린의 영화를 보는 진보적 태도로 바꾸어 준다”는 것이다. 즉 자기 앞에서 대중을 주눅 들게 하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영화는 대중들 사이에 활발한 비판을 촉진하는 경향이 애초에 있어 왔다는 것(벤야민, 1968).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비평은 영화 자체의 기술 복제의 특성과 아우라의 부재라는 속성에 인터넷의 도래가 겹쳐지면서, 영화 비평은 그 어떤 예술 장르의 비평보다 더 빨리 대중비평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인터넷은 대중으로 하여금 산발적인 정보를 손쉽게 끌어 모으는 거대한 백과사전이나 지식의 바다 노릇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은 기존 종이 매체가 갖는 지면의 문제와 방송 매체가 갖는 논의의 지속성을 한꺼번에 해결했다. 일반 지면들은 영화 잡지라 하더라도 길어봐야 50매 내외의 분량을 넘기 힘들다. 비교적 전문적으로 자유로운 평론을 쓸 수 있는 큰 지면은 이미 인맥이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섹트(sect)화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러한 모든 제약을 떠나 누구에게나, 무한한, 영속적인 지면을 제공한다. 게다가 인터넷은 서로 다른 매체를 엮는 상호매체성(inter media ability)을 발휘해 네티즌들의 논의가 이동, 지속, 반복하도록 도와준다.

   또 다른 이유로는 사회적인 집단구성의 변화를 들 수 있겠다. 세대와 이념을 초월한 사람들이 모인 집합이 속출한다. 예를 들면 초등학생부터 할아버지, 군인부터 중년여성까지 모인 소녀시대 팬덤이 그 예일 것이다.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하기 힘들고, 계급을 기준으로 정리해내기 힘든 사회적 조합들이 생겨나면서 이들 사회 집단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야 했다. 그리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정체성 형성 재료를 제공해야 했다. 정체성 형성을 위한 진리체계, 감성적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상징체계, 집합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분위기 등을 생산하면서, 집단 내 논객들은 그 같은 재료를 제공하고 집단은 그를 집합적으로 살을 붙여 대중비평적 결과를 내 놓는다(원용진, 2007)

 

6)  대중비평의 명과 암

 

   황우석 사태나 <디 워> 논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대중비평은 이렇게 비평 권력에 대한 분산을 통해 비평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확산시키고 비평에 입문할 수 있는 다양한 비평 공간을 확보해 주는 순 기능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지식인들의 무능함이나 현실 비판의식의 부족을 비집고,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일깨우고 전문가 비평과의 차이를 노정하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 대중비평은 사회적 공론을 발생하고 자유언론을 확산시킬 때, 그럼으로써 민주적 공간을 확대시킬 때 선할 수 있다. 전규찬 교수의 말대로 대중비평은 그 자체(being)로 선하지 않으며, 오직 제대로 함(doing)으로써 선하게 될(becoming)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 공간의 등장이 비평의 문턱을 낮춰 대중의 참여를 유도할수록 그 그림자도 함께 늘어난다. 기이하게도 대중비평이 확산될수록, 인터넷에 좋은 글은 희귀해지고 비문은 넘쳐난다. 어떤 블로거들은 직접적으로 타인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부탁하기도 하고, 실제로 파워 블로거들은 연예인처럼 많은 네티즌의 관심을 한 번에 받는다. 하지만 조회 수에 따라 순위가 매겨지는 포털 사이트를 살펴보면 흥미 위주의 글이나 가벼운 단상을 기록한 글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 김홍기 칼럼리스트는 이를 두고 ‘문화•연예’로 분류된 블로거 뉴스 섹션에는 문화는 없고 연예기사만 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때문에 자극적인 제목으로 조회 수를 높이려는 ‘낚시성 글’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글들이 대중비평에 기여할 리 만무하다. 대중비평은 그 한편에 인상주의적 비평을 양산시키고, 전반적인 비평의 질적 저하를 함께 하는 문제점도 가지고 왔다. 무엇보다도 대중비평은 익명성의 이점을 바탕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책임이 전문비평가보다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전규찬 교수는 정밀하게 연마된 언어나 예리하게 단련된 사유, 일정하게 유보한 감정이 아닌 거친 언어와 뭉툭한 사고 그리고 즉각적인 감정이 대중비평의 핵심 코드라 정의한다.

 

   그리하여 기사와 비평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전통적인 글쓰기나 문체의 아름다움이 깃든 글들이 사라져 갈수록 인문학의 위기는 심화된다. 영화저널리즘 분야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명 평론가 로저 에버트(Roger Joseph Ebert, 1942년 6월18일 -, 미국) 는 지난해 말 자신의 블로그에 ‘영화평론가의 죽음, 연예종교(CelebCult)의 영광’이란 글을 올렸다. 에버트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최근 AP통신이 내건 정책이다. AP는 모든 연예관련 기사의 단어 수를 500개 이내로 제한했고 외도, 이혼, 마약중독, 스캔들 등 대중이 원하는 짤막한 연예 뉴스에 초점을 맞추라고 필자들에게 주문했다. 에버트는 “연예종교는 우리의 문화를 산 채로 먹어치우고, 신문은 스스로 몸을 내맡긴다”며 “젊은이에겐 초라한 가치관을 가르치고, 병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사생활을 침범하면서도 정작 의미 있는 성취에는 무관심하다”고 비판했다. 로저 에버트의 지적대로 영화평론가들의 존재는 인문학의 위기를 알리는 ‘광산 속의 카나리아’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로저 에버트는 “평론가의 몰락이 문제가 아니다. 지적이고 의미 있는 일에 관심을 보이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기능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대중비평 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백승찬, 2009).

 


3. 결론 - 대중비평 시대, 전문 평론가의 역할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대중비평의 명과 암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때, 현대사회에서 비평전문가 집단은 급변하는 매체 환경과 함께 새로운 역할과 임무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 IT 시대에 있어서 인터넷의 창성과 종이 매체의 절멸은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이며, 이제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서로 보완하고 연계할 때만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 미래학자 존 나이스빗(John Naisbitt)은 그의 저서 <메가트렌드 Megatrends, 2000>에서 미래사회에는 ‘High tech, High touch’가 사회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tech'는 인터넷을 가리키며, 'touch'는 그 어느 시대에도 남아 있을 감성적 터치와 대중적 소통을 의미한다.
   역발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대중비평 시대의 도래는 오히려 전문 비평가로 하여금 예술산업이나 기존 주류언론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라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으로 전문 비평을 수행하고, 오프라인상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 다양한 영화적 감상을 함께 나누고 호흡하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전문 평론가의 입장에서는 대중비평과 대중에게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그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대중비평에 무엇이 부족한가에 관한 전문비평가의 고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발제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양한 인터넷 상에서 대중비평을 살펴 본 바, 개인적으로 아직도 전문비평과 대중비평 사이에는 상당한 격차와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대중비평과 전문비평의 거리는 첫째, 비평적 측면에서 아직도 전문가는 대중에 비해 다양한 지식과 전체적인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리뷰의 경우, 대중비평과 전문비평 사이의 격차가 줄어들고 심지어는 전문비평에 버금가는 영화적 지식과 해석을 내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크리틱의 영역으로 넘어 갈 경우는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인셉션 Inception, 2010>에 관한 3849개의 네티즌 리뷰를 필자가 대략적으로 읽어 본 바, 이 수 많은 대중비평에서 <인셉션>이란 다층적인 영화 텍스트를 영화찍기의 관점에서 혹은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비평적 심급을 보여주며 대중과 소통을 시도한 비평은 매우 소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영화 <인셉션>의 꿈 장면들이 시간을 쪼개어 교차 편집을 극대화한 연출을 시도했다든가, 놀런 감독이 무중력 이미지의 호텔 장면에서 컨테이너를 연결해 CG 없이 만들어 냈다든가, 대부분의 인셉션이 기차와 비행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유라든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대사가 캘리포니아대학 언어학과 교수인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2006>에서 나왔다든가, 놀런의 영화들이 데뷔작 <미행 Following>와 <인썸니아 Insomnia, 2002>를 제외하고 ‘아내의 죽음’이라는 정신적 트라우마에 바탕을 두었다든가 하는 텍스트 안과 밖을 종횡무진하는 지식이란 측면에서 대중비평은 적절한 단서를 찾거나 인문학적인 심도를 보여주는 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블록버스터란 헐리우드의 공산품에 어떻게 작가주의적 인장을 찍을 수 있는지, <인셉션>은 영화장르 안에서 어떤 영화의 영향을 입었는지, 앞으로 <인셉션>이나 <매트릭스 Matrix, 1999>같이 철학하는 SF의 등장이 SF 장르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서도 대다수의 대중비평들은 뾰족한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 즉 글쓰기의 경륜과 영화보기의 관람의 사적 역사 안에서 특정 블로거가 평론가보다 더 글을 잘 쓸 수 있어도, 평론가처럼 앞으로의 가능성과 전체적인 영화역사의 방향성 및 감독의 발전가능성을 구체적인 논거로 제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대중비평과 전문비평의 또 다른 거리로는 다음이 있다. 단편과 비문이나 구어체 문투에 익숙한 블로거나 네티즌들의 글에, 글쓰는 이 특유의 문학적 향기나 문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지식의 전달은 있을지언정 비평문을 읽는 글의 맛이나, 수잔 손탁이 천명한 바 예술을 투명하게 느끼게 만들 수 있는 글의 색깔과 호흡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블로거의 글의 경우, 글의 호흡이나 글에 대한 세공력이 짧아서 상대적으로 글의 구성력이 떨어진다는 문제점도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대중비평과 전문비평 사이에 엄연한 거리와 장애물이 존재하는 바, 전문비평가 집단은 향후 대중비평의 시대에 영화비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지속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대중에게 전달력이 높으면서도 전문성이 살아 있는 글쓰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 다음, 드라마와 영화, 패션과 미술처럼 서로 다른 분야를 통섭하여 연관 지어 쓰는 비평문을 쓸 경우 자신의 전문성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문제. 다음, 학구적 비평과 저널적인 비평을 구분하여, 그 매체와 대상에 따라 적합한 표현전략을 구사하는 성의와 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하는 문제.
   중요한 것은 대중비평 시대와 적절한 거리를 가지고 전문 비평가의 색깔을 유지하려면 비평가 자신도 끊임없는 헌신적인 공부와 폭넓은 인문학적 사유를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색깔 있는 글쓰기가 가능하다면 평론가에게 인터넷 시대의 도래는 오히려 전통적인 언론 매체를 통하지 않고도, 1인미디어 시대의 활성화와 전문비평 특성화를 위한 또 다른 기회를 마련해 줄 것이다.
   둘째로, 전문가 비평집단은 대중문화가 갖는 사회적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사회비판의 도구로 삼을 것인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는 첨예한 글로벌 자본주의에 휩쓸린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를 다 했는가 하는 자기반성과도 연관이 있다. 이 관점에서는 대중비평 속의 대중성을 인정하면서 그 대중성이 갖는 ‘정치적인 힘’을 사회변혁의 주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 전문비평가의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하겠다.
   셋째, 전문가 비평집단은 영화비평의 활성화와 대중의 주목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책의 실천과도 연관되어 있다. 현재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정 평론가의 *** 닷컴이나 홈페이지 같은 1인 미디어의 시도뿐 아니라, 평론가들이 집단적으로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구축하고 차별화된 영화 지식과 영화 비평을 선보이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안도 또 다른 글쓰기의 공간을 넓히는 데 중요하다고 본다. 대중들이 쉽게 댓글을 달 수 있고, 대중들도 전문비평가와 함께 영화평을 올릴 수 있도록 하며, 오프라인에서 찬반 토론 이벤트를 벌이거나, 감독들과 다른 제작자와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대중들과 함께 시도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도와 더불어 인터넷 상에서 자신만의 영화평으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대중적 요구를 수용하여 대중적 글쓰기에 대한 교육을 병행한다면, 전문영화비평의 활성화가 완전히 요원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무겁게 베어내는, 유쾌한 듯 놀지만 집요하게 따지는 비평이 대중과 통하는 비평이다. 대중과 가까이 하면서, 원거리 권력에 대한 통찰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비평이 진짜 비평이다. 대중을 낮춰 보거나 대중성을 경멸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쉽게 영합하거나 대중권력의 문제를 넘어가지 않는 비평. 대중비평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비평 그 자체의 보편적 요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전규찬, 2007), 아울러 대중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 대중과의 상관 안에서 형성되는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규명은 기존 영화비평의 공백을 메우는 길이기도 하다(박유희, 2008).

 

참고 문헌

1. 문정숙(2009) <키친 테이블 노블을 꿈꾸며> 상상마당 포럼 감상문
2. 박유희 (2008). <서사의 숲에서 한국영화를 바라보다> 다빈치
3. 발터 벤야민(1983).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중 기계복제 시대 예술 작품의 아우라> 반성완 역 민음사
4. 백승찬(2009) <영화 비평의 시대는 끝났는가> 경향신문 기사
5. 수잔 손탁(2002)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역. 이후
6. 신응철(2005) <대중문화 비평과 비평가로서의 지식인> 해석학연구 15권, 한국해석학회
7. 오르테가 이 가세트(2005) <대중의 반역> 황보영조 옮김. 역사비평사
8. 원용진(2007) <대중비평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 대중비평의 형성 과정> 문학과 사회. 제20권 제4호, 문학과 지성사
9. 이성욱, 김은형(2002). <비평의 파산> 한겨레 21 제390호 기사. 2002.01.03 발행
10. 전규찬(2007) <민주적 대중비평 정치의 시빌리테> 문학과 사회. 제20권 제4호, 문학과 지성사
11. 정진수(2003) <연극비평과 대중> 공연 예술저널 제 5호.
12. 조형준(2007) <대중비평의 공포의 변증법 또는 우리 시대 괴물의 고고학> 문학과 사회. 제20권 제4호, 문학과 지성사
13. 진중권(2008) <영화, 비평, 대중> 비평과 이론 제 13권 1호. 한국비평이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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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심영섭

등록일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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